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입찰경쟁-02 -->
겨우 한 사람에 의해 대한민국의 거대 기업들이 좌지우지된다면 그 누가 믿으려 할까?
아마 우스갯소리로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현실이었다.
끝없이 추락만 일삼던 다온텔레콤이 동하의 손에 의해 지금은 세계로 뻗어 가는 기업으로 성장을 했고, 마찬가지로 당장 망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던 미셜 화장품이 하루아침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기업으로 변신했다.
그에 반해 대한전자는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고, 압도적으로 업계 1위를 고수하던 새경텔레콤은 바람 앞에 흔들리는 등불처럼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재계 서열 10위 안에 드는 거대 기업들이 단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추락을 하고 비상도 하는 등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서용훈 사장이나 서 회장은 이런 현실을 부인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말이 말 같아야 믿으려고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눈앞의 결과가 너무도 확실하다 보니 이제는 동하를 잡는 곳이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무조건 동하의 마음을 사로잡아야만 했다.
그것에 대한그룹의 사운이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 개인적인 친분이니 의리니 하는 사적인 감정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은 어느 누구보다도 서용훈 사장이나 서 회장이 더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지극정성.
마음을 움직이고 신뢰를 얻어 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서용훈 사장은 과감하게 전략을 바꾸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돈을 앞세워 동하와 계약하려고 했다면 이번엔 오히려 돈이 별로 들지 않는 일을 계획했다.
하지만, 서용훈 사장은 이번에는 충분히 동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자신했다.
“이번에는 틀림없을 겁니다.”
한 번의 실수는 ‘병가의 상사’라 했다.
서용훈 사장의 사전에는 두 번의 실패는 없었다.
☆ ☆ ☆
부아아앙!
람보르기니가 강렬한 배기음을 내며 시내를 달리고 있었다.
미현은 신기한 듯 실내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오빠, 이 차 엄청 비싸지?”
“후후! 당연히 억 소리 나게 비싸지.”
“맙소사. 억이 넘어간단 말이야?”
“아마 그 이상일 걸?”
“서, 설마 10억?”
요즘 동하가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은 알았지만, 십억 원이 넘는 차를 아무렇지 않게 사는 걸 보면 아무래도 미현이 생각했던 것보다 돈을 더 많이 버는 것 같았다.
“우와. 우리 오빠 엄청 출세했네. 이러다 나중에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대저택으로 이사하는 거 아닌지 몰라?”
미현은 그저 농담으로 한 말이었다.
하지만, 동하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집을 짓고 있는 중이다.”
“지, 집을 짓고 있다고?”
미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파트로 이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대저택인지는 모르겠지만, 공사비만 300억 원 넘게 들어가니까 무지 비싼 건 맞을 거야.”
“에이, 지금 농담하는 거지? 무슨 집을 짓는데 300억 원이 넘게 들 수가 있어?”
“난 우리가 망한 이후 집 가지고 농담하지 않는다.”
“그, 그건 그렇지만…….”
“지금 한창 공사하고 있으니까 나중에 시간이 되면 어머니 모시고 같이 가 보자.”
동하는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공사 현장에는 자주 가서 확인했다.
공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바닥을 깊게 파고들어간 상태였다. 유경의 선배 말로는 조만간에 본격적인 철골공사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낮과 밤 2교대로 진행이 되어서 잠시도 쉬지 않고 공사가 진행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공사를 하고 있다고? 그럼 방금 오빠의 말이 모두 사실이란 말이잖아?”
미현은 비명을 질렀다.
동하가 10억 원이 넘는 차를 가지고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안 것만 해도 기절초풍할 노릇인데, 300억 원이 넘는 집을 짓고 있단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제정신이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동하는 이제 더 이상 무서운 오빠가 아니었다.
자상하면서도 한없이 든든한 오빠였다.
이것만으로도 미현은 물론이고 그녀의 가족들은 충분히 놀랄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성격만 180도로 변한 게 아니라 아무 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던 동하가 지금은 못하는 것이 없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이렇게 돈도 잘 벌고 능력 있는 사람이 예전에는 왜 그렇게 개망나니로 살았는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오빠. 혹시 아직 말하지 않은 게 더 있어?”
“글쎄. 이제 없는 것 같은데.”
“생각 좀 해보고 말해. 나중에 사람 또 놀라게 하지 말고.”
막말로 동하가 미국 유학 가서 사업 구상을 했다는 말보다 지금이 더 황당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아! 생각해 보니까 하나 생각나는 게 있네.”
“지, 진짜? 이번에는 또 뭔데?”
미현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침을 꼴깍 삼키고 동하를 쳐다보았다.
“후후. 이번엔 그리 놀랄 만한 건 아니니까 괜히 긴장하지 말고.”
동하는 핸드폰을 열고 유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한그룹에서 사회공헌 차원에서 박물관은 물론이고 미술관과 놀이공원까지 운영하고 있다는 말을 얼핏 들은 기억이 있었다.
-어머, 동하 씨.
유경의 목소리가 한껏 들떠 있었다.
동하가 먼저 전화를 해준 게 지금이 처음이기도 했지만, 동하가 만물상점 가는 문제나 수련에 몰두하기 위해 당분간 연락을 못할 것 같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일주일 정도 된 것 같았다.
-이제 바쁜 일은 다 끝난 건가요?
“미안해요. 연락이 많이 늦었죠?”
-피이. 그렇게 또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한다. 아직 무슨 일 때문에 연락도 못할 정도로 바빴던 건지 말해주지 않았어요.
“핫핫! 그건 나중에 시간이 되면 말해 줄게요.”
물론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으니 적당히 둘러댈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부탁을 좀 할 게 있는데 오늘 시간 괜찮습니까?”
-저는 오늘 한가해요. 남는 게 시간밖에 없거든요.
하지만, 유경은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서 막 외출을 하려던 상태였다.
“대한그룹에 미술관 있죠?”
-예? 예, 그렇긴 한데 그건 왜요?
“동생이 오늘 특활 시간인데 미술관에 가서 전시회도 보고 감상문을 써야 한다고 해서요.”
사소하다면 사소한 부탁이었지만, 유경은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동하가 가족들을 처음으로 소개시켜 주는 자리가 아닌가?
왠지 막중한 임무처럼 느껴졌다. 잘하면 미래의 시누이가 될 수도 있는데 미리미리 잘 보여서 나쁠 게 없었다.
-혹시 동하 씨도 같이 오나요?
“후후. 애들 특활 시간인데 제가 갈 수 있나요?”
-알았어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럼, 부탁할게요.”
동하가 전화를 끊자 미현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방금 그 전화 누구야? 혹시 여자친구?”
“그냥 아는 사람.”
“말도 안 돼. 그냥 아는 사람인데 대한그룹이야?”
☆ ☆ ☆
기술이 곧 경쟁력인 시대였다.
다온텔레콤의 M뱅크가 국제 표준 기술로 확정이 된 것은 그만큼 국가적인 경사인 셈이었다.
하지만, 모든 건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법.
웃는 쪽이 있으면 우는 쪽도 있기 마련이다.
특히, 새경텔레콤은 단순히 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초상집 분위기였다. 더구나 문제가 되는 건 지금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데 있었다.
“미국에 이어 일본의 NP텔레콤 관계자가 입국 예정이라고?”
“다온텔레콤과 제휴를 맺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으음. 다른 곳은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일본의 NP텔레콤이 어떻게 우리에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강승민 회장의 얼굴엔 실망을 넘어 분노가 어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NP텔레콤은 오랫동안 새경텔레콤의 전략적인 파트너였다.
아무리 이해관계에 따라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새경텔레콤에게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이러는 건 명백한 배신 행위였다.
“어떻게 할까요, 회장님?”
“그냥 모른 척 해. 만나서 따져봐야 우리 꼴만 우스워질 뿐이지.”
그야말로 창사 이래 최악의 위기였다.
주가도 연일 곤두박질치고 있었고, 실적도 상당히 악화된 상태였다.
아마 다음 달에는 다온텔레콤에게 점유율도 추월당할 것 같다는 예상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M뱅크를 따라잡을 그 이상의 기획이 나와야 하는데, 지금 새경텔레콤의 상황은 그리 녹녹치 않았다.
압도적인 업계 1위를 달리던 새경텔레콤이었다.
지난 10년 넘게 왕좌를 지켜오던 새경텔레콤이 한순간에 벼랑 끝까지 내몰릴 줄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모든 건 수정이 멤버십 카드와 M뱅크를 연이어 발표하면서 시작된 일이었지만, 강승민 회장은 분명 수정의 뒤에 누군가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 한 달 넘게 수정을 조사한 끝에 한 가닥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멤버십 카드는 물론이고 M뱅크를 기획한 사람은 수정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는 정보를 얻게 됐다.
새경텔레콤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다온텔레콤 측에서도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명 되지 않다 보니 그 사람이 누군지 밝혀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강승민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 일에 사운이 걸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액의 스카우트로 미끼를 던지고 그것도 안 되면 가능한 모든 패를 던져서라도 새경텔레콤에 동하를 데려올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일전에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나?”
“그렇지 않아도 회장님께 보고를 올리려던 참이었습니다.”
“드디어 찾은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회장님.”
기획실장이 서류철을 열고 그 안에서 몇 장의 사진을 꺼냈다. 놀랍게도 사진에는 수정과 동하가 함께 하고 있는 모습과 동하 혼자 있는 모습 등 다양하게 찍혀 있었다.
“응?”
강승민 회장이 동하의 사진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지금 이 청년이 M뱅크를 기획한 장본인이란 말인가?”
“지난 한달 동안 한수정 본부장을 조사한 바로는 사진 속의 청년이 확실합니다.”
“나이가 너무 어리군. 이건 대학생이라고 해도 될 것 같군 그래.”
“학생이 맞습니다. 이름은 최동하, 현재 서일대학교 국문학과 2학년생입니다.”
“구, 국문학과 2학년? 그럼, 도대체 나이가 몇 살이란 말인가?”
“올해 스물한 살입니다.”
“이봐, 기획실장.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21살짜리 국문학과 학생이 M뱅크를 기획했다는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강승민 회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말이 말 같아야 믿기라도 하지.
평소 성격이 불같기로 유명한 강승민 회장이었다.
하물며 이런 식의 실수를 용납할 리 없었다. 강승민 회장이 무서운 눈빛으로 기획실장을 노려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낯익은 여인이 들어섰다.
바로 혜주였다.
“아빠?”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오늘 출장을 가신다면서요? 엄마가 속옷하고 갈아입을 옷을 챙겨 주셨어요.”
“그런 건 따로 비서를 시켜서 가져오면 되는데 뭐 하러 네가 직접 와?”
혜주는 바보가 아니었다.
회장실 안에 감도는 싸늘한 분위기를 읽고 조심스러웠다.
요즘 다온텔레콤 때문에 회사 분위기도 안 좋은데, 회장실 분위기마저 이러면 오래 있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아빠, 저는 그냥 갈게요.”
한데, 문득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사진을 보고 두 눈을 크게 치떴다.
“어? 동하 씨 사진이 왜 여기 있지?”
☆ ☆ ☆
“수정아, 아직 최 군에게는 연락이 없는 거니?”
“동하 씨가 바쁜 일이 있다고 당분간 연락을 못한다고 했는데, 아직 연락이 없네요.”
“흐음.”
한석민 사장이 얼굴을 찌푸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혹시 최 군이 다른 곳과 접촉을 한다고 일부러 연락을 회피하는 건 아니고?”
“에이, 아빠도. 동하 씨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다. 대한전자도 그렇고 새경텔레콤의 반응도 심상치가 않아.”
“그런 가요?”
“한데, 그곳들뿐이 아니야.”
“설마 다른 곳도 있나요?”
“미국과 일본의 통신사 쪽에서 멤버십 카드와 M뱅크를 기획한 사람에 대해 조사하고 다니는 모양이더라.”
“그들이 한국에 입국하는 게 우리와 제휴를 맺으려는 거 아니었나요?”
“그 이유도 있지만, 좀 더 자세한 사실을 확인하려는 것이겠지.”
한석민 사장은 그래서 더 골치가 아팠다. 만에 하나 외국 회사 쪽에 동하의 정보가 흘러 들어가면 그야말로 동하의 몸값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석민 사장이 미처 모르고 있는 게 있었다.
미셜 화장품에서 출시한 ‘퀸’ 때문에 전세계 화장품 업계가 발칵 뒤집어졌고, 글로벌 업체를 필두로 여러 곳에서 온갖 로비를 통해 동하의 정보를 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요?”
이쯤 되면 수정도 마음이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그날 최 군에게 다음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들었어야지.”
“그날은 말씀 드렸잖아요. 촬영장에 불이 나서 동하 씨가 아니었다면 큰 일이 났을 거라고요.”
“흐음. 그랬었지.”
한석민 사장은 입맛을 다셨다.
분명 동하가 몸값들 높이려고 뜸을 들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고 있어서 동하가 다음 아이디어를 말해주는 시기가 늦어지고 있는 건 확실했다.
동하의 도움으로 다온텔레콤이 만년 꼴찌에서 벗어나 압도적인 업계 1위였던 새경텔레콤조차 벌벌 떨게 만들고 있었다. 더구나 지금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기업으로 우뚝 올라서지 않았던가?
다온그룹은 대한민국 기업 최초로 글로벌 기업 순위 100위 안에 들어갈 공산이 컸다.
한데, 여기서 다른 업체에 동하를 빼앗긴다?
그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 ☆ ☆
한편 그 시각 동하는 필드에 가기 위해 마트에서 음식과 물을 사고 백화점으로 이동해 등산용품을 구매했다. 인벤토리에 침낭이며 옷 등이 있었지만, 이런 건 많을수록 좋은 법이었다. 지금은 돈에 구애받지 않아서 원하는 물건이 있으면 가격 같은 건 따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창 쇼핑을 하고 있을 때였다.
따르릉!
핸드폰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