<-- 100화 : 오빠가 진짜 이럴 리 없어-03 -->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동하는 정말 미국 사람이 나타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백화점에서 합류한 사람들 중에 미국 사람이 있었다.
금발에 새파란 눈동자의 미녀였다.
“정말 미국에서 배운 건가요?”
그녀의 입에서 어설프긴 하지만 한국말이 흘러 나왔다.
동하와 미현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외국 여자가 한국말을 알아듣고 또 말을 할 줄이야. 심지어 그녀는 동하가 한 말을 모두 사실로 믿고 있었다.
“나는 제인이라고 해요. CNN 한국지사 특파원이에요.”
그녀가 동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동하는 얼떨결에 그녀와 악수를 했다.
제인은 올해로 1년째 한국에 머물고 있었다. 아직 한국말이 서툴긴 하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말들은 대충 알아들 수 있었다.
“최동하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아까는 정말 고마웠어요.”
제인은 원래 다온텔레콤과 제휴를 맺으려고 한국에 방한하는 미국 기업인들을 취재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괴수들로 인해 모든 것이 틀어져 버린 상태였다. 그녀의 동료였던 카메라 기자는 이미 괴수들에게 목숨을 잃었고, 그녀 역시 동하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었다.
정말 어마어마한 능력이었다.
총이나 로켓 같은 무기도 통하지 않았고, 탱크나 장갑차도 무용지물이었다.
한데, 그런 괴수들을 맨손으로 너무도 가볍게 때려잡는 동하의 모습은 충격과 경악 그 자체였다. 제인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절대 믿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자세히 말해 줄 수 있나요? 미국에 그런 신비한 능력을 지닌 스승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네요.”
“글쎄요.”
“굳이 미국의 스승님을 언급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혹시 취재에 응해주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동하의 기사를 내보내면 정말 시청률이 대박 날 것 같았다.
맨손으로 괴수들을 때려잡는 초인적인 사람이라니.
이건 무조건 특종이 될 게 분명하다. 그렇게 되면 제인 역시도 1년 동안의 특파원 생활을 청산하고 미국의 본사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하나 동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도 거절합니다.”
“왜, 왜요? 괴수들이 전 세계에 나타난 이상 동하 씨 능력은 아주 특별해요. 분명 방송을 타고 나면 동하 씨는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을 수 있다고요. 어쩌면 미국에서 동하 씨를 스카우트하려고 할지도 모르죠.”
제인은 기자답게 좀처럼 포기할 줄 몰랐다.
그녀가 제안한 말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들으면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는 것들뿐이었다.
그만큼 제인은 지금 필사적이었다. 그렇다고 단순히 동하를 매스컴에 알리고 출세할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제인은 어느 때보다 이성적인 상태였다.
그녀는 어떻게 하든 동하를 설득해서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무지막지한 능력의 사내를 유혹해서라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녀는 이미 속보를 통해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괴수들이 나타난 것을 알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지구가 멸망을 한다느니, 신이 노해서 벌을 내린 것이라느니 온갖 설이 난무했지만, 중요한 건 전 세계가 똑같이 괴수들의 손에 고통을 겪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분명한 것 하나는 동하와 함께 있으면 적어도 괴수들의 손에서 죽을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유경은 물론이고 혜주와 미현도 발끈했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니까 보따리 내놓으란 격이네. 이제 그만 동하 씨 옆에서 떨어져요. 동하 씨가 싫다고 하잖아요.”
“미국이 어쩌고 어째? 오빠를 스카우트한다고? 흥, 웃기지도 않아. 오빠가 가족을 버리고 미국에 갈 것 같아?”
☆ ☆ ☆
창고 안에는 새근새근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사람들은 모두 지쳐서 깊은 잠에 든 상태였다.
그건 미현과 유경 등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은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곤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제인은 그녀들과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누워 있었다.
동하는 자는 척 누워 있다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9월도 어느덧 중순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미 입추가 지난 지도 한 달이 되었고, 저녁때가 되면 찬바람이 슬슬 불어오고 있을 때였다. 당연히 일교차가 커서 낮에는 덥지만 밤이 되면 당연히 기온이 떨어지고 날이 추워진다.
그래서였다.
창고 안의 기온은 더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빨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추운데, 사람들의 옷차림은 대부분 짧은 반바지에 반팔 차림이었다.
배고픈 문제를 해결하니까 이젠 추위가 걱정이었다. 동하의 옷차림도 얇은 편이었지만, 그는 추위나 더위를 타지 않는 한서지체의 몸이었다. 한 겨울 혹한에도 여유롭게 땀을 흘릴 수 있는 신체였다.
하지만, 이 문제도 간단하게 해결했다.
동하의 인벤토리에는 필드에서 쓰려고 준비했던 텐트와 침낭이 있었다.
필드에서 사용하려고 준비했던 것인데, 현실에서 사용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침낭의 숫자가 많이 부족하긴 했지만, 텐트가 두 개나 있어서 그럭저럭 추위는 피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 역시도 한바탕 우여곡절을 치러야 했다.
동하는 텐트 등의 물건을 건물 안에서 찾은 것처럼 해서 가져왔지만, 이제 동하의 그런 뻔한 속임수에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동하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믿는 유경까지도 그랬다. 그러거나 말거나 동하는 끝까지 시치미로 일관했다.
창문이 없어서 창고 안은 불빛 하나 없이 어두웠다.
비좁은 창고에 많은 사람들이 자고 있어서 까딱 잘못하면 그들을 밟고 지나갈 수 있었다.
동하는 즉시 공력을 일으켜 두 눈에 집중했다. 아무런 불빛이 생겨나지 않았는데도 동하의 눈에는 칠흑처럼 어두웠던 창고 안이 대낮처럼 환하게 보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움직여 창고를 나왔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동하는 복잡하게 엉켜 있던 머릿속이 점점 맑아졌다.
1시 20분.
어느덧 괴수들이 지구를 침공한 지 7시간 하고도 20분이 지난 상황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압구정동은 포탄을 맞은 듯 쑥대밭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1차 침공의 참상은 지구의 마지막 모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애교 수준이라고나 할까?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 1차 침공이었다.
동하는 아무것도 준비한 것이 없던 상태였다.
벙커는 물론이고 결정체 하나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를 도와줄 각성자 한 명 만들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늦은 건 아니었다.
동하 혼자서 모든 괴수들을 죽이고 인류를 구원할 수는 없었지만, 이제부터 차근차근 멸망을 대비할 상황을 만들어 가면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동하는 압구정동을 돌아다니며 괴수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놈들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기감을 최대한 열고 놈들의 종적을 따라가다 보면 지하철 안에도 건물 안에서도 놈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크르릉!”
대부분 한 마리씩 떨어져 있었지만, 운이 좋으면 몇 마리가 함께 모여 있기도 했다.
동하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인벤토리에서 사체로 강화한 검을 꺼냈다.
애초에 놈들은 동하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물며 사체로 강화한 검을 들고 있는 동하에겐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쇄애액!
검이 바람을 가를 때마다 괴수들의 몸은 두 동강으로 잘려져 나갔다.
“케에엑!”
아직까지 자이언트 검치 호랑이나 자이언트 악어처럼 필드 2관의 절대적인 포식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인간들에겐 불행 중 다행인지도 몰랐다.
놈들까지 있었다면 인류는 1차 침공에서 지금보다 더 많은 피해를 겪었을 것이었다.
동하는 놈들의 사체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처음부터 동하는 단순히 놈들을 사냥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필드에서 그랬던 것처럼 놈들의 사체를 해체할 생각이었다. 뼈는 뼈대로 가죽은 가죽대로. 거기에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생겼다면 그건 바로 결정체를 얻는 것이었다.
동이 틀 때까지 동하는 압구정동을 돌아다니며 괴수들을 사냥했다.
밤새도록 괴수들을 사냥한 보람이 있었다. 10평짜리 인벤토리에 괴수들의 사체로 가득 차서 더 이상 여유 공간이 없었다.
☆ ☆ ☆
그건 불가사의하단 표현으로도 부족했다.
어제 저녁.
전 세계적으로 공간이 열리고 그 속에서 괴수들이 나타나 무차별적으로 인간을 공격했다.
각 나라에서는 군대를 동원했지만, 아직 그 어떤 나라에서도 괴수들을 쓰러뜨렸다는 뉴스는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괴수들의 손에 피해만 더 늘어갈 뿐이었다.
한데, 유일하게 대한민국의 압구정동에만 괴수들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다. 의견이 분분했다. 일각에서는 압구정동의 괴수들이 다른 지역의 괴수와 합류한 것이라고 말했고, 다른 사람들은 소설에서처럼 지구에 퍼져 있는 바이러스가 우주 생명체인 괴수들에게 치명적인 독소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설득력 있는 가설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지역의 괴수와 합류한 것이라면 그쪽 지역에 괴수들이 대폭 늘어야 하는데, 그런 징후가 전혀 없었다. 또한 바이러스 때문에 괴수들이 죽은 것이라면 시신이라도 있어야 정상이었다.
“대통령님.”
“어서 오세요, 비서실장. 무슨 이유인지 알아 보셨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비서실장이 대통령 앞에 사진 몇 장을 내밀었다.
워낙 멀리서 찍은 것이라 사진은 선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진 속에는 남자로 보이는 한 사람이 괴수를 쓰러뜨리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대통령이 적잖이 놀란 표정으로 비서실장을 쳐다보았다.
비현실적인 상황에 사진협상을 떠올렸을 정도였다.
“저도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지만, 사진을 합성하기에는 시간적으로 무리입니다.”
하긴, 그것도 그랬다. 어제 괴수들의 시신을 몇 구나 발견했으니 마냥 사진합성으로 생각할 수도 없었다.
이것으로 확실해진 상태였다.
압구정동에서 발생한 불가사의한 일은 사진 속의 인물이 해결한 것이었다.
대통령은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능력을 사용했기에 모든 나라에서 전전긍긍할 정도로 두려운 괴수들을 한두 마리도 아니고 수십 마리 이상을 처리할 수 있었는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다른 나라의 사정은 어떻습니까?”
“중국에서는 벌써 미사일을 투하했지만, 결과는 미미한 수준이라 합니다. 이에 미국과 러시아는 최악의 경우 핵폭탄을 투하할 생각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까?”
“저희도 압구정동만 빼면 최악의 상황입니다.”
“흐음.”
대통령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현재 남은 희망은 사진 속의 인물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님, 지금 국정원에서 조사에 착수했으니 조만간에 정확한 신분을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극진히 대우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대통령님.”
“그리고 절대 보안을 유지하십시오.”
“예?”
“미국이나 일본 그리고 중국 쪽에 정보가 흘러나가지 않도록 입단속을 철저히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제야 비서실장은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정부 여당에는 친미 쪽 사람들이 판을 치고 있었고, 야당에는 친일 인사들이 득세를 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대한민국에 괴수들을 맨손으로 때려잡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결코 대한민국 정부에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 ☆ ☆
스윽!
동하가 공간이동으로 창고 안에 들어섰다.
다행히 아직 잠에서 깬 사람은 없었지만, 설령 잠이 깬 사람이 있어도 별 상관은 없었다.
동하는 은둔술로 자신의 몸을 감추었기 때문에 누구도 공간이동으로 창고 안에 들어온 동하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어느덧 시간은 6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해가 뜨고 날은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지만, 여전히 창고 안은 어두컴컴했다.
동하는 자는 척을 하려고 살그머니 다시금 자리에 누웠다.
오래지 않아 하나둘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 동하를 흔들어 깨웠다.
“오빠, 일어나.”
“아함.”
동하는 그제야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다 일어나 있었어?”
“우리도 방금 일어났어.”
“지금 몇 시나 되었는데?”
“7시. 어제 오빠가 늦어도 7시에는 출발을 해야 한다고 했잖아.”
“아, 미안. 내가 너무 피곤했나 보다.”
대종상감 연기였다. 누구도 동하가 새벽에 창고를 나가 괴수들을 사냥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동하는 텐트와 침낭은 창고에 내버려 두고 밖으로 나왔다.
모든 사람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동하의 뒤로 쫓았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 괴수들이 튀어 나올지 몰라서 쉴 새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람들은 서로 동하의 옆에 조금이라도 더 바싹 붙어 있으려고 전쟁이 벌어졌다. 특히, 유경과 제인의 신경전은 시간이 지날수록 치열해졌다.
하지만, 창고를 빠져 나와 거리를 걷기 시작한 지 1시간도 더 넘었는데 괴수들을 만나기는커녕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괴물들이 사라진 것 같아.”
“설마 놈들은 밤에만 활동하는 야행성인가?”
이유야 어찌 되었든 괴수들이 없다는 것이 중요했다.
사람들의 얼굴도 점점 밝아졌다.
지쳐있던 발걸음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1시간 이상을 더 걸었을 때 그들은 한남IC를 지나 잠원동에 들어섰다.
그 일대를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가 사람들이 나오는 모습을 보고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저기 사람이 나온다.”
“당장 상부에 연락해.”
드디어 안전지대에 도착한 것이다.
☆ ☆ ☆
“아이고, 유경아.”
“엄마!”
이산가족 상봉을 보는 것 같았다.
유경과 강혜련 여사는 서로를 얼싸안고 대성통곡했다.
대한전자의 서초사옥 안이었다. 잠원동에 들어선 동하 일행은 대한전자가 있는 서초동으로 다시 이동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