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 눈 깔아-01 -->
남궁세가에서 200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화운진이란 마을이 있었다.
이곳은 조그만 시골 마을로 고작 백여 개의 가구가 살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무림 종족 내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다. 그건 바로 이곳에 전 무림맹주였던 곤륜노자의 거처가 있었기 때문이다.
선은장.
아담한 크기의 장원은 무림 맹주의 지위에 걸맞지 않게 소박했다.
그래서 더 무림 종족의 사람들은 곤륜노자를 존경했다.
하지만, 모든 건 다 과거의 일이었다.
한때는 하루에도 수백수천 명의 손님이 찾아와 북적거리던 선은장이었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건물들이 파괴되어 폐허로 변해 있었다. 그나마 몇 채 남아 있는 건물은 차원의 관리자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공자님, 바로 저기예요.”
남궁혜의 안내로 동하는 밤새 화운진 마을로 달려왔다.
동하는 무림 종족의 지리를 알지 못했다. 또한 곳곳에 검문소도 있었다.
아마 남궁혜의 도움이 없었다면 무림 종족 내에서 가장 유명한 선은장을 찾아오기도 어려웠을 터였다.
동하는 화운진까지 오는 중간 중간 무림 종족의 지리와 풍경을 머릿속에 입력했다.
일종의 자신만의 내비게이션을 만들어 놓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한 번 머릿속에 입력된 곳은 언제든지 공간이동을 펼쳐 다음부터는 쉽게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하의 뒤로 왕세기와 제갈소연, 그리고 야수 종족의 두 사내가 뒤따르고 있었다.
원래 동하는 그들이 따라오겠다는 것을 말렸었다. 아직 성치도 않은 몸으로 괜히 따라 나섰다가 정작 중요한 순간에 짐이 될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야수 종족의 사내들은 목에 칼이 들어오는 일이 있어도 동하 혼자 위험한 곳에 가게 할 수 없었다.
“정 혼자 가시겠다면 차라리 저희를 밟고 가십시오.”
만약 동하가 그 말을 무시하고 그냥 혼자 가면 혀를 깨물고 자결이라도 할 기세였다.
상처가 완전히 치료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들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동하를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였다.
혼자 보다는 여럿이 함께 가는 게 더 안전한 법이다.
타오와 야이.
이것이 두 사내의 이름이었다.
이때만큼은 동하도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모두 자신을 걱정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어째 충직한 수하를 얻은 게 아니라 고집불통 시누이가 생겨난 기분이었다.
동하가 타오와 야이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왕세기와 제갈소연도 결국 따라 나섰던 것이다. 그들은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타오와 야이에게 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마침 동쪽 하늘에서 서서히 먼동이 떠오르고 있었다.
어둠에 잠겨 있던 선은장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원래 계획은 밤이 될 때까지 인근 숲속에서 숨어 있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선은장 안에 들어가 곤륜노자를 만날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낮에 움직이는 것보다는 어두운 밤이 활동하기에는 더 편하기 때문이었다.
하나 동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이목은 천이통이 완성이 되어서 수백 미터 떨어진 선은장 안의 소리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차원의 관리자들이 선은장을 사용하고 있다고 했습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요. 곤륜노자께서 그들의 시중을 들고 있고요.”
무림맹주였던 곤륜노자를 하인으로 만들어 대내외적으로 무림 종족의 웃음거리로 만들려는 수작이었다.
고고한 인품과 유별난 자존심을 가진 곤륜노자가 그런 치욕을 견디며 살아갈 리 없었다.
하지만, 곤륜노자는 아들 내외와 손자 손녀들이 노예로 잡혀 있어서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었다. 곤륜노자가 자결이라도 하는 날엔 그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치욕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곤륜노자는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치욕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건 갑자기 왜 물어보시는 거죠?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흐음.”
동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술잔을 마주치며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면 파티라도 벌어진 것 같았다.
이미 날이 밝아오고 있는 상황이니 밤새도록 파티를 벌였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검과 검끼리 부딪치는 소리는 물론이고 처절한 비명 소리, 거기에 원색적인 신음소리까지 한데 섞여서 도대체 선은장 안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쉽사리 예측하기 어려웠다.
“아무래도 가서 알아봐야겠습니다.”
“지, 지금 말이에요?”
“그렇습니다. 왠지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요.”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가급적 문제가 될 것 같은 상황은 피하고 싶었던 동하였다.
하나 곤륜노자를 만나기도 전에 그가 죽으면 힘들게 여기까지 온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건 타오와 야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본능적인 감각만 놓고 보면 그들의 능력은 동하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신화경에 오른 동하보다 더 뛰어난 측면이 있었다.
“확실히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군요.”
“건물 안에서 기분 나쁜 냄새도 납니다.”
“여기까지 냄새를 맡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저희 야수 종족의 오감은 다른 종족에 비해 몇 십 배 이상 발달했고, 수백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도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달리 야수의 능력을 가진 종족이 아니었다.
동하는 무언가 느껴지는 것이 있어서 물었다.
“혹시 그 기분 나쁜 냄새라는 것이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거나 성욕을 증폭시켜 주는 느낌이 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한데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무림 종족은 미약이라 부르던가요? 지구에서는 그걸 마약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으로 모든 의혹의 퍼즐이 맞춰진 셈이었다.
동하의 두 눈에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지금 선은장에서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 ☆ ☆
그야말로 광란의 밤이었다.
한때 무림 종족의 성지와도 같았던 선은장에서 언어도단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차원의 관리자는 모두 다섯 명이었다. 그들은 술을 마시며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동물원의 짐승들을 구경하는 기분이었다.
대청의 한쪽에는 마약에 취한 이십여 명의 남녀가 연신 숨을 헐떡거리며 격렬하게 난교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 모두 무림 종족의 고수들이었다.
예전에는 이름만 대면 모두가 알 수 있을 만큼 명성이 대단한 자들이었지만, 지금은 무공을 잃고 노예로 전락해서 하루 종일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데 남녀의 비율이 맞지 않았다.
여자보다 남자의 숫자가 조금 더 많았다.
그렇다 보니 파트너를 찾지 못하고 성욕을 해소하지 못한 한 자와 이미 파트너와 격렬하게 난교를 벌이던 자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그 모습이 암컷 하나를 두고 싸우는 수컷들을 보는 것 같아서 차원의 관리자들은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크크. 발정 난 짐승들이 따로 없군.”
“푸하핫! 저런 한심한 것들이 정말 명성이 자자했던 고수들이었단 말인가?”
다른 한쪽에서는 젊은 청년과 거대한 사자 한 마리가 철장 속에 갇힌 채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사자는 하루를 굶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포악하고 잔인했다. 날카로운 이빨을 세우고 발톱을 휘두르며 젊은 청년을 향해 연신 공격을 가했다.
젊은 청년은 한 손에 검을 들고 있었지만, 단전이 부서지고 공력을 잃어 평범한 사람이나 다를 게 없었다.
철장은 그리 넓지 않았다.
공간이 협소하다 보니 사자의 공격을 피하는 것도 여의치 못했다.
“크아악!”
젊은 청년의 몸이 사자의 발톱에 잘려져 나갔다.
사자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득달같이 달려들어 청년의 시신을 먹어 치웠다.
잔인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차원의 관리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낄낄 웃었다.
“흐흐, 화산파의 기재라더니 초식이 별 거 아니로군.”
“쯧쯧, 좀 더 화끈한 장면은 없나? 무림의 고수라는 것들이 사자 한 마리도 당해내지 못해서야 원.”
이미 바닥에는 검붉은 피가 흥건했다.
수많은 뼈가 나뒹굴고 있는 모습은 맹수와 무림 종족 고수들 사이에 싸움이 수차례 벌어졌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는 개처럼 쇠사슬에 묶인 채 사자와 싸울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건 지옥이 따로 없었다.
현실이 이렇게 잔인하고 비참할 수 없었다.
바로 눈앞에서 동료들이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도 고통스러운 마당에 언제 자신의 차례가 돌아올지 몰라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이번에는 너!”
“예엣?”
“계집, 네가 나가서 사자와 싸우라는 뜻이다.”
“그, 그건…….”
차원의 관리자가 가리킨 사람은 아름답게 생긴 여인이었다.
여인의 몸은 사시나무 떨리듯 세차게 흔들렸다.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서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차원의 관리자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무자비한 자들이었다.
“어서 빨리 철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제, 제발…….”
“흐흐, 그렇다면 저기 난교가 벌어지는 곳으로 갈 테냐?”
“아!”
여인의 눈에 절망의 그림자가 떠올랐다.
철장에 들어가 사자와 싸우는 것도 무서웠지만, 여인인 그녀에겐 난교가 벌어지고 있는 곳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밀려오는 두려움에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결국 그녀는 난교가 벌어지는 현장을 쳐다보고는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한편, 대청의 끝자락에는 살이 찢어지고 피가 튀는 비무가 벌어지고 있었다.
마치 그 옛날 콜로세움의 검투사들처럼 누구 한 명이 죽어야 끝이 나는 싸움이었다.
비무를 벌이는 자들은 입술을 악물었다. 그들은 마약에 취하거나 정신을 잃고 광기에 사로잡힌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제정신이기에 미칠 것만 같았다. 자신이 죽지 않으려면 상대를 죽여야 하는데, 그 누가 이런 미치광이 짓에 동조하고 싶겠는가?
하나 지금 상황에서 비무를 거부 하는 건 있을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바로 마약에 취해 광기어린 난교 현장에 투입되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난교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비무를 거부했던 자들이었다.
그 결과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약에 취해 언어도단의 행동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무림 종족의 고수들은 차원의 관리자들의 잔인한 행동에 치를 떨었다.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건 도저히 생각과 지성을 가진 종족이라면 할 수 없는 짓이었다.
하지만, 무림 종족의 고수들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예전에 공력을 잃지 않았을 때에도 차원의 관리자들의 압도적인 능력에 상대가 되지 못했었는데, 하물며 공력을 잃고 폐인이 된 지금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챙!
채챙!
비무는 제법 격렬하게 이어졌다.
그들은 공력을 잃고 오로지 초식에 의지해 비무를 벌였지만, 일초 일초에 각파의 정수가 담겨 있었다.
“크아악!”
비명과 함께 치열했던 비무가 끝이 났다.
결국 죽어야 끝나는 비무답게 장대한 체격의 중년인은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절명한 상태였다.
하지만, 승리한 자의 표정 또한 좋지 않았다.
바닥에 쓰러져 죽은 사람은 바로 그와 동문수학한 사제였기 때문이었다.
“크흑!”
짐승처럼 난교 현장에 가지 않기 위해 비무를 했지만, 결국 사제를 죽이는 패악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죽는 순간 그의 사제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결코 자신 때문에 자책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그는 무서운 눈길로 단 위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시시덕거리고 있는 차원의 관리자를 노려보았다. 평생의 소원이 있다면 저 악마 같은 차원의 관리자들이 죽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차원의 관리자들은 곤륜노자에게 눈짓을 보내 시체를 치우고 또 다른 비무를 준비시켰다.
“이봐, 영감. 어서 준비하지 않고 뭐해?”
“으으.”
곤륜노자는 지금까지 온갖 치욕을 참고 견디며 차원의 관리자들의 수발을 들어왔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까마득한 후배들이 난교를 벌이는 모습을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도 부족해 이제는 시체를 처리하기까지 해야 했다. 성정이 고고하기로 유명한 곤륜노자에겐 이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도 없었다.
“이 악마 같은 놈들.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흐흐, 하늘이라……. 우리가 하늘인데 이거 어쩌지?”
“퉤! 천벌을 받을 놈들. 차라리 노부를 죽여라.”
“흥! 이 늙은이가 감히 죽으려고 환장을 했군.”
“그동안 무림맹주의 신분을 생각해 딴에는 특혜를 주었더니 감히 우리들의 명령을 거부해?”
차원의 관리자들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들의 눈에 무림 종족의 인간들은 개돼지보다 못한 자들이었다.
바퀴벌레를 죽였다고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듯 그들에겐 무림 종족의 인간들이 그런 존재였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무림 종족의 정기를 완전히 말살시켜 버릴 생각이었다.
그건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여기저기서 대항 세력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건 아직 기가 살아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였다.
이런 식으로 각 행성의 정기를 말살시켜 버리고 기를 꺾어 놓으면 다들 저항을 포기한 채 노예근성을 갖고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