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진화-01 -->
8월도 어느덧 중순을 지나 말일을 향해 가고 있었다.
여전히 한여름의 무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지만, 입추가 지나서 그런지 저녁이 되면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길었던 여름 방학도 이제 며칠이면 끝나고, 대학교도 2학기 개강이 시작된다.
동하는 한창 땅을 사고 벙커를 지을 준비를 한다고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동하가 땅을 산 지역은 인천 외곽에 위치한 곳으로 천 평 규모로, 주변에 인가가 별로 없는 게 특히 마음에 들었다.
사실 벙커의 위치는 시내 중심가 보다는 외진 곳이 적당했다.
이전 생애의 경험에 의하면, 괴수들은 본능적으로 인간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모여들기 때문에 사람이 많은 시내 중심가는 가급적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물론 벙커 공사를 하는 걸 최대한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아무튼, 원래 계획에 비해 규모가 2배 이상 커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때는 돈 문제 때문에 최대한 규모를 작게 생각했던 것이었을 뿐이다. 벙커에서 오랜 시간 동안 생활해야 하기 때문에 규모가 커서 나쁠 건 없었다. 이 정도 규모라면 수영장은 물론이고 테니스장도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동하는 이제 돈 때문에 걱정할 일은 없었다.
일단 다온텔레콤의 주가가 2배 이상 올라서 동하의 자산가치가 백억 원에서 지금은 2백억 원으로 두 배 이상 오른 상태였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동하가 벙커를 만드는 데 필요한 예상 금액은 충분히 마련한 셈이었다.
동하 자신도 이렇게까지 빠른 시간 안에 목표 금액을 만들 수 있을 줄은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한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조만간 미셜화장품이 론칭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하는 며칠 내로 다온텔레콤의 주식을 팔고 2백억 원을 모두 미셜화장품에 투자할 생각이었다. 만약 미셜화장품 쪽에서도 동하가 생각했던 것처럼 결과가 나와 준다면 2백억 원은 다시금 4백억 원이 될 수 있었다.
더구나 동하는 앞으로도 다온텔레콤 측에 아이디어를 팔고 돈을 벌 생각이었다.
M뱅크가 50억 원이었다면 다음 아이디어는 백억 원을 부를 계획이었고, 다온텔레콤에서도 이미 두 차례나 경험이 있기에 결코 거부하진 않을 것이었다.
“벙커는 최대한 럭셔리하게 지어도 되겠어.”
한편, 동하는 설계와 시공을 맡길 건축설계사무소를 알아본다고 정신이 없었다.
아무래도 블로그나 인터넷이 그렇게까지 발달한 시기가 아니다 보니 어떤 곳이 더 능력이 뛰어나고 솜씨가 좋은 지 일일이 발품을 팔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이 되었다.
마침 유경의 선배 중 유능한 건축설계사무소 소장이 있어서 그 선배라는 사람에게 설계와 시공을 맡겼던 것이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하핫! 그건 저희가 드릴 말씀이죠. 그나저나 핵폭발에도 견딜 수 있는 구조를 원하신다고요?”
“비용은 걱정하지 마시고 최대한 안전하게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설계 도면부터 만들어야 하는데, 혹시 다른 요구사항이 있으십니까?”
유경의 선배는 최대한 동하의 의견을 수렴해서 반영할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대한민국에서 벙커를 만드는 건 처음이다 보니 전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었다.
당연히 동하가 평소 원하는 디자인이나 스타일을 알아야 설계에 반영을 하고 최대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흐음. 디자인이나 스타일이라…….”
그런 게 있긴 있었다.
동하는 이전 생애에서 벙커와 관련된 기사와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한때 부자들 사이에서 멸망에 대비해 럭셔리 벙커를 만드는 것이 유행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을 스케치해서 얼개를 잡으면 아무래도 건축설계사무소에서 보다 정확한 설계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유경의 선배가 원하는 것도 결국 그런 것이었다.
예측 안경의 능력을 활용하면 그 기억들을 더욱 구체적으로 불러올 수 있었다.
그리고 매직 카메라의 능력으로 그 기억을 사진처럼 머릿속에 저장하고 보정 작업을 거치면 실물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한다.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동하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
사진으로 현상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머릿속의 기억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으면 가장 좋겠지만, 동하는 그림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원래부터 지독한 악필에다 학창 시절 미술 성적은 항상 ‘가나다’ 중 ‘다’를 받을 정도로 그림에 재능이 없던 동하였다. 사람 하나, 심지어 간단한 자동차 하나 변변히 그릴 줄 몰랐던 동하였다.
“어?”
동하가 무의식중에 스케치북에 끄적거리며 그림을 그리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던 사진과 스케치북에 그린 그림이 완전히 똑같았다.
유경의 선배도 깜짝 놀랐다.
“와우! 그림 솜씨가 상당하네요. 이 정도 디테일이라면 오늘이라도 바로 착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그렇다면 다행이로군요.”
정작 동하도 얼떨떨했다.
미술 열등생이었던 동하에게 이런 그림 솜씨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 머릿속의 사진을 스케치북에 복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 잠깐. 복사라고?’
만능 자동차의 능력이 복사이지 않던가?
하나 그건 만능 자동차에 국한된 것이었고, 횟수에도 제한이 있었다.
왠지 만능 자동차의 능력을 흡수하면서 증폭되어 다른 사물도 복사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한마디로 능력의 진화였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만능 자동차의 사용 횟수는 다섯 번 중 네 개의 자동차를 복사했기 때문에 딱 한 번의 기회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만약 지금 이걸 복사한 것으로 친다면 남은 한 번의 사용 횟수를 다 사용해서 더 이상 자동차를 복사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젠장.”
“예에?”
“아, 아닙니다.”
어지간한 동하도 지금처럼 당혹스러운 적이 없기에 본능적으로 욕설이 나왔던 것이다.
동하는 유경의 선배와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누고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만능 자동차의 복사 횟수가 아직 남아 있는지 아니면 아까 그것으로 다 사용을 했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어떤 차를 복사할까?”
동하는 예측 안경과 매직 카메라의 능력을 일으켜 마이바흐 62S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이 모델 역시 앞으로 몇 년 뒤에 나오는 것으로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자동차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아닌가? 동하는 대형세단으로는 가장 럭셔리한 차를 선택했던 것이다.
“제발.”
동하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 만능 자동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왠지 안 될 것 같았다.
마지막 남은 횟수를 스케치로 대치한 것도 그리 나쁜 건 아니었다.
막말로 유경의 선배 말마따나 동하가 워낙 정밀하게 그려서 바로 설계 도면을 그리는 일에 착수할 수 있다고 했으니 말이다.
하나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처음에는 솔직히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한데, 동하가 만능 자동차에 손을 대자 람보르기니가 사라지고 마이바흐 62S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어?”
뭔가 이상했다.
그렇다면 아까 그 복사 능력은 뭐였지?
동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혹시나 싶어 이번에는 벤틀리를 떠올리고 마이바흐에 손을 가져대 대었다.
그냥 혹시나 싶어서였을 뿐, 뭔가 거창한 기대를 가지고 한 일은 아니었다.
한데 이게 웬걸?
눈앞의 마이바흐가 사라지고 동하가 머릿속에 떠올렸던 벤틀리로 변했던 것이다.
“회, 횟수 제한이 사라졌다.”
그제야 동하는 단순히 능력이 증폭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동하가 환골탈태를 하면서 아이템들 역시도 영향을 받은 게 틀림없었다.
능력의 진화.
그건 동하가 조금씩 9성급 S몬의 완성체로 향해 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 ☆ ☆
오랜만에 찾은 이모의 식당은 확 달라져 있었다.
낡고 지저분하던 식당이 리모델링을 끝마치고 깨끗하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이모의 식당은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사람들이 김밥 한 줄을 먹으려고 해도 기본으로 1,20분 정도를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동하가 식당을 찾아왔을 때는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손님이 많았다.
주택가 근처에 자리 잡은 식당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상대 학생들이 주를 이루었다. 특히, 돈가스김밥 등이 여자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손님들 대부분이 여대생들이었다.
“이모, 축하해요. 장사가 정말 잘 되네요.”
“호호. 고맙다, 얘. 내가 살면서 동하 네 덕을 다 보는구나!”
성미는 바빠서 정신이 없는 가운데서도 싱글벙글 입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어려운 형편에 리모델링한다는 것은 감히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새롭게 변한 가게를 보면 마냥 꿈만 같았다.
사실 김성혜 여사가 리모델링을 하라며 천만 원을 건네줄 때는 성미는 어안이 벙벙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언니, 이게 무슨 돈이야?”
“그게…… 동하가 글쎄 다온텔레콤과 계약을 했다며 8억 원이 든 통장을 주더라.”
“뭐, 뭐라고?”
성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최근 동하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성격적인 면이었다.
동하가 8억 원을 벌 수 있을 만큼 능력이 뛰어났었던가? 그럴 리가 없는데. 아니, 그 전에 다온텔레콤과 계약을 했다고?
“언니, 동하는 국문학과 아니었어? 한데, 다온텔레콤과 무슨 계약을 해?”
“다온텔레콤에서 나온 멤버십 카드를 동하가 기획을 했다고 하더라.”
“지, 진짜?”
그야말로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구제불능 개망나니 최동하가 어느 날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하더니 이제는 돈을 벌어서 엄마에게 가져다주기도 하고. 왠지 성미의 코끝이 다 찡해지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동하는 오랜만에 식당에 나온 김에 두 팔을 걷어 부치고 일을 도와주었다. 성미가 하지 말라고 했지만, 동하는 괜찮다며 음식도 나르고 식탁도 치웠다.
“많이 기다리셨죠? 여기 김밥 나왔습니다.”
“오늘도 정말 사람이 많네요. 저희 20분 기다렸어요.”
그렇게 말하는 여대생들의 얼굴에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
사실 돈가스김밥이 생각나서 찾아오긴 했는데, 더운 뙤약볕에서 기다리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좋게 보일 리 없다.
“와! 이제 보니 단골이셨네요.”
“저희 단골 아니거든요? 이제 겨우 2번째 온 거라고요.”
여전히 여대생들의 말투에 까칠함이 넘쳐흘렀다.
어지간한 사람은 머쓱해서 물러설 법도 하건만 동하는 오히려 빙그레 웃었다.
“후후. 그게 바로 중독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주, 중독?”
“끝내주게 맛이 좋다는 표현이죠.”
“피이, 그게 뭐야.”
동하의 노력이 통한 모양이었다.
비록 실소이긴 했지만, 처음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 내일도 계속 김밥 생각이 나서 안 오고는 못 견디실 걸요? 뭐, 그러다 단골이 되는 거구요. 아니다.”
“뭐가 아니에요?”
“차라리 오지 않는 게 좋겠네요.”
“그건 갑자기 왜요?”
“중독이 얼마나 무서운 건 줄은 다들 알고 있죠? 김밥에 중독되었다고 금단현상이 생기고 손발을 부들부들 떨면서 평생 살 수는 없잖아요. 무엇이든지 중독되기 전에 끊는 게 현명한 일이죠.”
“풉!”
여대생들의 입에서 빵 하고 터졌다.
어떤 손님은 김밥을 입에 넣고 먹다가 그만 뿜고 말았다.
성미는 바쁜 와중에도 멍하니 동하의 모습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언니, 동하가 원래 저렇게 유머러스한 애였나? 이건 나라도 빠져들겠다.”
“그, 그러게.”
김성혜 여사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야 원 열 달 동안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왠지 동하가 식당에서 일하면 인상대 여대생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올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3시 정도가 되어서야 식당에도 여유가 찾아왔다.
성미는 직접 커피를 탄 후 동하에게 건네주었다.
“많이 힘들었지?”
“이모도 참. 아직 한창 젊은 놈이 겨우 이거 가지고 힘들면 되나요?”
“넌 볼 때마다 신기하다 얘. 어쩜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니?”
“제가 원래 한 매력 했잖아요.”
“그건 아니다, 얘.”
성미가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동하야? 요즘 분점 문의가 계속 들어오는데 어떻게 할까?”
“그건 이모하고 어머니께서 알아서 하세요.”
“그래도 될까?”
“그거야 당연하죠. 이건 이모 식당이잖아요.”
“그래도 네가 리모델링을 하라고 천만 원이나 주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니?”
“신경 쓰지 마세요, 이모. 사실 가게를 옮겨 주고 싶었는데, 그럼 이모가 너무 부담을 가지실 것 같아서 리모델링으로 ”
집안이 쫄딱 망하고 다른 일가친척들이 모두 외면했을 때, 오로지 성미만이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도와주지 않았던가? 그것을 생각하면 솔직히 천만 원도 너무 적었다.
“에고, 네 아버지가 지금 네 모습을 보면 얼마나 좋아하겠니.”
성미는 문득 눈물을 글썽거렸다.
동하의 아버지 성진은 지금 경제사범으로 서울남부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동하는 회귀를 하고 이런저런 일로 바쁘다는 핑계로 그동안 면회를 간 적이 몇 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성진은 섭섭하게 생각하기는커녕 오히려 동하가 사고를 치지 않고 잘 지내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창 이야기를 하는 중에 유경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동하 씨, 큰일 났어요. 저, 저희가 실수로 자동차로 사람을 쳤어요.
“저희라고요?”
-혜주하고 같이 있거든요.
“많이 다친 겁니까?”
-그, 그건 아닌데, 이런 일이 처음인지라…….
“일단 침착하세요. 지금 거기가 어디입니까?
-여기가 어디냐 하면…….
유경이 장소를 말하자 동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이라면 동하도 알고 있는 곳이라 공간이동을 할 수 있었다.
“유경 씨, 금방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 그래 주실래요?
유경은 많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겁에 질린 모습이 두 눈에 그려질 정도였다.
동하는 바로 공간이동을 펼쳐서 유경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