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유일무이-05 -->
“이상하네.”
동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군가의 기억을 읽은 건 확실했다.
그렇다면 매직 카메라의 능력으로 머릿속에 밀려오는 상념을 사진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인식이 되지 않았다.
수정이 아니라면 한기문의 기억일 것이었다.
하지만, 수정과는 통화만 나누었을 뿐이고, 한기문의 바로 옆에 있었지만 신체적인 접촉은 없었으니 둘 다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불과 며칠 전에만 해도 신체적인 접촉이 있어야 상대의 기억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능력이 진화한 걸까?”
그렇다면 말이 달라진다.
지금은 동하의 능력이 어떤 식으로 진화를 하고 증폭이 되는지 동하 자신도 예측하기 어려웠다.
“아!”
동하의 입에서 갑자기 탄성이 터졌다.
어쩌면 방금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온 기억들이 과거와 관련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던 것이다.
“설마…… 미래의 일?”
동하가 예측 안경의 능력을 활용해 물건을 복사할 수 있는 건 동하의 머릿속에 이전 생애의 지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도 엄밀하게 말하면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은 아닌 것이다.
하나 능력이 증폭되면서 이런 제한도 사라졌거나 대폭 줄어든 것이 틀림없었다.
이쯤 되면 천기누설에 가까운 일이었다.
동하는 즉시 예측 안경의 능력을 일으켰다.
촤르륵!
순간 머릿속에 밀려왔던 상념들이 서서히 모여드는가 싶더니 형상을 갖추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역시 미래와 관련된 기억이 맞았다.
동하의 능력이 또 한 번 진화를 거듭한 것이다.
이제 단순히 동하가 이전 생애의 기억을 더듬어야만 예측 안경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사물이나 장소, 그리고 사람이 순식간에 확 바뀌게 되면 굳이 신체 접촉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동하의 머릿속으로 정보가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게 뭐지?”
동하가 예측 안경의 능력을 이용해 만들어 낸 기억들은 무척이나 추상적이어서 무슨 상황인지 명확하게 확인하기 어려웠다.
절규와 외침.
동하가 복원한 기억들은 아비규환의 모습이었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시신들, 불에 타오르는 건물들, 그리고 피를 흘리며 살려달라고 절규하는 사람들까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을 예측한 것이어서 아직은 능력에 제한이 걸려 있는 것 같았다.
동하는 수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동하 씨가 웬일로 먼저 전화를 다 했어요?
수정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동하가 먼저 그녀에게 전화를 한 적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저녁에 약속이 있더라고요.”
-이힝. 그럼 오늘 못 만나는 건가요?
“그래서 전화 했어요. 차라리 지금 보면 어때요?”
-나야 좋지만 동하 씨, 오늘 개강이라 학교 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하핫! 개강 날 땡땡이 한번 해보려고요. 지금 어디예요?”
-광고 촬영 현장에 가고 있어요.
촤르륵!
순간 다시 한 번 상념이 밀려들어왔다.
‘역시 수정 씨 기억이었구나!’
동하는 재빨리 예측 안경의 능력으로 상념을 영상으로 바꾸었다.
방금 전에 보았던 장면들도 있었지만, 새로운 장면도 있었다. 무엇보다 자동차가 폭발해서 불이 솟구쳐 오르는 장면에 주목했다.
‘설마……. 교통사고?’
맙소사.
수정이 광고촬영 현장으로 가고 있지 않은가?
“지금 당장 차 세우고 거기에 가만히 있어요.”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지금 수정 씨 있는 곳으로 갈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요.”
-동하 씨, 나 지금 올림픽대로예요. 잠실대교를 막 지나는 중인데 이곳 도로 사정 알잖아요. 차를 오래 세워둘 수는 없어요.
수정이 자세한 위치를 말해주자 동하가 어느새 공간이동을 해서 올림픽대로로 넘어왔다.
출근 시간이 지나서 차가 그리 많지 않았고, 동하 역시도 공간이동을 많이 해 봐서 사고를 내지 않고 적절히 끼어드는 스킬이 생겼다.
“어? 나도 잠실대교 지나는 중인데.”
-정말요?
“혹시 은색 BMW?
-마, 맞아요.
빵빵!
바로 뒤에서 클랙슨이 울렸다.
수정이 백미러를 쳐다보자 방금까지만 해도 없었던 동하의 람보르기니가 그녀의 차를 뒤따라오고 있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우와. 이런 우연이……. 지금 내가 수정 씨 뒤에서 따라가고 있는 거 보이죠?”
-동하 씨, 나 방금 소름 돋았어요.
동하가 너스레를 떨자 수정은 감쪽같이 속았다.
벼락을 맞은 몸으로 로또 1등에 당첨이 될 확률이 지금처럼 통화 중에 우연히 만날 확률보다 높을 것 같았다.
☆ ☆ ☆
부아아앙!
람보르기니가 영동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리고 있었다.
“광고 촬영이 강원도 원주에서 진행되고 있다고요?”
“M뱅크의 효과를 더 극대화하기 위해 광고 로케이션을 한적한 시골로 선택했거든요.”
수정의 자신의 BMW를 공영주차장에 맡겨 두고 동하의 차로 움직였다.
동하는 서울에서 촬영을 하는 줄 알고 있다가 강원도 원주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처음부터 수정의 안전을 생각해서 자청한 일이었다.
강원도가 아니라 제주도라 해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하긴, 지금으로써는 무작정 수정의 옆을 따라다니는 것이 최선이었다.
예측 안경의 능력으로 미래를 읽는 건 한계가 있었다. 사고가 벌어지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자세한 시간이나 장소를 알 수는 없었다.
원주로 내려가는 길은 순탄했다.
사고가 발생할 것 같은 기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설령 사고가 난다 해도 무엇이 걱정인가?
지금 동하와 수정이 타고 있는 람보르기니는 만능 자동차였고, 동하가 차체를 괴수의 사체로 강화했기 때문에 방탄 자동차보다 더 튼튼하면 튼튼했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아마 교통사고가 일어나도 람보르기니는 범퍼에 흠집조차 나지 않을 것이었다.
“드라마처럼 내용이 이어지는 광고라고요?”
“호호. 3부작 시리즈로 제작하고 있어요.”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3부작 시리즈가 나올 게 있어요?”
“노노. 여기엔 엄청난 반전이 있답니다.”
수정은 이번 광고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수많은 기획안 중에서 그녀가 직접 고른 것이 바로 이번 3부작 시리즈 형식의 광고였기 때문이었다.
수정의 말에 따르면 이번 광고는 첩보물처럼 블록버스터 급으로 제작되고 있었다.
이맘때에는 광고에도 드라마처럼 스토리가 이어지는 시리즈물 광고가 유행하고 있었는데, 어느 측면에서는 그런 것이 일반 광고보다 더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1부는 시골 분교에서 은퇴한 요원이 평범한 선생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담고, 2부는 과거에 악연을 가진 정체불명의 자들과 전투를, 그리고 대망의 3부에서는 적들의 신분이 밝혀지는 내용이었다.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스토리에 임팩트가 있었다.
동하도 수정에게 스토리를 한 번 들은 것만으로도 호기심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그 정체불명의 적들이 누구인데요?”
“호호. 그건 나중에 광고를 통해 확인하세요.”
수정은 쉽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동안 동하에게 어찌나 놀림을 당했는지 내내 복수를 벼르던 수정이었다.
드디어 그 설움을 갚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 이렇게 쉽게 가르쳐 줄 수 없었다.
하지만, 동하는 피식 웃었다.
“쯧쯧, 수정 씨가 말을 안 해줘도 결론을 대충 알 것 같은데.”
“피이. 누가 모를 줄 알고? 그런 식으로 일부러 나 떠보려는 거죠?”
“후후. 결론은 요원이 몸담고 있던 조직의 상관이 배신했다……. 뭐, 그런 거 아닌가요?”
“으악! 말도 안 돼. 어떻게 그걸…….”
수정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동하를 놀릴 수 있는 기회가 너무도 쉽게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에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동하는 수정과 웃고 떠들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수정은 조만간 자신에게 마수가 닥치는지도 모르고 마음이 크게 들떠 있었다.
그녀는 동하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건 마치 커플 여행을 떠나는 연인들 같아서 마음이 설렜던 것이다.
☆ ☆ ☆
광고는 여러 집합체의 하모니라고 할 수 있다.
먼저 광고주가 광고대행사에 의뢰를 하면 광고의 기획 방향에 따라 콘티를 만들고, 광고주에게 프리젠테이션을 한다. 여기서 광고주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면 그때부터 광고를 만들어줄 프로덕션을 선정하게 되는 것이다.
광고주, 광고기획사, 프로덕션의 삼박자가 맞지 않으면 광고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번 광고의 광고주 측 디렉터는 수정이었다.
그녀는 대행사에서 만든 테마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자신의 마음에 들 때까지 수정 및 보완을 요구했다.
기존의 천편일률적인 뻔한 광고와는 다른, 뭔가 신선하면서도 주목성이 강한 차별화된 광고를 제작하고 싶은 수정이었다.
M뱅크가 통신과 금융 분야에서 가히 혁명을 일으켰듯 광고 역시 기존에는 없던 영상을 만들어 내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첩보액션물을 표방한 3부작 시리즈였다.
수정은 이번 광고에 심혈을 기울였다. 남자 배우는 최근에 충무로에서 가장 핫한 배우 중 한 명이었고, 감독도 영화계에서 거물급 인사를 초빙해서 최대한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만들려고 노력했다.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는 게 한 가지 흠이긴 했지만, 기존의 광고와 확실히 차별이 되었고 완성도도 무척 뛰어난 편이었다.
“본부장님 오셨습니까?”
“어머. 양 실장님도 나와 계셨네요.”
“헛헛! 본부장님께 드리는 것인데 한 치의 소홀함도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양범수는 상아기획의 실세였다.
대한민국 광고의 절반 정도를 상아기획에서 맡고 있었고, 모 그룹의 계열사이기도 해서 방송가 쪽에서 양범수의 영향력은 절대적인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수정의 깐깐하고 꼼꼼한 성격에 학을 떼었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주로 직원들을 보내는 현장에 광고촬영이 시작된 순간부터 양범수 본인이 나와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까.
내심 수정의 미모에 호감이 들었었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수정이 요즘 남자들 사이에서 여신이라 추앙을 받고 있는지는 몰라도 같이 일하기에는 무척 피곤한 스타일이었다.
“양 실장님, 인사하세요. 여기는 최동하 씨라고 다온그룹과 중요한 파트너 관계를 맺고 계신 분이에요.”
수정이 동하를 소개시켜 주었다.
“상아기획의 양범수 실장이라 합니다.”
“최동하입니다.”
양범수가 손을 내밀어 동하에게 악수를 청하면서도 속으로는 적잖이 놀랐다.
이제 겨우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동하가 다온그룹과 무슨 파트너 관계가 될 수 있는지 의아했다. 아무리 막나가는 재벌 2, 3세라도 적어도 학교는 졸업을 해야 실무를 담당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동하를 소개하는 수정의 말투나 표정이 자신을 대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상냥했던 것이다.
‘최동하라…….’
왠지 앞으로 자주 만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양 실장님. 지금이 3부작 중 두 번째 시리즈인가요?”
“맞습니다, 본부장님. 순서를 바꾸어서 저녁에 촬영이 가능한 두 번째 시리즈부터 찍고 있습니다.”
“촬영은 얼마나 진행이 되었나요?”
“창고 신은 모두 3컷인데, 지금 3번째 컷을 찍고 있습니다. 이번 컷만 촬영하면 두 번째 시리즈는 간이역에서 기차를 타는 컷만 더 찍으면 됩니다.”
그것이 이번 M뱅크 광고의 핵심이었다.
달리는 기차에서 메인 광고 모델이 누군가와 접선을 한 후 거래를 한다. 그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M뱅크였다.
“다들 고생이 많네요.”
어젯밤부터 시작된 촬영은 날이 밝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모든 연기자와 제작진들의 눈에 피곤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시리즈 중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위험천만한 장면을 찍어야하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는 없다.
첩보액션물을 표방하다 보니 스케일이 일반 광고와는 차원이 달랐다.
조폭 복장의 엑스트라들이 동원이 되어 대규모 전투신이 벌어졌다.
장소는 낡은 창고 안이었다. 설정 상 납치를 당한 아내를 구하기 위해 주인공이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드는 장면이었다.
위험한 액션 신이었다.
동작 하나, 자세 하나만이라도 틀어지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당연히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주인공과 스턴트맨들은 몇 번의 합을 맞춰야 했다.
동하가 보기에는 여전히 어설프기 짝이 없었지만, 무술감독이 몇 번이고 자세를 교정해줄 정도로 난이도가 있는 장면이었다.
“레디~ 액션!”
감독의 외침에 창고에서 1대 10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스탭이 와이어를 잡아당기자 주인공의 몸이 날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시작된 화려한 발차기와 몸놀림.
수정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광고 촬영 현장은 그녀도 처음 구경하는 것이라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 역의 사람은 요즘 한창 뜨고 있는 남기석이란 배우예요. 태권도와 검도 유단자라고 하더니 와이어 액션이 굉장히 매끄럽고 좋네요.”
“그렇군요.”
“동하 씨, 고맙죠?”
“뭐가요?”
“이런 구경을 어디 가서 또 할 수 있겠어요?”
데이트 코스로 광고 촬영 현장만큼 특이하면서도 괜찮은 곳도 없어 보였다.
“여자인 나도 입을 다물기 어려운데 하물며 남자인 동하 씨는 오죽하겠어요?”
“풉!”
동하는 참지 못하고 뿜었다.
이거야말로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쓴 격이었다.
만약 동하가 와이어를 달지 않고 날아다니면 수정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만 해도 재밌을 것 같았다.
“아니, 이번엔 왜 웃어요?”
“그, 그냥요.”
“혼자만 웃지 말고 나도 같이 웃어요.”
수정이 새침한 표정으로 동하를 흘겨보는 순간이었다.
퍽!
“아악!”
조폭 복장의 단역 배우 한 명이 남기석이 휘두른 각목에 머리를 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단역 배우의 머리에서 피가 철철 흘러 내렸다.
예기치 못한 사고였다. 특히나 남기석이 마지막 순간에 힘을 거두지 못하고 내려친 것이 결정적이었다.
“뭐야?”
“피가 나잖아?”
“이봐요, 괜찮아요?”
스텝들이 깜짝 놀라 쓰러진 단역 배우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그 중에 퉁퉁한 스텝 한 명이 너무 서둘러 달려온다고 그만 바닥에 어지럽게 깔려 있던 전선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우당탕!
퉁퉁한 스텝의 발에 걸린 전선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쭉 딸려갔고, 그만 여기저기 조명을 건드리고 지나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조명이 쓰러지고 세트로 만든 벽이 사람들을 덮쳤다.
“어억?”
“위, 위험해.”
쇄애애액!
천장에 고정시켜 두었던 조명까지도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내렸다.
한데, 하필이면 바로 수정의 머리 위에서 조명이 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