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모두 죽었어-01 -->
‘아!’
남궁혜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사람 중에 무림 종족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모두 그녀가 알고 있는 얼굴들이었다.
무당파의 천검 왕세기, 제갈세가의 제갈소연이 보였다.
그들의 무공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림 종족 내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후기지수들로 남궁혜와 함께 칠준사미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남궁혜는 평소 그들과 만물상점에서 만나면 자주 대화도 하고 정보도 교환하며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설마 그들이 대항 세력일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남궁혜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그나마 나머지 두 명은 건장한 사내들로 남궁혜조차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들의 얼굴이 온통 털로 뒤덮여 있는 것으로 보아 야수 종족의 사람들 같았다.
그때, 왕세기와 제갈소연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이, 모리츠. 장난 그만 하고 어서 끝내.”
“이러다 대장에게 늦었다고 혼나겠어.”
“젠장. 너무 쉽게 죽여도 재미가 없는데…….”
모리츠가 여흥이 가신 듯 입맛을 다셨다.
그는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 그렇게 하다 마지막 순간에 죽여 버릴 생각이었는데, 이내 생각을 고쳐먹고 천천히 드워프에게 다가갔다.
드워프는 의식이 가물가물한 상태였다.
‘으으. 모든 게 다 끝났다.’
그나마 한 가닥 남아 있던 희망마저 사라진 기분이었다.
그는 다만 1분이라도 모리츠를 막고 엘가나가 도망칠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놈은 터무니없이 강했다.
문득 엘가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엘가나의 얼굴은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드워프가 걱정이 되는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의 몸속으로 엄청난 양의 기운이 흘러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점점 꺼져가던 그의 눈빛에 갑자기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 이게 도대체…….’
정작 그 자신도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나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상처를 치료해주는 신성 계열의 기운도 아니었다.
생전 처음 느끼는 생소한 기운이었다.
하긴, 판타지 종족인 그가 내공의 기운을 알고 있을 리 없었다.
물론 그게 가능한 사람은 동하밖에 없었다.
‘격체진력’의 솜씨였다.
동하는 다른 사람들 몰래 허공을 격하고 드워프 몸속으로 공력을 흘려보내주고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하지만, 워낙 내상과 외상이 모두 지독해서 잠시 기력을 되찾아주는 것이 전부였다.
‘으음. 1시간도 버티지 못하겠군.’
그나마도 동하가 공력을 흘려보내주지 않으면 드워프는 1분도 버티지 못하고 죽고 말 것이었다.
드워프는 기적처럼 몸을 일으켰다. 격렬한 통증이 밀려 왔지만, 아까보다 한결 편하게 숨도 쉬고 움직일 수도 있었다.
그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더 이상 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오로지 엘가나를 살려서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보내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의식이 가물가물한 상태에서도 그는 모리츠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차앗!”
번쩍!
드워프가 도끼를 휘둘렀다.
“호오?”
모리츠가 의외라는 듯 짧게 탄성을 터뜨렸다.
머리가 깨져서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는데도 일어났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물며 도끼에 얼마나 위력이 담겨 있겠는가?
그는 도끼를 막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흐흐, 근성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좋아, 그렇다면 두 다리를 으스러뜨려도 일어설 수 있는지 어디 한번 감상해 볼까?”
이때까지만 해도 모리츠의 입에서 여유 있는 농담이 흘러 나왔다.
하지만, 막상 드워프의 도끼가 바람을 가르며 가까이 다가오자 안색이 살짝 변했다.
아까와는 그 기세가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다. 하나 그때는 이미 너무 늦어서 도저히 막거나 피할 수가 없었다.
퍽!
드워프의 도끼가 모리츠의 허벅지에 파고들었다.
검붉은 피가 흘러 내렸지만, 그렇게 깊숙하게 박힌 것이 아니어서 오히려 살짝 긁힌 수준에 불과했다.
위기의 순간에 모리츠가 가진 거인의 힘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드워프는 크게 아쉬워했다.
상처가 심해서 그의 몸속을 충만하게 채운 힘을 온전히 활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 그것만으로도 모리츠는 충분히 광분했다. 거인의 힘을 얻고 난 이후 살이 찢어지고 피를 흘린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으으. 이놈이 감히?”
모리츠가 커다란 수박만 한 주먹을 휘둘러 드워프의 머리를 내리 찍었다.
몸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당연히 펄쩍 뛰어 피했을 것이다. 저 주먹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살아남기 어렵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몸속에 아직까지 정체불명의 기운이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드워프가 도끼를 바싹 끌어 당겨 모리츠의 주먹을 막았다.
쾅!
힘에서는 도저히 모리츠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도끼로 막았는데도 엄청난 충격에 숨이 턱턱 막힐 정도였다.
드워프의 몸이 사정없이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만약 그의 몸에 기이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을 것이었다.
쿨럭! 쿨럭!
드워프는 연신 격렬하게 기침을 해댔다.
그의 몸에 있던 기이한 힘이 사라지는 순간 그의 생명력도 급속도로 사라져갔다.
그때 문득 동하와 눈이 딱 마주쳤다.
동하는 무심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건 마치 왜 죽을 걸 뻔히 알면서도 굳이 덤벼들었냐는 책망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드워프는 불현 듯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지금 이곳에서 그에게 무지막지한 힘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동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동하의 나이가 너무 어려서 터무니없는 생각이라 여겼지만, 저 무심한 눈빛은 결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나올 수 없었다.
‘극한을 경험한 자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테스터들 중에 저런 무서운 고수가 있었던가?
이건 테스터들 수준이 아니었다.
차원의 관리자들에 필적할 만한 능력이었다.
드워프의 눈빛이 뜨겁게 일렁거렸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끌고 동하에게 기어갔다.
그런 그의 입에서는 하염없이 피가 흘러 나왔지만, 그는 자신의 몸은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았다.
“헉헉! 자네가 했다는 걸 알고 있네.”
드워프는 힘겹게 말을 이어 나갔다.
“제, 제발 부탁하네. 엘가나만이라도 구해주면 안 되겠나? 이대로라면 우주는 전멸하고 말 거네.”
드워프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 내렸다. 말을 할 때마다 내장 부스러기가 섞여 나왔지만, 그는 동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했다.
그때였다.
모리츠가 박장대소를 했다.
“푸하핫! 어지간히 다급했던 모양이군. 하필이면 도움을 청한다는 것이 저런 쓰레기 같은 놈이란 말이냐?”
그는 동하는 안중에도 없었다.
동하의 몸에서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데다 방금 남궁혜와 입맞춤을 하는 모습은 한심 그 자체였다.
“이봐, 모리츠. 그나저나 저 두 연놈은 뭐야? 저자들도 대항 세력인가?”
“바코드로 확인을 했는데, 대항 세력은 아니야. 무림 종족이고 정상적으로 접속한 자들이더군.”
“흐흐, 그래? 심심한데 저것들이나 가지고 놀아볼까?”
동하와 남궁혜를 쳐다보며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말을 건넨 자는 야수 종족의 사내들의 머리채를 잡고 있는 자였다. 아마 드워프가 동하에게 기어가면서까지 살려달라고 부탁한 것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쯧쯧, 심심하다고 사람 죽이는 건 여전하군.”
모리츠가 가볍게 혀를 찼지만, 그렇다고 말릴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남궁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차원의 관리자들은 사람을 발톱의 때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심심하다고 사람을 죽이려고 할 줄은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피식!
동하가 차갑게 웃었다.
“개판이군.”
☆ ☆ ☆
동하는 처음부터 차원의 관리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꾹 참고 있었던 것은 남궁혜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
하나 사람이 참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 법.
사람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다니는 것부터가 동하의 감정을 자극했다. 짐짝도 저렇게 가지고 다니지는 않는다. 하물며 사람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하지만, 그때도 남궁혜를 생각해서 꾹 참았다.
한데, 심심해서 사람을 죽인다고?
이런 말을 듣고도 참고 있을 동하가 아니었다.
사람 목숨을 발톱의 때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자들에겐 인격적으로 대해줄 필요가 전혀 없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다.
“그것으로 네놈들의 운명은 정해졌다.”
“뭐, 뭐라고?”
“너희 모두 죽여주마.”
동하는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차원의 관리자들이 먼저 자신들을 죽이겠다고 했으니 이제 더 이상 남궁혜 때문에 참을 이유가 사라진 것이었다.
동하는 무서운 시선으로 모리츠를 쳐다보았다.
“네놈은 갈기갈기 찢어 죽인다.”
“으흐흐, 미친 놈.”
모리츠는 극도로 분노하다 못해 아예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동하는 이번엔 자신들을 심심해서 죽이겠다는 자를 쳐다보았다.
“특히, 네놈은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이제부터 실컷 가지고 놀다가 지루해지면 죽일 거거든.”
“크크, 그것으로 네놈의 운명은 정해졌다.”
놈이 동하의 말투를 따라 했다.
그만큼 동하의 행동이 어이가 없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장난은 여기까지다. 죽고 싶으면 지금 자결을 해라. 나중에는 죽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는 불사 종족의 능력을 이어받은 전사였다.
목이 잘리지 않는 이상은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였다.
그의 압도적인 신체 능력은 ‘사기 캐릭터’나 마찬가지였다.
상대 입장에서는 찌르고 베고 무수히 공격을 퍼부어도 좀비처럼 죽지 않고 계속 덤벼드니 당할 재간이 없었다.
수비는 일체 하지 않았다. 그의 목에는 특수하게 설계된 금속장치가 부착되어 있어서 어떤 경우에도 목이 잘려나갈 일은 없기 때문이었다.
피식!
“그 말 기억해 두지.”
쿵쿵!
가장 먼저 나선 건 모리츠였다.
그가 거대한 주먹을 허공에 휙휙 휘두르며 동하를 압박해 들어왔다.
윙윙!
허공에서 살인적인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스치기라도 하는 날엔 온몸의 뼈가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았다.
동하는 결코 피하지 않고 모리츠의 주먹을 향해 자신의 주먹을 마주쳐 갔다. 얼핏 단순하면서도 무식해 보일지 모르지만, 힘 대 힘의 싸움에서 밀리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놈이?”
모리츠는 무시를 당한 느낌마저 들었다.
거인의 힘을 지닌 자신에게 감히 정면승부로 도발해 올 줄이야.
“네놈의 팔을 짓이겨 버려주마!”
펑!
동하의 팔이 부르르 떨렸다.
그의 가슴은 거대한 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고통이 몰려왔다.
거인의 힘이 70% 수준까지 회복되었고, 공력은 300년이 넘었는데도 이런 느낌이라니…….
다시 한 번 차원의 관리자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역량을 지니고 있는지를 새삼스럽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모리츠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오히려 모리츠는 동하보다 더한 충격을 받고 뒤로 몇 걸음 밀려났다.
드워프의 도끼에도 끄떡없던 모리츠가 동하의 주먹에 자존심을 구긴 것이다.
“으으.”
모리츠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겨우 몇 걸음 차이에 불과했지만, 명백히 힘 대 힘의 승부에서 동하에게 밀렸다는 게 용납이 되지 않았다.
“방금 네놈이 사용한 능력이 무엇이냐?”
무림 종족이니 당연히 내공을 사용했겠지만, 그가 알고 있는 한 무림 종족의 무공 중에서 거인의 힘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글쎄.”
“내가 네놈을 과소평가한 모양이군.”
모리츠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전의를 가다듬었다.
확실히 동하를 우습게 보고 방심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모리츠가 손가락 관절을 꺾고 어깨를 몇 번 빙글빙글 돌렸다.
“아까와는 다를 것이다.”
쐐애액!
모리츠의 주먹에서 가공할 기운이 흘러 나왔다.
동하는 지지 않고 다시 한 번 모리츠의 주먹을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그건 모리츠가 바라던 바였다.
한데 주먹과 주먹이 마주 치려는 순간이었다.
동하의 손목이 기묘하게 꺾이는 가 싶더니 한 마리 뱀처럼 모리츠의 팔을 타고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이는 ‘출사비등’이란 수법으로 공동파의 칠상권 중 하나였다.
상대의 공격을 무력화시키고 반격을 가하는 데에는 출사비등만 한 무공이 없었다.
“헉?”
모리츠가 깜짝 놀라 피하려고 했지만, 그때는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동하의 주먹이 모리츠의 턱을 가격했다. 뼈가 으스러질 만도 하건만 모리츠는 입가에 피를 흘리는 것 말고는 멀쩡했다.
무시무시한 맷집이었다.
대신 모리츠의 얼굴이 잠깐 뒤로 홱 하고 젖혀졌다.
하지만, 동하는 그 잠깐의 시간만으로도 충분했다.
동하는 곧바로 모리츠의 목젖을 후려쳤다.
다른 신체 부위는 거인의 힘이 보호막이 되어 보호하고 있어서 크게 효과를 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목젖만큼은 제아무리 거인의 힘이 대단하다 해도 완벽하게 보호해 주지 못한다.
“크윽!”
드디어 모리츠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 나왔고, 허리가 앞으로 확 꺾였다.
어지간한 사람이었다면 목이 부러져도 몇 번은 부러졌을 상황이었다.
동하는 기다렸다는 듯 백보신권으로 모리츠의 백회혈을 후려갈겼다. 다시 한 번 모리츠의 신형이 크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동하는 모리츠의 뒤통수를 두 손으로 잡고 무릎을 직각으로 세운 다음 모리츠의 얼굴을 강하게 찍었다.
빠각!
맞아도 제대로 맞았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피가 확 튀었다.
쿵!
영원히 쓰러질 것 같지 않던 모리츠의 몸이 고목나무 쓰러지듯 바닥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근성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좋아, 그렇다면 두 다리를 으스러뜨려도 움직일 수 있는지 어디 한 번 감상해볼까?”
동하가 미친 듯이 모리츠의 다리를 짓밟았다.
불과 30초 정도 되었을까?
그야말로 눈 깜짝 할 사이에 두 다리가 형체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스러진 채 모리츠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