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궁극의 비기-01 -->
곤륜노자가 쉽게 말을 하지 못한 다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곤륜노자가 추리한 바에 따르면 힘의 원천과 생명의 근원 관련 물건이 만물상점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 문제였다.
차라리 그것이 무림 종족의 행성에 있었다면 곤륜노자도 이렇게까지 마음이 무겁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만물상점은 호랑이 굴속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동하에겐 용담호혈로 변한 지 오래였다.
동하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어르신께서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거 아닙니까? 만물상점에 있다는 건 그 물건을 아이템으로 만들어 판다는 것 아닙니까?”
한데, 결정체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재료를 샤이언 종족이 그렇게 방치할 수 있을까?
뭔가 앞뒤가 안 맞는 소리였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네.”
하지만, 몇 번을 생각해도 결론은 마찬가지였다.
무림 종족에게는 남아 있는 기보나 보물이 없었다.
그건 이미 무림 종족의 기보나 보물, 심지어 광물이나 에너지 모두 샤이언 종족의 손에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샤이언 종족은 그것들을 가공해서 아이템으로 만들었다.
무림 종족의 테스터들이 사용하는 아이템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무림 종족에도 ‘생명의 나무’와 관련된 신화가 있었다.
하지만 야수 종족처럼 확실한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내용도 허황된 것이라 누구도 그 내용을 액면 그대로 믿은 적이 없었다.
곤륜노자도 동하에게 야수 종족의 ‘생명의 씨앗’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신화 속에서나 나오는 일쯤으로 생각했다.
먼 옛날 고대 무림 종족의 행성은 무척이나 혼돈스러운 시기였다. 음양의 기운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인간은 고통 속에 빠져 있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신이 무림종족에게 내려와 씨앗을 주었고, 그것을 땅에 심었더니 하늘까지 나무가 자라고 열매가 열렸다.
그것은 바로 ‘음양신과’였다. 그것을 복용한 인간은 내공이라는 것을 얻어 천지간의 주인이 되었고, 음양의 기운도 점차 안정을 찾아가 지금에 이르렀다는 내용이었다.
“왠지 창세 신화처럼 들리는군요.”
“후후! 창세 신화처럼 들리는 게 아니라 창세기 신화일세. 무림 종족의 기원이 담겨 있으니 말이지.”
동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창세 신화에는 무림 종족이 어떻게 내공을 얻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지만, 정작 곤륜노자조차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믿지 못하고 있었다. 하늘까지 닿는 나무는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샤이언 종족이 가져간 물건이 음양신과라는 뜻입니까?”
“결국 그런 셈이지. 당시에는 샤이언 종족도 음양신과가 어떤 물건인지 자세히 몰랐을 걸세. 나 역시 음양신과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으니 말일세.”
“어르신께서는 어떻게 샤이언 종족이 음양신과를 가져갔다고 확신을 하시는 겁니까?”
“노부가 비록 폐인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머릿속에 있는 지식과 정보까지 사라진 건 아니지 않나?”
곤륜노자는 자신의 학문에 자부심이 대단했다.
곤륜노자가 모르면 무림 종족 누구도 모른다는 말은 단순히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것이 아니었다. 곤륜노자는 무림 종족의 학문에 달통해 있었고, 심지어는 신화와 전설, 그리고 고대로부터 전해져 오는 야사까지 두루 꿰뚫고 있었다.
“창세 신화 속에 나오는 하늘까지 닿는 나무는 어쩌면 진짜 나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상승의 심법을 닮은 것 같지 않나?”
“예?”
“땅에서 시작된 나무가 하늘까지 올라가네. 그건 건곤만기. 즉 천지간에 기운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음양무극. 음양이 조화를 이루면 무극에 도달할 수 있다는 뜻과도 일맥상통하지.”
“아! 그렇군요.”
이것이야말로 무림인들이라면 꿈에도 바라지 않는 절대적인 경지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실마리가 풀리더군. 하나는 심법과 관련된 비기가 적혀 있는 무공비급일 수도 있고, 음양의 기운이 담긴 기보일 수도 있네.”
딱 여기까지였다.
곤륜노자도 더 이상을 설명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이미 음양신과의 비밀은 절반 이상 풀렸다고 볼 수 있었다.
“이제 알겠나? 음양신과가 심법이나 기보라면 어떤 식으로든 만물상점에 있을 걸세.”
“흐음. 결국 만물상점에 가서 확인해 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겠군요.”
“그렇긴 한데 정말 만물상점에 갈 생각인가? 자칫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네.”
곤륜노자는 시간이 좀 더 지나서 만물상점의 경계가 지금보다는 약해질 때 가기를 원했다.
동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이미 각오하고 있는 일입니다.”
“으음.”
곤륜노자의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 어디까지나 추리에 불과하지만, 곤륜노자는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음양신과는 분명히 존재하고 샤이언 종족의 손에 빼앗겨 만물상점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차원의 관리자들 입장에선 동하를 경계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괴수들에게 사용할 결정체를 그들이 직접 자신들에게 실험을 하고 능력을 높이려고까지 했겠는가?
당연히 차원의 관리자들은 만물상점의 경계를 강화할 것이 틀림없었다. 문제는 그들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공자님, 혼자서는 위험해요.”
남궁혜가 못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설령 차원의 관리자들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음양신과를 찾아도 문제였다.
만물상점의 아이템을 구입하려면 포인트가 필요한데, 창세의 비밀이 담긴 음양신과이니 만큼 엄청나게 비쌀 건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에 반해 동하는 포인트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남궁혜 또한 포인트가 남아 있긴 했지만, 고작 몇 백 포인트가 전부였다.
“우리도 포인트가 조금 있긴 합니다.”
타오와 야이, 그리고 왕세기와 제갈소연의 포인트를 전부 합산하자 천 포인트가 조금 넘게 모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포인트를 누구에게 몰아주거나 선물로 전해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서로의 포인트를 합산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뜻이었다.
동하도 고민에 휩싸였다.
목숨을 걸고 만물상점에 들어가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하나 포인트 없이 아이템을 어찌 가져온단 말인가?
몰래 훔쳐오는 것도 불가능하다. 계산 하는 곳 바로 앞에 경보 장치가 있어서, 포인트를 지급하지 않고 몰래 물건을 밖으로 가지고 나가려고 하면 바로 경보음이 울리게 된다.
지금 현재는 포인트로 아이템을 사는 것 외에는 아무런 대안이 없었다.
“아직 시간이 며칠 있으니 그때까지 방법을 생각해보겠습니다.”
☆ ☆ ☆
지구로 돌아온 동하는 만물상점에 들어갈 방법을 세우는 한편 수련에 매진했다.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동하였지만, 여기서 만족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동하는 여전히 부족한 부분들이 많았고, 자신이 천하무적이라 자만하기에는 아직 가야할 길이 멀었다.
만물상점에 들어가는 건 확실히 동하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차원의 관리자들이 결정체로 능력을 높였다면 아무리 동하라 해도 쉽지 않은 상대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당장은 수련 외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최근에 곤륜노조의 가르침을 받은 뒤에 자신의 부족함을 더욱 절실히 깨달은 동하였다.
동하가 각성한 능력들은 열 개도 넘었다. 그 능력들은 하나하나 대단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동하는 아직 그 능력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깨달음 없이는 상승의 경지에 오를 수 없는 법.
그건 무공이나 마법 등 모든 종족의 능력이 그러했다.
막말로 동하는 이것저것 각성한 능력을 많이 보유했지만, 무엇 하나 극에 이른 것은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동하의 장점이면서도 가장 큰 단점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능력들이 어중간하다는 뜻이었다. 여러 가지 능력을 사용하면 상대를 현혹시켜 승부를 유리하게 끌고 가는 데 제격이지만, 궁극의 스킬을 가진 적을 만나면 어중간한 동하의 스킬들이 통하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모든 능력을 극대화 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저도 모릅니다. 만물상점의 아이템들을 전부 사서 능력을 높여도 한계가 있을 테니까요.”
“흐음.”
곤륜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원의 관리자들이 강해지는 만큼 동하의 능력도 끌어 올려야 하는데, 한 몸에 너무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보니 어느 하나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게 쉽지 않았다. 하루 종일 수련에 매진을 해도 가지고 있는 능력을 모두 수련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럼 이건 어떤가?”
곤륜노자가 동하에게 한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그건 바로 몸속의 능력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마법에 내공을 섞어서 펼칠 수 있다면 그 위력이 얼마나 강해질 것인가?
당연히 닌자의 술법에 마법의 위력이 더해지면 한층 더 무섭고 날카로운 공격이 펼쳐질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말이 쉽다.
물과 불이 하나로 섞일 수 없듯 각각의 능력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질이 서로 다르고 펼치는 방법도 다르며 기운을 몸 안에 품고 몸 밖으로 발출하는 자세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이런 것들을 무시하고 무작정 여러 능력들을 하나로 합쳐서 조화를 이루려고 한다면 오히려 몸이 폭발하거나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었다.
“어르신, 그게 가능할까요?”
“마침 내가 공력을 회복하기 위해 만든 심법이 하나 있네.”
천지조화만상귀일심법.
‘천하의 기운이 조화를 이르면 결국 모든 만물이 하나로 돌아온다’는 뜻으로 곤륜노자의 학문과 무공을 집대성해서 만들어진 상승의 심법이었다.
원래 곤륜노자는 외부의 기운들을 흡수해 파괴된 단전을 회복할 생각으로 천지조화만상귀일심법을 만들었다. 한 번 파괴된 단전이 회복되지 않아 곤륜노자는 번번이 실패하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도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동하는 오직 천지조화만상귀일심법에 매달렸다.
옆에서 곤륜노자가 해석을 해주고 가르침을 주자 수련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천지조화만상귀일심법은 확실히 서로 다른 기운을 하나로 모으고 조화롭게 만드는 데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무공과 공력에 한해서였다.
공력과 성질이 전혀 다른 염력이나 인술 그리고 마법 등에도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역시 천지조화만상귀일심법으로는 어렵구나!”
동하는 작게 탄식을 토했다.
처음부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작했던 수련이기에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예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동하는 평소에 명상이 부족한 편이었는데, 천지조화만상귀일심법을 수련하면서 자신을 돌아보며 알아가는 시간이 되었다.
☆ ☆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그 사이 만물상점이 다시금 문을 열고 장사를 시작했다.
동하와 남궁혜는 접속을 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만물상점에 다녀온 테스터들의 말에 따르면 이제는 베타테스트 칩을 확인하는 것으로 인증절차가 바뀌었다고 한다. 칩에는 일련번호도 있어서 접속자가 칩을 위조한 경우에는 바로 적발될 게 분명했다. 그만큼 인증절차를 무력화시키고 만물상점에 잠입하기가 어려워졌다는 뜻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곳곳에서 차원의 관리자들이 순찰을 돌고 경계를 서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고 해요.”
남궁혜는 여기저기서 얻어온 정보를 동하에게 자세히 말해 주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아직 정보가 부족했다. 만물상점의 경계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고 차원의 관리자들 외에 다른 보안 장치는 없는지 좀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했다.
결국 만물상점에 들어가는 건 필드가 시작되기 바로 전날을 디데이로 잡았다.
그렇게 시간은 또 다시 흘러갔다.
드디어 필드가 시작되기 하루 전날이 성큼 다가왔다.
그때까지도 전혀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던 포인트 관련 문제에 대해 갑자기 어떤 묘안이 떠오르며 급물살을 타고 진행이 되었다. 만물상점 안에 음양신과와 관련된 아이템을 훔치지 않고도 무사히 빼내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성공 확률은 반반이었다. 운이 좋으면 성공할 것이고, 재수가 없으면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음양신과가 만물상점 내에 있어야 한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만물상점의 경계와 보안 문제도 며칠 동안 정보를 최대한 끌어 모은 덕분에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동하는 조그만 변화도 잊지 않고 체크해 두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서야 동하는 현실에서의 주변도 정리하기 시작했다.
최근에 와서 미셜 화장품 주가에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미셜 화장품이 드디어 이미지 광고에서 벗어나 대대적인 자사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으로 전략을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미셜 화장품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호기심이 극대화된 것은 확실했다. 그 여파는 고스란히 주가로 이어져 신저가를 계속 써내려가던 미셜 화장품의 주식이 조금씩 반등하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동하는 당분간 주식에는 일체 관심을 두지 않았다.
동하는 혹시라도 자신에게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간단하게 유서 한통을 써서 책상 서랍 안에 넣어 두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일이지만, 왠지 모르게 숙연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학교에 가서 수강신청을 했다.
이제 여름방학도 끝나고 신학기를 앞둔 학생들이 한창 수강신청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동안 동하는 수련이다 뭐다 하면서 늦게 수강신청을 하려고 하니 이미 인기 강의는 인원이 차거나 수강신청이 끝난 상태였다.
“2학기 강의는 내내 수면시간이 되겠군.”
시간표가 엉망이었다.
전공과목은 거의 없고, 대부분 교양과목이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강의는 비인기 강의라 신청한 학생도 별로 없었다.
솔직히 정정기간이 따로 있긴 하지만, 동하가 한가하게 그것만 붙들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 까짓것.
동하는 열심히 공부할 것도 아니어서 별로 애석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동하에겐 학교 수업은 딱히 의미가 없었다.
그저 군대를 가지 않고 멸망을 대비하기 위한 시간을 벌어다 주는 것이 전부였다.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유서를 쓰고 한편으로는 수강신청을 한다는 것이 개그 프로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이것이 동하의 솔직한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