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 오빠가 진짜 이럴 리 없어-01 -->
엑소더스의 시작이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는 쉴 새 없이 속보를 내보냈고, 괴수들이 빠른 속도로 압구정동 일대를 점령해 나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압구정동에서 가까운 안전구역으로 청담동이 거론되었다. 이곳은 아직 괴수들이 나타나지 않은 곳이었다. 정부와 전문가들은 최대한 빨리 집에서 나와 청담동쪽으로 대피령을 내렸다.
수많은 시민들은 겁에 질려 앞 다투어 압구정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짐을 챙길 시간조차 없었다. 그저 지갑과 당장 입을 수 있는 옷가지 몇 개만 달랑 챙긴 채 일제히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거리는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했다.
“차 열쇠 내 놔.”
“이건 우리 차예요.”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차 열쇠 내놓으라고?”
여기저기서 고성이 터지고 싸움이 일었다. 심지어는 차를 빼앗기 위해 강도짓도 서슴지 않는 자들도 생겨났다.
모든 것이 압구정을 탈출해서 청담동으로 가기 위해 벌어진 일이었다.
거리상으로는 얼마 되지 않지만, 걸어서 가기에는 사실 부담스러운 거리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건 유경이나 혜주 등도 마찬가지였다.
유경이나 혜주에겐 주차장에 세워놓은 차가 두 대 씩이나 있었다.
하물며 시민들이 앞을 다투어 압구정을 벗어나려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더욱 초조해졌다.
이렇게 걸어서는 언제 압구정동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
자신들만 빠져나가지 못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수많은 시민들이 한꺼번에 몰려나오면서 오히려 거리와 도로에는 아비규환 사태가 벌어졌다.
도로는 주차장으로 변한 지 오래였고, 도시가 마비가 되어 희생자만 더 늘어날 뿐이었다.
그렇다고 집에 있거나 건물에 숨어 있다고 절대 안전하지만은 않다.
괴수들은 본능적으로 인간들의 냄새를 맡고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걸 모르고 집이나 건물 안에 숨어서 안심하고 있다가 참변을 당한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더 피해가 컸다.
동하는 이미 아비규환 사태가 벌어질 걸 알고 있었다.
더구나 경찰과 군대가 초동대응에 실패하고 도시마저 마비가 되면서 사람들의 희생이 더 많아질 건 불을 보듯 뻔했다. 괴수들에겐 굳이 인간들을 찾아다닐 수고를 하지 않고도 한꺼번에 많은 인간들을 죽일 수 있는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그렇게 결정한 것이 걸어서 움직이는 것이었다.
물론 동하는 1성급 몬스터 따위는 무섭지 않으니 할 수 있는 생각이기도 했다.
여인들은 처음엔 그런 동하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 도로가 주차장으로 변하고 도시가 마비가 되는 것을 보고는 소름이 돋는 한편 동하의 선견지명에 혀를 내둘러야 했다.
“아마 우리도 자동차를 타고 가려 했다면 저렇게 되었을 거야.”
“그, 그러게. 나는 이제 동하 씨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거야.”
유경과 혜주는 동하의 관상 능력을 떠올렸고, 그 다음부터는 동하가 무슨 말을 하든지 일체 의문을 품지 않았다.
미현은 생각할수록 신기한 일이었다.
도대체 그녀가 알고 있는 예전의 오빠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제대로 일치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빠, 처음부터 알았지?”
“무얼 말이니?”
“자동차를 타고 가면 안 된다는 거 말이야. 그리고 도심이 마비될 거라는 거. 미리 알지 않고서야 어떻게 처음부터 걸어서 탈출할 생각을 할 수 있냐고?”
“글쎄. 원래 오빠가 반골 기질이 있잖아? 남들이 다 하는 건 그냥 하기 싫더라고.”
“나 참. 차라리 미국 드립이 낫겠네. 겨우 반골 기질 때문에 자동차를 버리고 걸어서 가는 걸 택했다는 걸 지금 나 보고 믿으라고? 그것도 생사가 걸린 중차대한 문제를?”
미현이 눈을 하얗게 뜨고 동하를 노려보았다.
분명 뭐가 있긴 있는데, 동하는 자세히 설명해 주려 하지 않았다.
☆ ☆ ☆
동하는 서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청담동이 있는 곳과는 정반대 방향이었다.
얼핏 보면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정부에서도 청담동으로 대피령을 내렸고, 그곳에는 괴수들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하는 철저하게 노을의 색깔이 흐리고 진한 유무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은 서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멍청하게 생각될 수 있어도 조만간 청담동을 비롯해서 노을의 색깔이 진한 곳은 몬스터들의 서식지로 변하게 될 것이었다.
그 와중에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 걸어서 압구정을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원래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이었지만, 삼삼오오 모여서 지금은 수십 명의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
“헛헛! 남자 한 명에 여자만 열 명이라니. 어떻게 괴물들의 손에 죽지 않고 용케도 여기까지 왔군 그래.”
그들은 원래 사람들이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많았었는데, 여기까지 오면서 절반 이상이 괴수들의 손에 죽은 상태였다.
“자네는 어느 쪽으로 가나?”
“우린 서쪽으로 가는 중입니다.”
“혹시 청담동으로 가라는 정부의 대피령을 듣지 못했나?”
“듣긴 했지만, 여러분들도 그쪽으로는 안 가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제가 관상을 조금 볼 줄 압니다. 지금 당장은 청담동이 안전해 보일지 몰라도 조만간에 커다란 위험이 닥칠 겁니다.”
“황당한 소리로군.”
“이봐, 젊은이 죽으려면 혼자 죽어.”
“관상이라니. 그게 청담동이 위험하다는 것과 무슨 상관이람.”
사람들은 동하의 말을 믿지 않았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줄 수도 있었지만, 사실 동하가 회귀를 해서 알게 되었다고 한들 사람들이 믿어줄 리 만무했다.
“이봐요, 아가씨들. 저 미친 인간하고 같이 가지 말고 우리와 함께 갑시다.”
유경과 혜주 그리고 미현 등을 바라보는 남자들의 눈빛이 좋지 않았다.
세상은 점점 요지경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남의 자동차를 빼앗기 위해 강도짓도 서슴지 않는 마당에 아름다운 미녀들을 보고 탐욕이 생기지 않을 리 없었다. 인류가 멸망으로 달려갈수록 사람들의 도덕관념 역시 약해지고 있었다.
“아니에요. 우린 신경 쓰지 말고 여러분들 갈 길이나 가세요.”
유경과 혜주가 싸늘한 말투로 톡 쏘아 붙였다.
그녀들은 남자들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동하를 떠나면 바로 괴수들의 손에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 같은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이 사라진 뒤였다.
남자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들을 강제로 끌고 가고 싶었지만, 이렇게 실랑이를 벌이다 시간만 끌게 될 터.
언제 괴수들이 나타날지 두려웠다.
“퉤, 별 미친년들을 다 보았군.”
“얼굴이 반반해서 살려주려 했더니 뭐가 어째?”
“이봐, 아가씨들. 나중에 괴물을 만나서 죽게 되더라도 우릴 원망하지 말라고.”
남자들이 침을 뱉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방금 지옥에 한발 걸쳤다가 극적으로 살아났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동하는 그들의 행태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마 그들이 조금만 더 강압적인 분위기로 유경과 혜주 등을 윽박질렀다면 동하는 결코 참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이전 생애에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났었다는 기사가 떠올랐다.
그때도 1차 침공 직후에 생필품이 부족해서 서로 생필품을 차지하기 위해 약탈을 벌이고 강도와 살인도 서슴지 않았었다. 심지어는 부족한 식량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와 국가 사이에 전쟁을 벌이는 경우도 있었다.
인류가 차츰 안정을 되찾고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건 대충 1차 침공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때는 이미 3년이 지난 후였고, 그만큼 괴수들의 침공이 정신적으로 인류를 피폐하게 만들었다는 뜻일 터였다.
☆ ☆ ☆
1차 침공 3시간이 지난 시각.
정부는 전투준비태세 1단계가 발령이 되었다.
모든 부대는 동원령이 선포되었고, 전시에 돌입했다.
대통령 역시 모든 청와대 참모들과 군대의 지휘관들과 함께 자리에 모여 대책을 논의했지만,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암담한 것들뿐이었다.
-총알이 통하지 않습니다.
-괴물들이 장갑차를 두부 자르듯 부셔 버렸습니다.
-탱크도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 경찰이 전멸하고 군부대 역시 별다른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끊임없이 후퇴만 반복하고 말았다.
원래 이런 전투준비 태세가 발령이 되면 한국군이 갖고 있는 작전권이 한미연합사령부에 넘어가지만, 지금은 미국 역시 데프콘이 발령된 상태라 한국을 도와줄 여력이 없었다. 모든 건 한국이 스스로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대통령님. 전투기를 띄워서 미사일로 집중 포격을 해야 합니다.”
“그건 안 됩니다. 도시에는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시민들이 많아요. 그들을 전부 죽일 셈입니까?”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대통령님. 얼마간의 희생이 있겠지만, 지금은 괴물들이 다른 도시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여기저기서 참모들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대통령의 고민이 깊어졌다.
이건 단순히 괴물들만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도심 한복판에 미사일을 집중 사격하면 설령 괴물들을 죽인다 해도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날 것이었다. 무고한 시민들이 죽는 건 물론이고 건물이 파괴되고 천문학적인 피해가 발생할 터.
이는 대한민국의 상징인 서울이 무너지는 것이다.
한데, 그렇게 하고도 괴물들을 죽이지 못한다면 그땐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이 더욱 대통령의 마음을 갈등하게 만들었다.
“이게 최선이오?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은 없소?”
“지금은 곡사포와 로켓포로 어떻게든 막고 있긴 하지만, 그것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란 보고입니다.”
“흐음.”
대통령이 결국 마음의 준비를 하고 결정을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비서실장이 황급하게 회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대통령님. 방금 수방사 쪽에서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압구정 일대에 괴물들 중 일부가 죽은 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오오. 드디어 탱크나 로켓포로 놈들을 죽인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어떤 이유인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괴물들의 사체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스러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탱크나 로켓포로도 죽이지 못하는 놈들을 무슨 수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죽인단 말입니까?”
“하지만, 그게 한두 마리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들만 10구가 넘는다고 합니다.”
“10구가 넘는다고요?”
그렇다면 우연이 아니라는 소리 아닌가?
신의 선물? 아니면 하늘의 기적?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총알이나 로켓포로도 죽이지 못하던 괴물들을 죽인 존재가 압구정 어딘가에 있었다. 그를 찾아야만 했다.
“전투기를 띄우는 건 불허합니다.”
“대통령님.”
참모들이 다급한 표정으로 외쳤지만, 대통령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침착한 표정으로 비서실장을 쳐다보았다.
“비서실장.”
“예, 대통령님.”
“어렵다는 것은 알지만,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알아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수방사에 연락을 해서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보라고 하세요.”
☆ ☆ ☆
동하는 그 사건이 있고 난 이후부터 가급적 인적이 드문 곳으로만 다녔다.
괜히 쓸데없는 사건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건 모든 여인들 역시 마찬가지여서 순순히 동하의 뒤를 따랐다.
괴수들이 지구를 침공한 지 겨우 3시간 정도가 지났을 뿐이었다.
한데, 압구정은 죽음의 도시를 방불케 하고 있었다.
거리에는 사람들의 시신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고, 차도에는 부서지고 박살난 차들이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그중에는 부서진 경찰차와 군용 트럭들도 보인다.
괴수들을 죽이기 위해 경동과 군대가 차례로 투입이 되었지만, 초동대응에 실패하고 후퇴한 상태였다.
괴수들은 빠른 속도로 압구정 일대를 점령해 가고 있었다.
이전 생애와 비슷한 양상이었다. 그때도 어느 한 지역을 점령한 다음 다른 지역으로 점차 확산해 나갔으니까.
이것이 침공 첫날의 모습이었다.
아직은 괴수들이 나타난 지역은 몇 개 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사흘째 되는 날부터 몇 개의 도시에 공간이 열렸고, 7일째 되는 날엔 대한민국의 절반이 넘는 도시에 괴수들이 나타났다. 이미 괴수들이 나타난 지역에도 계속 공간이 열렸고, 괴수들의 숫자도 그만큼 늘어만 갔다.
그야말로 이제부터 시작인 셈이었다.
동하는 몇 차례나 괴수들을 만났지만, 그때마다 괴수들은 동하의 손에 처참한 몰골로 죽어갔다.
하지만, 괴수들은 소리에 민감했다.
조그만 발자국 소리에도 주변에 퍼져 있던 괴수들이 우르르 몰려올 판이었다.
하물며 동하의 손에 괴수들이 죽을 때 지르는 비명 소리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때문에 동하도 가급적 괴수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최대한 조심하며 움직였다.
“다들 괜찮아?”
“아직은 견딜 만해요.”
다들 힘들어서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대답은 잘한다.
하긴 이런 상황에서 힘들다고 투덜거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문득 동하가 발걸음을 멈추고 여인들을 돌아보았다.
“여기서 잠깐 쉬죠.”
“하아.”
동하의 말에 여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두운 골목 안이었다.
음산한 기운이 느껴질 정도라 여인들은 약간 꺼림칙했지만, 골목 안쪽이 건물에 막혀 있어서 그쪽에서 괴수들이 갑자기 튀어 나올 걱정은 없었다. 그렇다는 건 한쪽만 경계하면 된다는 뜻이었다.
여인들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녀들은 더 이상 서 있을 기력도 걸어갈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나마 미현과 그녀의 친구들은 처지가 좀 낫다. 유경과 혜주는 하이힐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상태로 계속 뛰고 도망 다닌 탓에 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
“유경 씨, 발은 어때요?”
“괜찮아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데요?”
얼핏 봐도 뒤꿈치가 까져서 피가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생각보다 상처가 더 심했다. 피부가 벗겨진 상태에서 계속 걷고 뛰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유경은 아까부터 아까서 발을 절뚝거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고 있었다.
“나 참. 이런데도 참고 있었어요?”
“괴물하고 싸우는 것도 힘이 드실 텐데, 이런 것까지 동하 씨를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서…….”
말도 참 예쁘게도 한다.
동하가 빙그레 웃었다.
“앞으로는 귀찮게 해도 되니까 아프면 참지 말고 말해요.”
동하는 유경의 하이힐을 벗기고 그녀의 발을 잡았다.
동하의 팔에는 예전에 자해공갈단의 정체를 만천하에 밝히기 위해 사용하고 남은 사체의 치료약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