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대한그룹-01 -->
식사가 끝나고 디저트로 케이크와 차가 나왔다.
동하가 내일 미셜 화장품으로 찾아가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으로 하고 공적인 이야기는 모두 마무리 했다.
강혜련 여사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동하에게 물었다.
“유경이에게 들으니까 관상을 볼 줄 안다고 하던데 어때요? 실례가 안 된다면 우리도 한번 봐 줄 수 있어요?”
“그리 대단한 수준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하네요.”
대기업의 총수나 정치인들 중에는 점을 맹신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때문에 중요한 일을 앞두고는 궂을 하거나 용한 점쟁이를 찾아가 점을 보는 경우가 허다했다.
서용훈 사장과 강혜련 여사는 점쟁이를 맹신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호기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도 궁금하긴 하군. 유경이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솜씨가 어떤지 구경 좀 하고 싶은데 어디 한 번 보여주게.”
서용훈 사장까지 나서는데 동하도 더 이상 빼는 것도 어려웠다.
“그럼, 틀린 내용이 있더라도 너무 웃지는 말아 주십시오.”
동하가 알 수 있는 건 주민등록증이나 가방에 있는 내용물이 전부였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주민등록증에 나와 있는 생년월일과 주소 등만 읊어 주어도 놀라기 마련이지만, 서용훈 사장과 강혜련 여사에게는 그런 게 통할 리 없었다. 사전에 유경이 알려 주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응?’
강혜련 여사의 가방에 수첩이 있었다.
거기에는 일정이나 간단한 메모 등이 적혀 있었다.
“며칠 후에 결혼기념일이로군요.”
“아! 맞아요.”
강혜련 여사가 유경을 쳐다보았다.
혹시 유경이 가르쳐 주었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유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오히려 그녀도 신기한 생각에 동하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그날은 다시 한 번 일정을 확인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그, 그게…….”
동하가 난감한 표정으로 서용훈 사장을 쳐다보았다.
강혜련 여사가 힐끔 서용훈 사장을 쳐다보더니 이내 동하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사람은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말해요.”
“사장님께서 결혼기념일을 깜빡 하시고 골프 모임에 나가시는 것 같은데 어쩌면 제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서용훈 사장의 지갑 속에 명함이 몇 개 있었는데, 명함 뒤쪽에 날짜와 시간. 그리고 장소가 적혀 있어서 대충 한 번 찔러본 것이었다.
“당신 혹시……?”
“미, 미안하오. 경제인연합회 모임이라 도저히 빠질 수가 없어서……. 그래서 당신에게 양해를 구하고 약속을 점심 때로 옮기면 어떨지 물어볼 참이었소.”
“흥! 결혼기념일을 잊은 건 아니고요?”
“그, 그럴 리가 있겠소. 이미 유경이하고 같이 백화점에 가서 선물도 사 두었는걸.”
서용훈 사장은 은근슬쩍 유경에게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는 정말 결혼기념일을 깜빡 잊고 있었다. 아마 동하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놓치고 지나쳤을 게 뻔했다. 작년에도 결혼기념일을 잊었다가 며칠 동안 고생한 기억이 떠올랐다. 강혜련 여사는 다른 쪽에는 이해심이 넓은데 반해 유독 기념일에는 민감한 편이었다.
“맞아요, 엄마. 아빠가 올해는 엄마를 깜짝 놀라게 해주겠다고 얼마나 준비를 했는지 몰라요.”
“그래?”
강혜련 여사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서용훈 사장과 유경을 번갈아 쳐다보았지만, 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좋아요. 대신 마음에 안 들기만 해 봐요.”
‘휴!’
서용훈 사장이 속으로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와 동시에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동하를 쳐다보았다. 유경에게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믿지 않았었는데, 이건 놀라움을 넘어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관상에 아무리 재주가 능해도 그렇지 결혼기념일에 일정까지 정확히 맞힐 수가 있는 걸까?
“헛헛! 젊은 친구가 다방면에 재주가 뛰어나군 그래.”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겸손하기까지 하고. 더욱 마음에 드는군. 이제 내 관상도 좀 봐주겠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동하를 쳐다보는 순간 동하는 흠칫 놀랐다.
이제야 서용훈 사장을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이전 생애에서 서용훈 사장은 검찰 조사를 받고 나온 직후 자살했다.
워낙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다 보니 모든 뉴스와 언론에서 며칠 동안 대대적으로 보도를 했었고, 시사에 무관심하던 동하까지 알게 된 일이었다.
하긴 그럴 법도 했다.
대한민국 최고 그룹의 후계자가 자살을 했는데, 그게 어디 보통 일인가?
동하 역시 상당히 의외였던지라 십년도 더 지난 일인데도 아직까지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대충 4년쯤 후가 될 것이다.
당시에는 온갖 추측들이 난무했다.
가장 먼저 차기 정부에 밉보여서 표적수사를 당했다는 말도 있었고, 내부에서 누군가 배신을 해서 서용훈 사장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는 말도 있었다.
유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동하 씨, 갑자기 왜 그래요?”
“그, 그게 그러니까…….”
동하가 쉽게 말을 하지 못하자 이젠 강혜련 여사까지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혹시 이이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기는 건가요?”
“으음.”
자살을 한다고 얘기를 해줘야 하나?
동하는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 생애에서는 괴수들이 침공하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괴수들의 침공이 앞당겨 지기라도 하면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동하 씨!”
“이보게.”
유경의 얼굴은 겁에 질려 있었고, 서용훈 사장과 강혜련 여사의 안색은 더할 나위 없이 굳어져 있었다.
“좋습니다.”
동하는 말해주는 것으로 결심을 굳혔다.
미래가 어찌될 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미리 대비하고 있으면 충분히 방비할 수는 있을 테니 말이다.
“말씀드리기 송구하지만, 사장님께서는 앞으로 4년 뒤에 자살하시게 될 겁니다.”
“뭐, 뭐라고요?”
“자살이라니요?”
조용한 레스토랑에 외마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 테이블로 쏠렸지만, 유경이나 서용훈 사장, 그리고 강혜련 여사는 그런 것을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충격의 도가니였다.
동하의 안색이 심상치 않을 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긴 했지만, 설마 자살한다는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강혜련 여사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우리 이이는 대한민국 최고 그룹의 후계자라고요. 자살이라니. 정말 얼토당토하지 않군요.”
“믿기 어려우신 건 압니다. 사실 믿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인생이란 어찌 될지 모르는 법이니까 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대비?”
“저도 단편적으로 사장님의 운명을 본 것이라 뭐라 확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차기 정부와 불편한 관계로 인해 표적수사를 당하게 될 겁니다. 물론 내부에 배신자가 있어서 사장님을 벼랑 끝으로 내몰기도 할 테고요.”
“으음.”
서용훈 사장이 무거운 표정으로 동하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살아온 연륜이 있는데다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온 서용훈이었다. 눈빛만 봐도 대충은 그 사람의 진심을 판단할 수 있는데, 동하의 눈빛에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저 정도면 아예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는 건 적어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건 아니라는 뜻이군.’
그러고 보니 짚이는 구석이 하나 있긴 했다.
“내가 차기 정부와 불편한 관계라고 했는데, 혹시 자네는 다음 대선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는지도 알고 있나?”
“차종호. 현재 인천시장입니다.”
“그, 그렇군.”
서용훈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동하의 말처럼 정말 차종호가 다음 대선에서 대통령이 되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서용훈 사장은 차종호와는 끊을 수 없는 질긴 악연이 있었다. 만에 하나 차종호가 차기 대통령이 된다면 정말 표적수사가 들어올 가능성이 다분했다.
하지만, 그 같은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의 아내인 강혜련 여사와 서 회장 정도였다. 그렇다는 건 정말 동하가 자신의 미래를 봤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여, 여보.”
강혜련 여사도 차종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헛헛! 아직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가지고 그리 호들갑 떨 필요 있겠소?”
“그래도요.”
“쯧쯧. 설령 그 같은 일이 일어난다 해도 4년 후의 일이라지 않소? 지금부터 천천히 대비해도 늦지 않소.”
서용훈 사장은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아 있어서 강혜련 여사와 유경을 안심시켜 줘야 할 것 같았다.
“사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대통령 선거도 3년 정도 남아 있지 않습니까? 지금부터 충분히 대비할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유경 씨도요.”
“예, 동하 씨.”
동하도 옆에서 거들고 나니까 강혜련 여사와 유경은 그나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동하는 괜히 자신 때문에 분위기를 망친 것은 아닌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서용훈 사장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동하에게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자자, 차도 다 마신 것 같은데 오늘은 이쯤에서 일어서도록 할까?”
“다음에 뵙겠습니다.”
동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유경도 머뭇거리며 따라 일어섰다.
원래 그녀는 눈치껏 빠져서 나중에 동하와 따로 만나려고 했었는데, 분위기가 이래서는 어려울 것 같았다. 솔직히 서용훈 사장이 걱정되기도 했고.
“내일 계약할 때 봬요, 동하 씨.”
“그래요.”
동하가 유경과 강혜련 여사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빠져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서용훈 사장이 동하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속삭였다.
“자네는 내일 미셜에 가서 계약을 하고 대한전자로 와 줄 수 있겠나?”
표정을 보니 따로 긴히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유경에게도 비밀이라는 뜻일 테지.
동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
☆ ☆ ☆
다음 날.
동하가 오전에 수련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10시가 넘었다.
평소였다면 집에 아무도 없어야 하는데 오늘은 세 명의 여인이 모두 동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무슨 일 있어? 어머니는 식당 안 나가셨네요. 미진이 너는 왜 학교 안 가고 집에 있어?”
“오빠, 우리 내일 이사해.”
“뭐라고?”
그러고 보니 다들 한창 짐을 싸고 있었다.
집을 사라고 성혜에게 8억이 든 통장을 주긴 했지만, 사실 그게 며칠 되지 않았다.
한데, 벌써 이사라니. 빠른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만큼 성혜도 하루빨리 지하 단칸방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리라.
“급매로 나온 아파트가 있어서 너에게 말할 시간도 없었구나. 브랜드 아파트야. 34평이고 지어진지는 3년 정도 밖에 안 되었는데 그 집 주인이 급히 외국에 나가야 한다고 해서 시세보다 싸게 샀지 뭐니.”
“아무리 그러셔도 이사를 하면 저에게 말씀을 하셨어야죠.”
“아니다, 동하야. 너 요즘 많이 바쁘잖니. 짐도 얼마 되지 않는데 굳이 너까지 나설 필요 없어. 너는 그냥 너 할 일 하면 돼.”
동하가 팔을 걷어 부치고 도우려 하자 성혜가 극구 말렸다.
가뜩이나 바쁜 동하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이사를 다 마치고 나면 그때 동하에게 알릴 생각이었다.
“그래, 오빠.”
“우리끼리도 충분해. 대부분 짐들은 거의 버리고 갈 거라서 사실 별로 할 일도 없어.”
미진과 미현의 입가에서는 계속 콧노래가 흘러 나왔다. 그녀들은 이 지긋지긋한 지하 단칸방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짐을 싸고 정리하는 것도 이렇게 신나고 즐거울 수가 없었다.
동하는 미안한 마음에 머리를 긁적거렸다.
사실 오늘도 약속이 계속 잡혀 있어서 같이 돌아다니며 도와주고 싶어도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다.
“이거 도와주지 않았다고 내 방만 없는 건 아니지?”
“풉!”
“언니하고 내가 방을 같이 쓰기로 했어.”
새로 이사하는 아파트는 방이 세 개였다.
그렇다는 건 성혜가 안방을, 그리고 동하가 작은방을 쓴다는 뜻이었다.
“가구나 다른 살림도구들은 어떻게 하기로 했는데?”
“헤헤! 그건 이따가 짐 정리 끝나면 마트에 가서 알아보기로 했어.”
하여튼, 여자들이란.
고 3인 미진이 학원도 안 가고 이사 준비를 하는 걸 보면 정말 좋긴 좋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짐을 버리고 간다는 말은 마음에 들었다. 지금 쓰고 있는 살림도구들은 대부분 어디서 주워 왔거나 너무 낡아서 멀쩡한 게 하나도 없었다.
“내일은 별 다른 일이 없으니까 저는 내일 도울게요.”
“오늘도 늦니?”
“그건 가 봐야 알 것 같아요. 대한전자 사장님과 약속이 있는데, 혹시 이야기가 길어지면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대, 대한전자 사장이라니. 우리가 아는 그 대한전자?”
성혜는 물론이고 미진과 미현까지 하던 일을 멈추고 일제히 동하를 쳐다보았다.
그녀들의 얼굴엔 ‘에이, 아니겠지’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 대한전자 맞아.”
“지, 진짜로?”
“응.”
동하가 너무 쉽게 대답을 하니까 엄마와 두 여동생은 어이가 없었다.
“오빠? 요즘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 거야? 얼마 전에는 다온텔레콤하고 일을 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쪽하고는 계속 일을 하고 있고, 대한전자하고는 이번에 새로 일하게 된 거야.”
“맙소사.”
“그, 그게 가능해?”
그녀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대한그룹과 다온그룹.
그들은 재계 라이벌이었다.
특히, 대한전자와 다온전자는 오랜 시간 가전제품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을 벌여 왔었다. 그 과정에서 고소와 고발도 종종 벌어졌고, 자존심을 건 점유율 싸움은 아예 전쟁으로 불릴 정도로 치열했다.
“우리 아들이 이렇게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줄 미처 몰랐네.”
“나는 이제 오빠를 존경하기로 했어.”
대한그룹과 다온그룹의 파워가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었다.
예전에 개망나니 최동하는 깨끗이 잊어줄 태세였다.
이러다 통장에 현금 100억 원이 있고 50억 원 상당의 주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까무러칠 것 같았다. 참, 골드바도 있었지. 이건 150억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골드바를 처분해서 번 돈이 1억 원이 넘었다.
“한데, 오빠는 국문학과 아니었어? 무슨 하는 일마다 분야가 죄다 전자 쪽이야?”
“그거야 뭐…… 미국에 유학 갔을 때 구상했던 것들이야.”
“오빠!”
미진과 미현이 소리를 지르며 동하를 쳐다보았다.
“자꾸 미국 타령 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