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유일무이-02 -->
멤버십 카드와 M뱅크는 가히 혁신적인 아이디어였다.
특히, M뱅크는 대한민국의 통신과 금융의 트렌드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오죽하면 업계 1위였던 대한전자와 새경텔레콤이 고전을 하고 있을 정도이겠는가?
한데, 새로운 아이디어가 M뱅크 못지않은 파급력을 지니고 있단다.
서용훈 사장은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더구나 젊은 층을 공략할 수 있는 아이디어라는 소리에 서용훈 사장은 벌써부터 흥분감이 몰려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시장에서 그만한 파급력을 지닌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 탐이 나는지도 몰랐다.
대한민국 안에서나 1등이지 글로벌 기업 순위 100위 안에 들지 못하는 것이 대한그룹의 현실이었다.
지금은 글로벌 시대였다.
대한민국 안에서 아무리 많이 팔아봐야 실적에 한계가 있었다.
동하의 새로운 아이디어가 M뱅크 만큼의 파급력만 지니고 있다면 대한그룹은 어쩌면 평생 숙원이었던 글로벌 기업 순위 100위 안에 들어가는 것도 결코 불가능한 일만도 아닐 터였다.
“이보게, 최 군. 혹시 그 아이디어라는 것이 무엇인지 들어볼 수 있겠나?”
“그, 그건…….”
“으음. 영업 비밀이란 건가?”
“죄송합니다.”
“그렇다면 그 아이디어를 우리에게 팔게.”
“예에?”
“다온텔레콤 측에서 얼마를 주기로 했는지 모르지만, 우린 무조건 다온텔레콤보다 다섯 배를 더 주겠네.”
가히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동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이게 웬걸?
동하는 여전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게…….”
“혹시 다섯 배가 적어서 그런가?”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단지 다온텔레콤과 이미 약속이 된 일이라 이제 와서 마음을 바꿀 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구두 계약도 엄연히 계약이었다.
돈 때문에 말을 바꾸고 눈앞의 이익만 쫓는다면 결국 이전 생애에서처럼 개망나니 최동하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자네 정말…….”
서용훈 사장은 여간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다섯 배를 일언지하에 거절할 줄은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 ☆ ☆
동하가 몸값을 높이기 위해 일부러 흥정을 하려는 게 절대 아니었다.
그렇다고 갑질을 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하나 동하가 그러면 그럴수록 서용훈 사장의 마음은 애가 닳고 속이 타들어갔다.
하긴, 전적으로 칼자루를 동하가 쥐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동하가 대놓고 ‘갑질’을 한다고 해도 서용훈 사장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눈치를 보고 전전긍긍해도 부족할 판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인 대한전자의 수장에겐 눈치를 보고 마음을 졸이는 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지만, 황당하게도 상황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동하의 결정 하나에 대한그룹과 다온그룹의 운명이 뒤바뀔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혹시라도 다온텔레콤에서 다음 아이디어로 또 다시 대박을 터뜨리면 그 타격이 고스란히 대한전자로 전해지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 그것만큼 두려운 것도 없었다.
“자네도 대한그룹과 다온그룹이 어떤 사이인지는 잘 알고 있겠지?”
“아, 예.”
동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용훈 사장이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자네의 아이디어가 다온그룹에 넘어가면 대한전자가 어려워지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 아닌가.”
“그 정도입니까?”
“M뱅크의 파급력에 버금가는 것이라면 확실할 거네.”
이번에만 해도 대한전자의 단말기 점유율이 하락해서 서용훈 사장은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하물며 다온텔레콤이 3연타석 홈런을 터뜨리면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었다. 어쩌면 대한전자는 지금보다도 더 단말기 판매량이 떨어지고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었다. 만에 하나 다온전자에게 판매량이 역전이라도 당하는 날엔 서용훈 사장의 리더십에 의문이 생기는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게 뻔했다.
대한그룹은 지금 왕자의 난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사방에서 서용훈 사장의 자리를 호시탐탐 위협하는 세력들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실적이 떨어지는 것만큼 공격하기 좋은 먹잇감도 없었다.
“으음.”
그 부분은 동하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서용훈 사장이 단순히 유경의 아버지라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동하는 앞으로 서용훈 사장과 손을 잡고 몬스터들의 침공을 대비해 무기도 만들고 멸망 대비 프로젝트를 준비해 나갈 생각이었다.
한데, 만약 서용훈 사장이 대한전자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면 동하의 계획은 완전히 틀어지게 된다.
‘그건 결코 바라는 일이 아닌데…….’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정체를 속 시원히 밝히고 멸망 대비 프로젝트를 같이 준비해 나가는 것이었다. 그건 핸드폰 사업과는 전혀 별개의 일이라 다온텔레콤과 겹칠 우려도 없었다.
하지만, 그러자면 앞으로 몬스터가 침공을 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인류가 멸망을 하게 되고, 동하가 죽어서 회귀한 것까지 모두 말을 해야 하는데, 그건 아직 시기상조라 생각하고 있었다.
‘흐음. 어쩌면 지금이 적당한 시기인 것 같기도 하고.’
이제 벙커를 만드는 일도 막 시작을 했으니 다른 멸망 대비 프로젝트도 서서히 시작할 단계이긴 했다.
동하가 생각에 잠기자 서용훈 사장은 돈 때문에 갈등하는 줄 알고 좀 더 배팅 금액을 올렸다.
“아무래도 다섯 배로는 적은 모양이군. 그럼, 얼마를 원하나? 일곱 배도 적다고 할 것 같고……. 열 배는 어떻겠나?”
“예?”
이쯤 되면 동하도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원래 동하는 다음 아이디어를 100억 원 정도에 넘길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이게 얼만가?
대한전자에서 열 배를 주겠다고 했으니 1,000억 원인 셈이었다.
이때만큼은 동하도 살짝 갈등이 일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끙! 저를 그렇게까지 높게 평가해 주시는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지만, 돈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한 일이로군.”
“예에?”
“자고로 돈은 귀신도 부릴 수 있다고 했네. 더구나 자네는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돈 밖에 모르며 살지 않았나?”
인간 말종에다가 개망나니 소리까지 들으며 살아왔던 동하였다.
돈이 없는 사람은 무시하기 일쑤였고, 사고를 치면 무조건 돈으로만 해결하려 했었다.
한데, 동하는 불과 몇 달 만에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한 것이다.
서용훈 사장은 그것이 못내 이상하게 생각되던 참이었다.
아무리 봐도 눈앞의 동하와 몇 달 전의 동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공통점은 눈을 씻고 찾아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어디 한군데 뛰어난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능력이 출중하거나 엄청난 잠재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동하는 멍청하고 한심한 인간에 가까웠다.
‘한데, 다섯 배의 제안도 단칼에 거절할 정도로 사람이 의연하게 변했단 말이지.’
만약 지금 동하의 모습에서 예전 개망나니 같은 모습이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서용훈 사장은 유경이 동하와 만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동하의 배경이 별 볼일 없어도 능력이 출중하고 사람 됨됨이가 바르고 착실해서 모른 척 묵인해 주었을 뿐이었다.
사람의 본성이 이렇게 쉽게 변하는 것이었던가?
이건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아무리 집안이 쫄딱 망해서 철이 들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변할 수는 없다. 하물며 전에 없던 능력과 재능이 갑자기 생긴다는 건 그 어떤 말로도 설명이 부족한 일이었다.
‘그렇군. 이때에는 관상을 볼 줄 안다는 이야기도 전혀 없었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동하를 보고 있노라면 모든 게 수수께끼 같단 느낌마저 들었다.
서용훈 사장이 동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자네는 누군가?”
“예? 갑자기 그게 무슨…….”
“자네는 왠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네.”
동하는 마음이 찔렸다.
서용훈 사장이 사람 보는 눈은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로 놀라웠다. 역시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을 이끄는 수장다운 안목이었다.
하지만, 동하는 딱 잡아떼었다.
“하핫! 사장님께서 농담도 잘 하시네요.”
“자네는 이게 농담처럼 들리나?”
“그렇다고 제가 무슨 신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천사나 귀신이 이렇게 생겼을 리도 없고요.”
“흐음.”
그건 그렇긴 하다.
서용훈 사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부분에서는 그 역시 딱히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동하는 일단 딱 잡아떼긴 했지만,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하지?’
사실 지금 상황은 동하가 자신이 회귀를 하고 미래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만 말하면 모든 게 해결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되면 멸망 대비 프로젝트도 곧바로 시작할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과연 지금 동하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 서용훈 사장이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아직은 여기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저에게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십시오.”
“그게 무슨 소린가?”
“저 역시 대한전자나 사장님이 잘못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조금은 위안이 되는군.”
서용훈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왠지 동하의 말에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건가?’
☆ ☆ ☆
다음 날.
동하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가장 먼저 수정에게 이야기를 하고 다온텔레콤의 주식을 처분했다.
한꺼번에 많은 양의 매도물량이 쏟아지다 보니 한때 다온텔레콤의 주가가 떨어지긴 했지만, 오후가 되면서부터 다시 상승곡선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수수료를 떼고도 동하의 손에 떨어진 돈은 투자원금의 2배가 넘는 220억 원 정도였다.
이때만큼은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이 부럽지 않았다.
동하는 불과 보름 만에 120억 원을 번 것이다.
여기서 다시 미셜 화장품에 투자를 할 생각이라 220억 원이 얼마나 더 뻥튀기가 되어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수정은 주식을 좀 더 가지고 있지 왜 벌써 파느냐고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동하는 미셜 화장품에 투자하기 위해서란 말은 하지 못하고 이 정도 수익을 낸 것으로 만족한다는 말로 애써 수정을 달래주었다.
“그나저나 다음 아이디어는 언제 알려줄 거예요?”
“알려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수정 씨도 단단히 준비해야 할 걸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후후. 수정 씨와 약속한 것 때문에 1,000억 원을 뿌리쳤다면 믿을래요?”
“예에?”
1,000억 원이란 말에 수정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다른 곳에서 동하의 정보를 입수한 모양이었다.
다온텔레콤 측에서 그렇게 보안을 지켰는데, 어떻게 정보가 밖으로 새어 나갔는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동하 씨, 오늘 시간 되세요?”
수정은 당장 만나고 싶었지만, 동하는 오늘 할 일이 있어서 다음으로 약속을 미루었다.
하나 동하의 그 한 마디에 다온텔레콤은 물론이고 다온그룹이 발칵 뒤집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편, 발칵 뒤집어진 것은 다온그룹 뿐만이 아니었다.
증권사 지점에서 동하를 VIP로 특별 관리를 하고 있었다.
수수료를 대폭 할인해 주는 건 물론이고 각종 편의를 제공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동하는 앞으로 이곳에서 더 이상 주식을 거래하는 일은 없을 터라 가볍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무려 220억 원을 거래하는 초우량 고객이었다.
지점장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동하의 마음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좋아, 그럼 이제 가볼까?”
동하는 만능 자동차를 타고 서울로 공간이동을 해서 날아갔다.
부아아앙!
벤틀리 한 대가 매일증권 서초동 지점에 들어선 것은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차 문이 열리고 안에서 동하가 내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동하에게 쏠렸다. 동하는 오늘 따라 정장을 입고 한껏 멋을 낸 상태였다.
☆ ☆ ☆
“어? 이, 이 여자는…….”
한기문은 신문에 난 수정의 사진을 보고 외마디 비명을 질러야 했다.
다온텔레콤의 본부장인 동시에 이번 M뱅크의 주역.
그리고 다온그룹의 손녀딸.
그것이 신문지면을 가득 채운 수정의 프로필이었다.
당연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며칠이 지난 일이었지만, 아직도 수정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만큼 수정의 얼굴이 아름답기도 했지만, 워낙 그날 동하에게 당한 충격이 컸던지라 솔직히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았다.
“서, 설마…… 최동하가 이런 여자와 사귀고 있던 거라고?”
그의 눈에서 질투심이 폭발했다.
그 개망나니 최동하가 잘나가는 것이 그렇게 배가 아플 수가 없었다.
에이, 아니겠지.
분명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하긴, 다온그룹이 어떤 집안인데.
아무리 동하가 청년재벌이니 뭐니 해도 다온그룹의 눈에는 가당치도 않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다온그룹에서 두 사람 사이를 허락할 리 없었다. 한기문은 조만간 동하가 다온그룹으로부터 철저하게 무시와 모욕을 당하고 수정과 헤어진다는 것에 백만표를 걸 수도 있었다.
“크크. 꼴좋다.”
한기문이 통쾌하게 웃어젖힐 때였다.
“형, 혼자서 뭘 그리 웃어?”
“어? 도, 동하야?”
한기문은 도둑질 하다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재빨리 신문을 접어 수정의 사진이 나온 부분을 숨겼지만, 인간의 경지를 이미 뛰어넘은 동하의 이목을 속일 수는 없었다.
‘쯧쯧, 찌질한 성격 하고는.’
심보가 이리 고약하니 친구들에게도 절교를 당하지.
하지만, 동하는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형, 잘 지냈지?”
“그, 그럼. 한데,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한기문은 예전에 동하에게 명함을 건네주고 자신이 일하는 서초동 지점에 놀러 오라고 하긴 했지만, 정말 동하가 찾아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겸사겸사. 미셜 화장품 주식 좀 사는 김에 형 얼굴도 보려고 왔지.”
“엥? 미셜 화장품 주식을 사겠다고?”
한기문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미셜 화장품은 발표하는 제품마다 폭망 수준이라 주가도 연일 신저가를 갈아치우고 있는 중이었다.
주가가 낮다고 무턱대로 들어섰다가는 깡통 차기 십상이다. 지금 분위기만 보면 미셜 화장품은 언제 상장폐지가 되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분위기였다. 때문에 증권사에서는 고객들에게 미셜 화장품 주식을 권하지 않는다.
“왜? 뭐가 잘못 됐어?”
“아, 아니야.”
한기문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얼마를 투자할지는 모르지만, 분명 엄청난 손실을 볼 게 뻔했다.
그렇다고 동하 본인이 하겠다는데 권장할 필요도 없지만, 자신이 굳이 나서서 위험 요소를 말해 줄 이유도 없었다.
“얼마를 투자할 건데. 내가 도와줄까?”
제발 1, 2억 원 정도 투자를 해서 쫄딱 망해라.
그게 한기문의 솔직한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