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진화-02 -->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 벌어진 사고였다.
동하는 그제야 유경이 그렇게까지 당황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당시에는 10대 중과실이라 해서 횡단보도 내에서 발생한 사고는 운전자 과실과는 별개로 무조건 형사 처벌 대상이었다.
그래서였다.
혹시라도 기자들이 알게 되면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될 가능성이 높았고, 자칫 그룹이 직격탄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것이 바로 유경이 법무팀을 부르지 않고 동하에게 가장 먼저 연락한 이유였다. 법무팀에서 나오면 유경이 대한그룹 손녀라는 것을 광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대한그룹은 지금 ‘왕자의 난’으로 알려진, 권력 다툼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시기에 유경으로 인해 그룹의 이미지가 나빠지게 되면 결국 그 모든 책임이 그녀의 부모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유경 씨, 괜찮아요?”
“동하 씨.”
동하가 사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유경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다가 동하를 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직 경찰이 출동한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고 구급차의 모습도 보이지는 않는다.
대신 차에 치인 듯한 사람이 꽤 다친 모습을 하고 혜주와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이봐요, 그쪽이 갑자기 차로 뛰어들었잖아요?”
“아니, 이 여자가 지금 무슨 헛소리야? 횡단보도에서 사람이 있는 것도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내달린 것은 그쪽이잖아?”
사내가 흥분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이거 안 보여? 팔이 부러졌다고. 다리에도 새파랗게 멍이 들었고.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으면 먼저 죄송하다고 사과부터 해야지, 좋은 차 타고 다니면 다야?”
“그쪽은 사이드 미러에 살짝 부딪쳤을 뿐인데 어떻게 팔이 부러질 수가 있죠?”
혜주는 억울하다 못해 분통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분명 그녀들의 차로 뛰어든 것도 사내였고, 살짝 부딪친 것도 사실이었다.
운전을 한 사람은 유경이었다.
그녀는 사내를 피하기 위해 우측으로 핸들을 꺾었고, 인도에 심어져 있던 나무를 들이 받았다. 나무가 꺾이고 차 범퍼가 크게 부서지는 큰 사고였지만, 다행히 에어백 때문에 유경과 혜주는 크게 다친 곳이 없었다.
하지만, 사내는 팔이 부러지고 다리에 멍이 들다 보니 지켜보던 사람들도 사내의 편이 되어 혜주와 유경을 힐난했다.
“젊은 여자들이 너무하네.”
“딱 봐도 부잣집 딸내미들 같은데 이래서 대한민국 부자들은 안 된다니까.
“사고를 냈으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지. 어디서 잘했다고 큰 소리를 쳐?”
“그냥 경찰에 신고해요. 우리들이 증인이 되어 줄 테니까 저런 것들은 합의도 보지 말고 그냥 감옥에 보내요”
이쯤 되면 혜주도 덜컥 겁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억울한 생각이 들었지만, 주변 사람들까지 힐난을 하며 그녀들을 몰아붙일 줄은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유경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사고가 나자마자 먼저 경찰에 연락하거나 사내를 병원에 데려가 치료 후 합의를 보거나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전적으로 자신들의 책임이 되는 것 같아서 시시비비를 가린다고 했던 것이 오히려 사건이 더 크게 커진 것 같았다.
이러다가 혹시 기자들에게 알려지면 유경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여론이 더 안 좋게 변할 게 뻔했다.
‘차라리 그냥 합의를 할 걸.’
그녀는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다.
“동하 씨. 어떻게 하죠?”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고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봐요.”
동하가 유경을 진정시켜 준다고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아 주었다.
블랙박스가 있었다면 어떻게 된 일인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겠지만, 이 당시에는 블랙박스는커녕 내비게이션도 없을 때였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유경의 기억이 그녀의 손을 타고 동하의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어?”
예상치 못한 일에 동하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지금 유경이 그랬다.
그녀는 동하가 난데없이 비명을 터뜨리자 괜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왜요?”
“아! 미안해요. 별일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동하는 빙그레 웃어 보이고는 정신을 집중해 그녀의 기억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매직 카메라의 능력이 진화해서 생겨난 현상 같았다. 매직 카메라의 능력은 과거의 추억을 되살리는 것이었고, 그것이 환골탈태로 동하의 몸에 흡수가 되면서 상대의 머릿속의 기억을 읽어내는 것으로 진화한 것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유경이 떠올리는 것들은 모두 아까 사고가 날 때의 정황들이었고, 그것과 관련된 기억들이 한편의 영화처럼 파노라마가 되어 동하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재현되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능력의 진화는 상상을 초월했다.
처음에는 동하도 유경이 운전을 잘못해서 사람을 친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경의 머릿속에서 흘러들어온 기억에 따르면 전혀 그런 게 아니었다.
“대충 알겠네요.”
“예? 저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유경 씨는 저 앞에 있는 신호등에서 우회전하기 위해 2차선에서 3차선으로 이동했죠?”
“맞아요.”
“바로 그 직후에 저 사내가 갑자기 튀어 나오는 바람에 미처 피하지 못한 것이고요.”
“끙! 인도에 사람이 있는지 몰랐어요. 나무에 가려서 안 보였던 것 같아요.”
서울 시내는 거리마다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는데, 이곳 역시 그랬던 것이다.
역시.
유경의 머릿속에서 흘러들어온 기억들은 모두 사실이었다.
매직 카메라의 능력이 이런 식으로 증폭이 되고 진화가 될 줄은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이미 만능 자동차의 복사 능력이 횟수 제한이 사라지고 진화를 거듭한 상태였다. 거기에 매직 카메라의 과거를 불러오는 능력까지 증폭이 되어서 동하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그건 아닐 걸요?”
“뭐가 말이에요?”
“나무에 가려서 안 보인게 아니라 일부러 숨어 있었던 겁니다.”
“도, 동하 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후후. 처음부터 일부러 차에 치이려고 작정하고 뛰어든 냄새가 나네요.”
“그러니까 저는 아무 말도 안 했거든요.”
“그거야 뭐, 굳이 들어야 알 수 있나요.”
동하가 사고를 당한 사내를 보며 차갑게 웃었다.
“저 인간……. 자해공갈단입니다.”
☆ ☆ ☆
교통사고를 위장해 돈을 뜯어내는 자해공갈단이 전국적으로 기승을 부리고 있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자해공갈단의 수법은 다양하다.
지금처럼 10대 중과실만 골라서 일을 벌이는 자들도 있지만, 음주운전자들만 골라서 고의로 사고를 낸 후에 금품을 갈취하는 자들도 있다.
사내의 팔이 부러진 것만 해도 그랬다.
팔이 부러진 인간이 말싸움을 한다고?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아마 교통사고를 내기 전에 자신의 팔을 무언가로 내려쳐서 뼈를 부러뜨린 다음 사고를 냈을 것이다.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 그랬다.
동하는 이전 생애에서 그런 뉴스를 보았던 기억이 아름아름 떠올랐다.
어떤 자는 다리를 부러뜨리는 경우도 있었는데, 상처가 심할수록 합의금을 많이 뜯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그렇게까지 무식한 방법으로 사기를 치는 놈들도 있다는 것에 혀를 내둘렀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자해공갈단은 결코 혼자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주변 사람들 중에서 바람잡이들이 있다는 뜻이로군.’
대충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아마 증인이 되어 주겠다고 소리쳤던 자들일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바람을 잡으면 당시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한 사람들은 당연히 유경이 운전을 잘못 해놓고 오히려 억지를 부린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정말 저 사람이 자해공갈단이란 말이에요?”
“백퍼센트 확실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믿고 동하가 확신을 하는지 몰랐지만, 유경은 이미 동하의 능력을 한두 번 겪어본 게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하죠?”
“흐음.”
유경의 차가 저렇게 부서져서는 과연 사내가 차에 치여서 다쳤는지 아니면 막말로 자신이 자해를 해서 다쳤는지 확인이 쉽지 않았다. 그건 어디까지나 동하가 유경의 기억을 읽어서 내린 판단이니까.
“동하 씨, 차라리 법무팀에 연락을 할까요?”
“그래도 합의는 해야 할 겁니다.”
법적으로 사내가 자해공갈단이란 사실을 증명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횡단보도 교통사고는 10대 중과실에 해당하는 사건이었기에 아무래도 유경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방법은 하나 밖에 없어요. 스스로 자해공갈단이라는 소리가 나오게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그게 가능해요?”
“어쩌면요.”
“말도 안 돼.”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스스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
멘붕’이란 말이 있다.
그야말로 정신이 붕괴될 정도로 엄청난 충격에 빠지면 이성이 마비되기 마련이다. 동하는 그때를 교묘히 파고들 생각이었다.
마침 동하에겐 만병통치약과도 같은 사체의 액체가 있었다.
만약 부러진 팔이 순식간에 치료가 되고 멀쩡해진다면 어떨까?
아마 깜짝 놀라다 못해 멘탈에 붕괴가 일어나고도 남을 일이었다.
“유경 씨, 잠깐만요.”
동하는 유경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은둔술을 펼쳤다.
그의 모습이 주변과 동화가 되어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동하는 인벤토리를 열고 사체의 액체를 손바닥에 발랐다. 약효가 빨리 나타나게 하려고 평소보다 조금 많은 양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사체의 액체가 손바닥에 흡수가 되는 것이 아닌가?
그와 동시에 손바닥을 타고 청량한 기운이 동하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사체의 액체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 동하의 손이 약간 희뿌옇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주 미세한 변화여서 자세히 확인하지 않으면 구분이 가지 않았다.
“이, 이것도 능력의 진화인가?”
사체의 액체를 흡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쩌면 세 개의 아이템을 흡수한 이후로 이런 현상이 생긴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타난 능력의 진화와는 조금 달라서 동하는 잠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이 상태로도 과연 치료가 되는 것인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왠지 동하 자신에게만 치료 효과가 나타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나 동하는 이내 결정을 내렸다. 손이 희뿌옇게 변한 건 곧 동하의 손이 사체의 액체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좋아.’
동하는 천천히 사고 현장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사고를 당한 사내는 혜주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끝까지 사과를 하지 않겠단 말이지? 좋아. 병원에 가서 진단서 끊고 바로 경찰에 고소할 테니까 두고 봐라.”
동하가 피식 웃었다.
“그러지 말고 그냥 지금 경찰에 신고하지 그래?”
“넌 또 뭐야?”
“당신, 그 팔 말이야. 정말 다친 것 맞나? 아까부터 계속 이상하게 생각했었는데, 괜히 다쳤다고 거짓말 하는 거 아냐?”
“미친놈. 이렇게 부어 있는 거 안 보여? 아파서 움직이는 것도 어렵단 말이다.”
“글쎄. 쇼하는 것인지도 모르지.”
동하가 사내의 팔을 살며시 잡고 이리저리 살피는 시늉을 했다.
“아얏! 이 새끼가, 부러진 팔을 갑자기 만지면…….”
사내가 비명을 지르다 말고 놀란 눈으로 동하를 쳐다보았다.
난데없이 청량한 기운이 손끝을 타고 몸속으로 흘러들어왔던 것이다.
사내로써는 이런 생소한 느낌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더 황당한 것은 방금까지만 해도 부어 있던 부위가 싹 가라앉았고, 부러진 팔도 아프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나는 분명 팔이 부러졌었는데…….”
마치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지금 상황은 그 어떤 말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놀라기는 동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친 부위가 아니라 그냥 사내의 손을 잡은 것만으로도 사체의 액체가 흘러들어가 부러진 팔을 회복시켜 주었던 것이다. 사체의 액체를 쓴 만큼 희뿌옇던 동하의 손도 조금씩 본래의 색을 되찾아갔다.
하나 아직 사체의 액체가 남아 있는 것인지 여전히 미세하게 차이가 있었다.
‘그렇구나! 흡수한 양만큼 사용할 수 있게 된 거야.’
동하는 여러모로 진화한 자신의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동하는 입가에 비웃음을 가득 머금고 사내를 쳐다보았다.
“거 봐. 처음부터 거짓말 하는 거 같더라니. 어떻게……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끊을까?”
“너, 너 지금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이상한 기운이 몸속으로 들어온다 싶더니 부러진 팔이 멀쩡해 졌단 말이다.”
“당최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원. 내가 마법사도 아니고 그게 가능할 리 없잖아?”
“으으.”
분명 그렇긴 한데, 사내는 쉽게 분노를 가라앉힐 수 없었다.
“넌 처음부터 팔이 부러지지 않았어. 정말 멍청한 놈이군.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진단서를 허위로 발급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냐?”
“이 미친 새끼야, 내 팔이 왜 안 부러져. 내가 어제 망치로 직접 내려쳐서 팔을 부러뜨렸는데 어떻게 멀쩡할 수가……. 읍!”
끝내 이성을 상실한 사내의 입에서 해서는 안 될 말이 튀어나왔다.
애송이도 아니고 이런 실수를 할 줄이야.
자기 입으로 자신을 자해공갈단이라고 밝힌 셈이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당황한 것은 단연코 지금이 처음이었다.
하나 주워 담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여기저기서 비명과 경악어린 탄성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사내가 자해공갈단이라는 것도 모른 채 단지 주변 분위기에 휩쓸려 유경과 혜주를 오해하고 화를 낸 것 같아서 어쩔 줄 몰랐다.
유경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처음에는 동하의 계획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설마하니 정말로 사내 스스로 자신이 자해공갈단이라고 밝힐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동하는 사내를 보고 피식 웃었다.
“저기 벤츠 보이지? 차 가격만 1억이 넘는데 넌 좆된 거 같다. 저 정도로 부서졌으니 수리비만 해도 몇 천만 원이 넘을 것 같단 말이지?”
“이 새끼! 죽여 버리겠다.”
수리비를 물어내라는 동하의 말에 끝내 사내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휘익!
그의 주먹이 동하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자해공갈단에게 자동차 수리비를 내라고?’
절로 이가 갈린다. 자신을 무슨 얼간이에 핫바지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이보다 더 치욕스러운 말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