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결정체-01 -->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동하는 공간이동을 할 수 있을뿐더러 이제는 차원과 차원 사이도 넘나들 수 있었다.
동하는 이것을 공간이동이 아닌, 차원이동으로 불렀다.
아무튼, 지구에서 무림 종족의 행성까지 이동하는 데 성공했으니 만물상점에서 무림 종족의 행성으로 돌아가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동하가 세 명의 차원의 관리자를 죽이는 대형 사고를 치고도 나름 여유를 가진 것도 바로 차원 이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동하의 이야기를 들은 남궁혜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바보같이 왜 진작 차원이동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동하가 남궁세가에서 만물상점에 접속해 왔다는 이야기를 들어 놓고도 그만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내 어떤 생각이 들어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엘가나를 쳐다보았다.
차원이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동하 한 사람뿐이었다. 그렇다는 건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만물상점에 남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남궁혜는 문득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녀도 동하를 따라 돌아가진 못한다.
하나 그녀는 정상적으로 접속을 했으니 전혀 문제될 것이 없지만, 엘가나를 비롯해서 왕세기와 제갈소연 등은 그렇지가 못했다.
만물상점에는 도망칠 곳도 없는데다 차원의 관리자들의 손에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더구나 세 명의 차원의 관리자들이 동하의 손에 처참한 모습으로 죽었으니, 그 배후를 알아내기 위해 엘가나 등을 잡아 갖은 고문을 할 건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다 잘못 되면 동하와 그녀의 행적이 알려질 수도 있었다.
이래저래 난감한 상황이었다.
엘가나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살아 있는 모습으로 그자들의 손에 붙잡힐 일은 없을 테니까요.”
엘가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차원의 관리자들 손에 잡혀 고문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결을 해서 후환을 없애는 쪽을 선택할 생각이었다.
하나 엘가나는 드워프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동하를 쳐다보며 말했다.
“부탁이 있어요. 대항 세력의 기지가 라오디아 행성에 있어요. 저 대신에 그곳에 가서 대항 세력들에게 도망치라고 말해줄 수 있나요?”
모르긴 몰라도 오늘이 고비일 것이었다.
만물상점에 침투했던 많은 수의 대항 세력 측의 요원들이 붙잡힌 이상 비밀 기지의 존재가 드러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라오디아 행성이라…….’
어쩌면 동하가 먼저 부탁해야 할 일인지도 몰랐다.
대항 세력과 손을 잡으면 혼자 샤이언 종족과 싸워야 한다는 부담감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뿐더러 옆에서 도와줄 수 있는 동료에 대한 걱정도 덜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라오디아 행성에 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차원이동을 하려면 그곳의 자세한 정보가 필요했다.
“혹시 사진 없습니까? 혹시 사진이 무슨 말인지 모르면 그림이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요? 아무튼, 라오디아 행성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것이라면 어느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동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았지만, 역시 엘가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꼭 있어야 하나요?”
“차원이동을 하려면 반드시 그곳의 정보가 필요합니다.
“그, 그럼……?”
엘가나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드워프의 약속을 끝내 지킬 수 없다는 사실에 엘가나의 눈에서 금방이라도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리려고 했다.
“내가 라오디아 행성에 가는 건 지금 현재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 하지만 뭐죠?”
“엘가나는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로, 로그아웃 하지 않고도 돌아갈 수 있단 말이에요?”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동하도 아직까지 확신은 하지 못했다.
자신이 차원이동을 하면 남궁세가로 돌아갈 수 있는 건 확실했다.
그건 접속이나 로그아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니 절대 영향을 받지 않을 터였다.
문제는 각자 접속한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일단 모두가 남궁세가로 돌아간 다음 그곳에서 로그아웃을 하면, 이론상으로는 각자 접속한 행성으로 되돌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핸드폰을 여기에서 켰다가 다른 곳에서 끈다고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건 노트북도 마찬가지 아닌가?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이론에 불과했고, 재수가 없으면 다시 만물상점으로 돌아올 수도 있었다.
“그럼, 저는요? 혹시 저도 돌아갈 수 있는 건가요?”
“혜 씨는 여기에 남고 싶으면 남아도 됩니다.”
“아, 아니에요. 같이 가고 싶어요. 한데, 어떻게 우리 모두를 데리고 만물상점을 벗어날 수 있다는 거죠?”
아무리 동하의 능력이 대단해도 이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차원이동을 펼치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후후! 이거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동하가 인벤토리를 꺼냈다.
“아!”
남궁혜와 엘가나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탄성을 터뜨렸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기발한 생각이었다.
그녀들도 인벤토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짐을 넣고 다니는 것만 생각했지 사람을 넣을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풉! 나도 진짜 바보 같네요. 공자님께서 자신만만하게 말할 때부터 짐작을 했어야 하는데…….”
“자, 이제 빠져나갈 준비를 하죠.”
동하는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세 구의 시신을 차를 주차시켜 놓은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가장 좋은 건 시신을 불태워 흔적을 없애는 것이지만, 그러기에는 위험부담이 있어서 차라리 남궁세가로 돌아간 후 그곳에서 처리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사실 시신에는 여러 가지 상처들이 있었다.
고수들은 상처의 흔적만 봐도 어떤 능력에 죽었는지 알아볼 수 있기 때문에 그대로 방치하고 가는 건 바보 같은 일이었다.
다음은 매직 워치 기능으로 남궁혜와 엘가나 등을 스캔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최소한 동하가 가진 아이템의 능력과 동기화가 되어서 차원이동을 하는 과정에서 최소한 거부반응은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휘이잉!
잠시 후 동하의 모습은 공간 안으로 사라졌다.
☆ ☆ ☆
만물상점이 발칵 뒤집어졌다.
실종.
그것도 대항 세력을 쫓던 차원의 관리자 세 명이 약속이나 한 듯 자취를 감추었던 것이다.
더구나 중상을 입고 쫓기던 6명의 대항 세력의 요원들 모습도 찾을 수 없어서 만물상점의 곳곳을 이 잡듯이 뒤졌지만, 끝내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대장님, 여기에 싸웠던 흔적이 있습니다.”
“흐음. 그렇군.”
카일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것으로 모든 사실이 명백해졌다.
누군가 중간에 개입해서 차원의 관리자 세 명을 죽이고 쫓기던 대항 세력의 요원들을 구해 도망간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정보가 없어서 난감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시신이라도 있다면 당시 상황을 알아낼 수 있을 텐데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원래 시신만큼 사건의 정황을 확실하게 말해주는 증거도 없다. 그건 안목이 높고 능력이 출중한 사람일수록 더욱 그랬다.
카일은 많이 바라지도 않았다. 시체에 한두 개의 상처만 있어도 그때 어떤 상황이었고, 어떤 수법을 사용했는지 그리고 적은 몇 명이었는지 원하는 정보는 모두 알아낼 수 있었다.
카일은 차원의 마스터였다.
또한 블랙울프 길드의 대장이며 샤이언 종족에서 가장 강한 고수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그는 다른 종족의 행성을 무너뜨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고, 수백 번이 넘는 싸움에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차원의 관리자들이 무서운 전사라 해도 차원의 마스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잠깐!”
카일의 머릿속에 문득 무언가 번쩍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군. 인벤토리였어.”
“예?”
“놈은 인벤토리에 세 구의 시신과 쫓기던 대항 세력의 요원들을 숨겼을 것이네.”
“아차!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카일은 즉시 수하들에게 지시해서 테스터들의 인벤토리를 모조리 조사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인벤토리 조사에 테스터들이 술렁거렸지만, 카일은 오히려 테스터들의 미세한 표정의 변화도 놓치지 않았다.
카일의 생각은 예리했다.
그의 행동은 동하가 했던 것들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하지만, 그런 카일 조차 한 가지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바로 차원이동이었다.
“대장님, 인벤토리를 모두 조사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 그럴 리가…….”
카일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번에는 틀림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 충격이 더했다.
그렇다면 결국 남은 건 하나였다. 믿기지 않은 사실이긴 하지만, 로그아웃 시스템을 뚫고 도망친 것 말고는 더 이상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로이, 자네의 염력으로 당시 상황을 볼 수 있겠나?”
“그렇지 않아도 이미 몇 차례나 시도를 했었는데, 망망대해를 보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이곳에 염력자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자네의 능력으로 뚫지 못하는 것이 없을 텐데?”
“저도 그게 신기합니다. 테스터들은 말할 것도 없고, 초능력 종족들조차 이렇게까지 염력이 강한 자는 본 적이 없습니다.”
로이는 블랙울프의 부대장이었다.
그는 돌연변이와도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로이는 샤이언 종족이면서도 태어날 때부터 염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초능력 종족의 염력과 비슷하면서도 또한 전혀 달라서 그의 몸에는 두 개의 염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 두 개의 염력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그의 염력은 100% 수준을 넘어 120% 수준에 도달한 상태였다. 그때 깨달음을 준 사람은 바로 차원의 마스터인 카일이었다.
“역시 대항 세력들의 짓인가?”
하긴 그들 밖에 이런 대담한 짓을 벌일 자들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대항 세력의 능력이 뛰어나도 어떻게 바코드에 걸리지 않고 은밀하게 만물상점에 잠입했다가 로그아웃 시스템을 무력화 시키고 밖으로 탈출할 수 있었는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자, 잠깐. 타누스 박사님이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되었나? 그것이 있어야 결정체를 만들 수 있다고 했네.”
“아! 그, 그건 모리츠가 전령으로 갔다 온 일이어서…….”
“모리츠는 지금 어디에 있나?”
“으으.”
그제야 로이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쩌면 이번 사건의 핵심은 쫓기던 자들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체와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차원이동으로 만물상점에서 남궁세가까지 가는 데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눈 깜짝 할 사이였다.
이번에는 남궁세가 건물 안으로 곧바로 되돌아 왔기 때문에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을 리 없었지만, 그래도 ‘만사불여튼튼’이라고 했다.
동하는 일단 은둔술로 자신의 몸을 숨긴 다음 공력을 끌어 올려 남궁세가 건물 곳곳을 살폈지만, 역시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다행이군.’
그제야 동하는 은둔술을 풀고 인벤토리를 꺼냈다.
남궁혜와 엘가나는 신기한 표정으로 인벤토리에서 걸어 나왔다. 인벤토리 안이 칠흑처럼 어두웠기 때문에 밖으로 나오자 쏟아지는 햇살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떠야 했다.
천천히 그녀들의 눈에 고풍스러운 남궁세가의 건물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 여긴 정말 남궁세가네요.”
“후후! 그럼 다른 곳으로 올 줄 알았습니까?”
“그냥…… 믿어지지가 않아요.”
남궁혜는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의 집에 온 것처럼 남궁세가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어려서부터 수없이 보아왔던 광경이었지만, 오늘은 정말 새롭게 느껴졌다. 로그아웃을 하지 않고도 만물상점을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엘가나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동하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동하가 테스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세 명의 차원의 관리자를 무지막지한 능력으로 때려눕힌 것은 물론 온몸에 몇 가지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그녀가 확인한 것만 해도 무공과 마법, 그리고 염력과 거인의 힘까지 네 개였다.
한데, 중요한 것은 왠지 네 개의 능력만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만물상점에 접속할 때와 비슷한 속도로 차원을 이동하는 것은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대, 대단해. 정말 로그아웃을 하지 않고 만물상점을 빠져나올 줄은 몰랐어.’
이런 사람이 겨우 무림 종족이라고?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얘기였다.
세상에 고서클 마법을 펼치는 무림 종족이 어디 있단 말인가?
“혹시 판타지 종족인가요?”
엘가나는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말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동하가 판타지 종족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건 희망사항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미 만물상점을 벗어나 무림 종족의 행성에 온 직후였다.
이곳에는 마나석이 없어서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뭐라고요?”
“아!”
엘가나가 상황을 직시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적어도 동하가 판타지 종족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에 반해 동하와 남궁혜는 서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고 있어서 왠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고마워요.”
그녀의 얼굴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기에 동하는 어렵지 않게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작별인사였다.
라오디아 행성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대충 알 것 같았다.
이곳에서 로그아웃을 하면 원래 접속을 했던 장소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동하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라오디아 행성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말한 것 같았다.
하지만 엘가나는 신중했다.
만에 하나 로그아웃을 했는데, 만물상점으로 다시 되돌아가지 말라는 법도 없기 때문이었다.
동하도 엘가나의 마음을 알고 눈짓으로 엘가나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낸 다음 자신이 먼저 스마트폰을 꺼내 로그아웃을 시도했다.
로그아웃을 했는데 별다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접속을 했던 장소가 남궁세가였고, 지금 있는 곳도 남궁세가이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정상이었다.
☆ ☆ ☆
동하는 한창 마법의 용광로에 세 명의 차원의 관리자들을 녹이고 있었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증거를 인멸하려면 이 방법 밖에 없었다. 사실 기분이 유쾌할 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흔적을 남겨 후환을 만들 필요는 없는 법 아닌가?
가장 안전한 방법은 역시 마법의 용광로에 녹이는 것 밖에 없었다. 다행히 마법의 용광로는 무엇이든 녹일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꺼번에 하기에는 마법의 용광로가 작았다.
동하는 아이난과 퉁거스를 녹인 다음 모리츠를 가장 나중에 녹이기 시작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마법의 용광로가 크게 요동을 치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