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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 만물상점-83화 (83/167)

<-- 83화 : 유일무이-06 -->

쇄애액!

수정은 경황이 없는 와중에 문득 자신의 머리위로 무언가 떨어지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아앗!”

수정은 그것이 조명이라는 것을 깨닫고 비명을 질렀다.

수정의 얼굴은 겁에 질려 하얗게 변했다.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온몸이 마비가 된 듯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수정은 이대로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수정의 머리위로 떨어지던 조명이 난데없이 방향을 살짝 틀어 수정의 옆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동하가 염력을 펼쳐 조명을 밀어냈던 것이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수정을 구하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면 누구라도 의심을 할 게 뻔했다.

“피하지 않고 뭐해요?”

동하가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 당겼다.

콰쾅!

조명이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수정 씨, 괜찮아요?”

“예? 예.”

수정이 이빨을 덜덜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동하의 품속에서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갔다.

그제야 그녀는 방금 전 상황을 떠올렸다.

아까도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세상 천지에 곧장 떨어지던 조명이 갑자기 방향을 틀고 옆으로 떨어진 게 어디 말이나 될 법한 일이던가.

“동하 씨도 방금 봤어요?”

“뭘요?”

“조명이 갑자기 방향을 틀더니 제 옆으로 떨어졌어요.”

동하는 시치미를 뚝 뗐다.

“글쎄요. 수정 씨가 뭔가 착각한 거 아니에요?”

“진짜에요.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요.”

“후후. 농담하는 걸 보니 이제 안심해도 되겠네요.”

“진짜 농담이 아닌데.”

수정은 뭔가 억울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계속 동하에게 따져 물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무너진 세트 벽에 깔려 신음을 흘리는 사람들, 조명과 부딪쳐 피를 흘리는 사람들, 의식을 잃고 쓰러진 사람, 합선이 일어나 여기저기서 치솟는 불길.

창고는 지금 아수라장으로 변한 상태였다.

여기저기서 절규와 살려달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도, 동하 씨. 어떡해 해요?”

수정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동하를 쳐다보았다.

“으음.”

동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결코 낯설지 않은 모습들이었다.

바로 수정의 머릿속에서 흘러들어온 상념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교통사고가 아니었어?’

동하는 뭔가에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교통사고만 생각하고 그쪽으로 포커스를 맞춰왔던 터라 지금의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동하의 추측에는 모순된 부분이 많았다.

교통사고가 났는데 건물이 불에 타는 장면이 보인 건 앞뒤가 안 맞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포커스를 잘못 맞춘 것이었다.

당연히 건물이 불타는 상황에 의문을 가졌어야 했는데, 아직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완전하지 못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정도 사고면 정말 대형 참사였다.

그렇다면 동하가 아무리 이전 생애에서 뉴스를 보지 않고 시사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해도 한 번쯤은 의심했어야 했다.

하지만, 몇 번이나 이전 생애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뉴스는 없었다.

그렇다는 건 이전 생애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사고일 가능성이 높았다.

사실 광고라는 것도 동하가 수정에게 M뱅크 기획을 알려 주었기 때문에 촬영하게 된 것 아닌가?

물론 동하 때문에 생겨난 사고는 아니었다.

하지만, 동하가 알고 있던 미래가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 ☆ ☆

부상을 당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가벼운 찰과상을 입은 사람도 있었지만, 의식을 잃을 정도로 부상이 심한 사람들도 있었다.

더구나 치솟는 불길에 당황해서 우왕좌왕한 나머지 아직까지 세트에 깔린 사람들조차 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연출팀이 준비한 소품에 불이 옮겨 붙으면서 불은 생각보다 더욱 빠르게 번졌다. 벽을 타고 번지던 불길은 어느새 지붕을 뒤덮기 시작했다.

감독의 다급한 목소리가 창고에 울려 퍼졌다.

“스텝들은 방송장비 챙기지 않고 뭐해?”

“시간이 부족합니다. 모두 가지고 나갈 수는 없습니다, 감독님.”

“제길, 그렇다면 비싼 것 위주로 챙기면 되잖아?”

“알겠습니다.”

스텝들이 가장 먼저 챙긴 것은 카메라였다.

“감독님, 부상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아직 세트에 깔린 사람들도 다 구하지 못했어요.”

“으음.”

그건 도미노 현상과도 같았다.

세트 벽이 하나가 무너지자 그 충격에 바닥이 크게 흔들렸고, 다른 세트들도 차례로 넘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누구도 피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그만 세트에 깔리고 말았던 것이다.

“사, 살려줘요.”

“다리가 끼어서 빠져 나갈 수가 없어.”

세트 벽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그 아래에 깔린 사람들은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세트 벽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연출팀은 지금까지 뭐하고 있었어?”

“보시다시피 사람이 부족합니다.”

“젠장.”

스텝들이 방송장비를 챙기던 것을 멈추고 부상자들부터 도와주면 문제는 간단하다.

하지만, 감독은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송장비가 모두 불타 버리면 그 손실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봐, 하 감독.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내가 나가서 119에 신고하고 올게.”

양범수는 사방에서 번져가는 불길을 보며 벌써부터 겁에 질려 있었다.

여기서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불길에 휩싸여 죽기 전에 연기에 질식해서 죽을 것 같았다.

그는 하기홍에게 적당한 핑계를 대고 출구 쪽으로 내달렸지만, 하기홍 감독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개자식.”

이런 상황에서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는 꼴이라니.

영화판에서 제법 잔뼈가 굵은 하기홍이었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그 역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양범수의 뒤를 따라 내달리는 그림자가 몇 개 더 있었다.

바로 광고 메인 모델인 남기석과 그의 매니저, 그리고 코디네이터였다.

어려운 순간이 닥치면 사람의 본성을 알 수 있는 법이다. 남기석이 출연한 드라마 한 편이 뜨고 난 이후 최근 들어 주가를 올리고는 있지만, 그의 평판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남지석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 ☆ ☆

동하는 지금까지 능력을 드러낼 수 없어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지만, 여기서 더 이상 머뭇거리면 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었다.

원래는 수정이 걱정이 되어서 따라왔고 결국 그녀의 목숨은 구했지만, 그렇다고 눈앞에 펼쳐진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여긴 위험하니까 수정 씨 먼저 밖에 나가 있어요.”

“동하 씨는 뭐하려고요?”

“사람들을 구해야죠. 아마 이대로 있다가는 인명 피해가 생각보다 커질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다온텔레콤과 다온그룹에게 돌아갈 것이 틀림없었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수정이 창고에 계속 남아 있으면 애써 그녀를 구한 것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만큼 지금 이곳은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수정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나도 동하 씨 따라 사람들을 도울래요.”

“내 걱정이라면 안 해도 됩니다. 내가 생각보다 몸이 조금 날쌘 편이거든요.”

“나 혼자 어떻게 밖에 나가요. 그러면 내 마음이 편할 줄 알아요?”

수정의 표정은 단호했다.

끙!

동하가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생각해 보면 그것도 그랬다. 양범수나 남기석처럼 자기 혼자 살겠다고 내빼면 그건 사람도 아닌 것이다.

“좋아요, 그럼, 따라와요.”

동하가 수정의 손을 잡아끌었다.

“대신 절대 내 곁에서 떨어지면 안 됩니다.”

“알았어요.”

수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하의 곁에 바싹 붙었다.

동하는 세트 벽을 혼자서 번쩍 들어 올렸다.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동하에게는 이쑤시개만큼이나 가벼운 것이었지만, 정상적이라면 어른 두세 명이 달라붙어야 간신히 들 수 있는 무게였다.

동하는 겨우 들고 있는 것처럼 온몸에 힘을 주었고, 얼굴은 일부러 시뻘겋게 달아오른 척 만들었다.

“헉헉! 빠져나올 수 있습니까?”

“다, 다리에 감각이 없어요.”

“으으, 나는 팔이 부러진 것 같아요.”

동하가 수정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수정 씨가 도와줘야 할 것 같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수정이 재빨리 다가가 사람들의 옷이나 손을 잡고 끄집어냈다.

하지만, 여자인 그녀가 그녀보다 더 덩치가 큰 남자를 끄집어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에 보다 못한 연출팀 몇 명이 다가왔다.

“우리가 돕겠습니다.”

그들은 늦게 나선 것이 미안한 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무튼, 그들이 나서자 순식간에 사람들을 끄집어 낼 수 있었다.

“그나저나 보기보다 힘이 좋으시네요.”

“세트를 혼자서 드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헉헉! 힘은 개뿔. 억지로 들고 있는 거 안 보입니까?”

동하는 손에 힘이 빠진 척 들고 있던 세트를 놓았다.

쿵!

세트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하나도 숨이 차지 않았지만, 그렇게 연기하는 게 더 힘이 들었다.

그리고 괴물 보듯 동하를 쳐다보던 연출팀의 사람들도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

작은 불꽃 하나가 주위를 밝힌다고 했던가?

동하의 행동이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한 것 같았다.

장비를 챙기던 스텝들은 물론이고 연출팀, 그리고 심지어는 하기홍까지 합심해서 세트에 깔린 사람들을 구해냈다.

“장비보다 사람들부터 먼저 데리고 나가.”

“알겠습니다, 감독님.”

하지만, 기뻐하는 것도 잠시.

펑!

뜨거운 불길에 창고의 창문이 깨지며 유리가 사방으로 튀었다.

불길에 녹아내린 천장이 떨어져 내렸다.

창고는 거대한 화마에 휩싸였고, 빠져나갈 곳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 어떡해?”

“우리 갇힌 거 같아.”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울부짖었다.

“도, 동하 씨.”

겁에 질리기는 수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동하의 손을 잡았다. 그런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동하는 힘을 주고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동하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묘하게 사람을 안심시켜 주는 웃음이라 수정의 마음도 조금은 진정이 되었다.

☆ ☆ ☆

평범한 척 연기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놈의 불길 같은 건 능력을 발휘하면 동하 혼자서도 꺼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그럴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동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뜨거운 불길을 뚫고 창고를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없었다.

“일단 출구부터 만들어야 할 것 같아요.”

“그거야 그렇지만…… 무슨 방법이 있나요?”

그러는 사이에도 불길은 더욱 거세어지고 있었다.

동하가 수정을 번쩍 안았다.

수정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어서 그녀의 미끈한 다리가 동하의 눈에 들어왔다.

“어멋!”

“떨어지지 않게 꼭 잡아요.”

“뭐, 뭐라고요?”

“이제 갑니다.”

동하가 가볍게 몸을 날렸다.

순간 동하의 몸이 와이어 액션을 펼치던 남기석처럼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으악!”

수정이 깜짝 놀라 동하의 목에 두 팔을 두르고 꼭 끌어안았다.

덕분에 동하의 얼굴이 뭉클거리며 수정의 가슴에 파묻혔다. 수정의 몸에서 기분 좋은 향기가 흘러 나왔다.

“흠흠! 이런 식으로 고마움의 표시를 할 필요는 없는데…….”

“아앗!”

수정도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얼굴을 붉힌 채 동하의 품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동하가 새처럼 하늘을 날고 있는 모습에 수정은 금방이라도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꺄악!”

수정이 비명을 지르며 아까보다 더욱 힘을 주어 동하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동하의 몸에 와이어를 매단 것도 아닌데 어떻게 새처럼 하늘을 날고 있는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동하의 얼굴이 또 다시 수정의 가슴에 파묻혔지만, 어느새 동하는 바닥에 내려선 직후였다.

문득 벽 쪽에서 뜨거운 열기가 확 뿜어져 나왔다. 천장에서는 녹아버린 건물 잔해가 불길을 머금은 채 떨어져 내렸다.

“아악!”

깜짝 놀라 수정은 두 눈을 감고 말았다.

동하는 가볍게 건물 잔해를 피하고는 발에 살짝 힘을 주어 벽을 걷어찼다.

펑!

벽에 부서지고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하지만, 바로 그때 불길이 덮쳐 왔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온몸이 불타올라야 정상이었다.

하나 동하는 한서불침의 몸이었다. 용암처럼 가공할 열기가 아니고서는 그 어떤 것도 동하를 어쩌지 못했다.

치직!

겨우 옷자락이 살짝 불에 탔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동하가 가볍게 입김을 불어 꺼버렸다.

하지만, 수정은 그렇지 못했다.

동하는 수정에게만 따로 실드를 걸어 불이 그녀를 덮치지 못하게 만들어 주었다.

다행히 그런 인간 같지 않은 동하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동하가 경공을 펼치며 하늘을 날 때부터 은둔술로 자신의 몸을 숨겼기 때문이었다.

그때 수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하를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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