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만물상점 재오픈-03 -->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끝냅시다.”
“예, 부장님.”
김선일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마케팅 직원들은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들어서 오늘처럼 평온하게 회의를 해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본부장의 자리가 수정에게 돌아가고 난 이후부터 김선일은 평정심을 잃었다.
권력에서 밀려난 패자의 말로는 생각보다 비참한 법이었다. 그렇게 위상이 높던 마케팅 부서가 한순간에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무튼 그때부터 기획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김선일은 직원들에게 폭언에 욕설을 퍼붓는가 하면, 심지어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대놓고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김선일은 수정을 이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그 모든 스트레스를 부하직원들에게 풀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차라리 그때가 괜찮은 편이었다.
수정이 주도해 발표한 M뱅크가 시장에서 대성공을 거둔 지금은 하루하루가 지옥이 따로 없었다. 김선일의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어서 마케팅부 직원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오늘은 웬 일이래.”
“그러게 말입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건가?”
“과장님도 모르세요?”
“내가 저 인간 속을 어떻게 알아?”
죽지 못해 산다는 말처럼 지금 마케팅 부서의 직원들의 상황이 딱 그랬다.
대머리 안 과장을 필두로 나머지 직원들이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 나갔다.
혹시라도 김선일의 마음이 바뀌어 언제 또 다시 회의실로 돌아올까 두려웠던 것이다.
한편, 김선일은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서기 무섭게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오늘 그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다. 입에서는 콧노래도 흘러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아까 회의에 들어가기 직전에 수정이 광고를 촬영하던 세트장에 불이 났다는 보고를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쯤이면 뭔가 연락이 올 때가 되었다.
그랬다.
창고에 불이 나기 시작한 건 합선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빨리 창고가 불길에 휩싸일 리가 없다.
모든 건 김선일이 주도 하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예전에도 수정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공정거래위원회에 수정의 실수를 신고했을 정도로 야비한 구석이 많았다.
이번만 해도 그랬다.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한 일이었고, 내부에서 은밀하게 협조한 사람이 있어서 들킬 염려는 없었다.
운이 좋으면 수정은 불에 타서 죽게 될 것이었다.
그게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이기도 했다.
하지만, 수정이 죽지 않는다 해도 인명 피해가 발생하면 그것으로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M뱅크로 한껏 올라간 분위기는 이번 세트장 화재 사건으로 한동안 구설수에 오르내릴 것이 뻔했다. 아마 사람이 많이 죽으면 죽을수록 파장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정은 물론이고 다온텔레콤, 심지어는 한 회장까지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따르릉!
기다리던 전화가 걸려왔다.
“어떻게 됐어?”
-죄송합니다, 부장님. 계획이 실패했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아까만 해도 성공했다고 했잖아?”
-세트장에 불이 나서 창고가 완전히 전소된 것은 사실입니다. 한데, 별다른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본부장은?”
-본부장님께서도 무사하십니다.
“이익?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냐?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했잖아?”
-죄송합니다. 저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멍청한 놈. 당장 철수해.”
-알겠습니다, 부장님.
“입단속은 확실히 했겠지?”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돈을 받은 게 있으니 쉽게 떠벌리지는 못할 겁니다.
딸깍!
전화를 끊고 김선일은 화를 이기지 못하고 핸드폰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으아악!”
☆ ☆ ☆
동하가 남궁세가에 왔을 때는 주위가 어두워졌을 때였다.
지구와 무림 종족의 시간은 거의 비슷했다. 만일 지구의 시간이 저녁이라면 무림 종족의 시간은 한두 시간 정도 더 빨랐다.
동하는 주변의 이목 때문에 주로 밤에 찾아왔지만, 오늘은 화재사고를 수습하느라 더 늦어버렸다.
동하는 수정을 집에 데려다 준 후 곧바로 남궁세가로 넘어왔다.
사실 동하가 늦은 밤에 찾아오는 건, 밤 시간이 곤륜노자에게 수련을 받기 더 편하기 때문이었다.
동하가 일전에 곤륜노자 등을 구하면서 차원의 관리자들을 죽인 것 때문에 무림 종족은 한동안 시끄러웠다. 다행히 무림 종족 내에서는 5명이나 되는 차원의 관리자들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가 없다고 판단한 샤이언 종족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긴 했지만, 이전에 비해 경계가 한층 강화된 상태였다.
“어서 오세요, 공자님. 오늘은 늦으시기에 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
남궁혜는 막 수련을 끝낸 것인지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덕분에 그녀의 굴곡진 몸매가 평소보다 더 육감적으로 보였고, 풍만한 가슴이 유난히 도드라졌다.
“험험!”
어지간한 동하도 얼굴을 붉혔다.
그제야 남궁혜는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도망치듯 건물로 사라졌다.
“으악! 난 몰라.”
남궁혜가 몸을 씻은 후 옷을 갈아입고 다시 동하에게 나온 건 그로부터 30분이 지나서였다. 처음에는 그냥 옷만 갈아입고 나오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맨얼굴로 동하를 보면 안 될 것 같아서 간단하게 화장을 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길어진 것이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홍조를 띠고 있었지만, 이미 동하에게 알몸을 한두 번 보여준 것도 아니어서 이제는 그렇게까지 창피하진 않았다.
“미안합니다. 이렇게까지 늦은 시간에 수련을 하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어서요.”
말 그대로였다.
남궁혜는 요즘 밥 먹는 시간을 빼고는 오직 수련에 매진했다.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서 최소한의 수면만 취했다.
일전에 동하 덕분에 포인트 대박을 맞고 모든 포인트를 공력에 투자했던 남궁혜였다.
내공이 비약적으로 높아지고 남궁세가의 무공을 칠팔십 퍼센트 이상 터득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갈 길이 멀었다. 무림 종족 내에서는 이제 손에 꼽는 고수가 되었을지 몰라도 아직 차원의 관리자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남궁혜의 목표는 일단 남궁세가의 무공을 완벽하게 깨우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승의 경지는 깨달음이 없이는 올라설 수 없는 법.
아무리 공력이 높아져도 깨달음이 부족한 남궁혜로서는 최근에 와서 정체 현상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옆에서 곤륜노자가 가르침을 주고 있긴 했지만, 깨달음이라는 게 조석 간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다들 공자님을 기다리고 계세요.”
“혹시 혜 씨에게도 카운트다운 신호가 왔습니까?”
“예.”
남궁혜가 긴장한 표정으로 손목을 보여 주었다.
동하는 스마트폰에 베타테스트 어플이 깔려 있었지만, 남궁혜는 손목에 칩이 심어져 있었다. 그녀의 손목에 빨간 색으로 7이란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앞으로 3일 뒤에 만물상점이 다시 열린대요.”
“그게 정말입니까?”
“친구들 말에 따르면 오늘 카운트다운 신호가 떠서 혹시나 싶어 만물상점에 접속을 했더니 그렇게 적혀 있었대요.”
“흐음.”
동하는 필드가 열리기 전까지는 만물상점에 가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다.
포인트가 없어서 만물상점에 가 봐야 그림의 떡이었다. 더구나 자신을 찾아내기 위해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남궁혜는 만물상점이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긴 했다.
그녀는 동하와는 달리 포인트도 어느 정도 남아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그녀 역시 개장 첫날부터 만물상점에 가기에는 위험부담이 컸다. 일단 친구들에게 정보를 얻은 후 별다른 위험이 없다고 판단이 되면 필드가 열리기 전에 다녀와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 외에 별다른 정보는 없습니까?”
“차원의 관리자들에 관한 정보가 있어요.”
“혹시 우리에 대한 단서를 찾았다는 겁니까?”
“그건 아니에요. 결정체와 관련이 있어요.”
“결정체?”
동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결정체는 괴수들의 심장에 이식해 괴수들의 능력을 업그레이드 하는 것이라 딱히 차원의 관리자들과 관련이 있을 게 없었다.
“공자님, 결정체를 사람에게도 이식할 수도 있나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번에 만든 결정체는 등급이 낮은 거래요. 아마 공자님이 가지고 있는 생명의 씨앗 때문에 높은 등급의 결정체를 만들어 내지 못한 모양이에요.”
“흐음.”
동하가 쓴 웃음을 지었다.
일부러 알고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샤이언 종족의 대업을 망친 건 확실했다.
그때 남궁혜가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원래는 괴수들에게만 사용하려던 것을 무슨 이유 때문인지 차원의 관리자들에게도 실험할 거라는 소문이 있어요.”
“예에?”
동하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왜 진작 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동하는 차원의 관리자와 괴수들만 생각했을 뿐 차원의 관리자의 심장에 결정체를 이식해서 넣는 방법은 한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실험은 성공할 것이다.
인류 역시 괴수들의 결정체로 인해 능력을 각성하기 때문이었다.
동하에겐 당연한 일이지만, 샤이언 종족에게는 엄청난 생각의 전환일 것이었다.
괴수들에게나 사용하는 결정체를 인간에게도 사용할 생각을 했다는 건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일 터였다.
과연 이전 생애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지 의문이었다.
어쩌면 동하 때문에 위기의식을 느낀 샤이언 종족과 차원의 관리자들이 능력을 높이기 위해 모험을 무릅쓰고 결정한 일일수도 있었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이전 생애에서는 차원의 관리자들을 위협할 만한 상대가 없었다.
그러니 굳이 능력을 높이려고 고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것 역시 나비효과였다.
동하 때문에 그가 알고 있던 미래가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지금만 해도 차원의 관리자들은 충분히 강하다.
한데, 여기에 결정체까지 성공적으로 이식된다면 그들은 또 다른 수준의 괴수가 되는 것이다.
‘어쩌면 괴수들보다 더 무섭고 강력한 존재가 될 수도 있겠구나!’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금만 해도 차원의 관리자들을 상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한데, 여기서 그들의 능력이 더 강해진다면 그때는 지금 동하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는다.
“혜 씨, 방금 1등급 결정체가 만들어졌다고 했습니까?”
“정보에 따르면 그렇긴 한데, 확실한 건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온 정보를 종합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동하의 비장한 표정에 남궁혜도 덩달아 철렁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왠지 동하의 표정을 보면 결정체가 괴수들에게만 통하는 것이 아니라 차원의 관리자들에게도 인식이 될 것 같았다.
“아닙니다. 분명 1등급 결정체일 겁니다.”
동하는 속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1등급이라면 아마 1성급 몬스터를 말하는 것일 터였다.
그건 곧 차원의 관리자들의 능력에 1성급 몬스터의 능력이 결합된다는 것을 뜻한다.
‘설마…… 복합 능력을 갖게 되는 걸까?’
그렇다면 정말 최악이다.
이전 생애에서 인류의 능력자들에겐 오직 한 가지 능력밖에 각성이 되지 않았지만, 차원의 관리자들이라면 다를 수도 있었다. 샤이언 종족이 결정체로 괴수들의 능력을 강화하려는 것이 결국엔 복합 능력 때문이 아니던가?
‘으음. 상황이 생각보다 더 복잡해지는구나.’
과연 1성급 결정체를 이식한 차원의 관리자들의 힘이 얼마나 강해질지는 몰라도 결코 상대하기 쉽지 않을 터였다.
하물며 몬스터의 힘이 비약적으로 강해지는 3성급 결정체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동하의 얼굴이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무조건 막아야만 한다. 3성급 결정체부터는 무조건 만들지 못하게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떠올랐다.
“어르신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 ☆ ☆
곤륜노자와 타오와 야이, 그리고 왕세기와 제갈소연은 평소에는 남궁혜의 인벤토리에 숨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샤이언 종족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들키지 않고 무사히 살아남아 있었던 이유였다.
하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달 가까이 좁은 인벤토리에 갇혀 지내려다 보니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다.
특히, 타오와 야이는 야수의 심장을 지닌 사내들이었다.
드넓은 초원을 내달리고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아온 그들에겐 이런 고역이 따로 없었다.
곤륜노자는 면벽수련을 한다는 생각으로 명상에 잠겼고, 왕세기와 제갈소연은 운기행공을 하며 지루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타오와 야이만 죽을 맛이었다.
그나마 동하가 왔을 때 잠깐 밖으로 나가 바깥 공기를 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 이마저도 없었다면 지금쯤 미쳐도 곱게 미치지는 않았을 터였다.
“헤헤. 주군 오셨습니까?”
“끙! 그 주군이란 말은 안 할 수 없소?”
“한번 주군은 영원한 주군입니다.”
“저희는 이미 주군께 맹세를 했기 때문에 죽음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말입니다.”
“아니, 나는 그런 맹세를 한 적이 없다니까요.”
“헤헤. 그거야 인벤토리 안에서 하루에도 저희끼리 하는 맹세죠.”
“오늘도 주군을 기다리다 어찌나 지루하던지 몇 십 번은 맹세를 한 것 같습니다.”
“어이구.”
타오와 야이 모두 생긴 것은 사나운 맹수처럼 보이지만, 성격은 우직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들은 한 번 자신들이 내뱉은 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키는 성격이었다. 물론 그것 때문에 동하는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자네 왔는가?”
곤륜노자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인벤토리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옆에는 왕세기와 제갈소연이 나란히 뒤따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계십니까?”
동하의 말에 곤륜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곤륜노자의 안색이 진지하게 변해 있었다.
“드디어 힘의 원천이나 생명의 근원과 관련된 물건이 무엇인지 알아냈네.”
“그게 정말입니까?”
동하의 표정이 밝아졌다.
야수 종족의 생명의 씨앗을 가로챈데 이어 무림 종족의 물건까지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샤이언 종족이 상위등급의 결정체를 만들지 못하게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르신, 그게 어디에 있습니까?”
동하는 설령 수천 킬로미터가 떨어져 있어도 달려갈 기세였다.
“그, 그게…….”
곤륜노자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