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수직상승-01 -->
“미, 미안해요.”
유경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배가 끊겼으니 집에 돌아가는 건 내일이 되어야만 가능했다. 꼼짝 없이 영종도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하는데, 어째 남녀 사이가 뒤바뀐 것 같았다.
동하는 당황해서 연신 사과하는 유경을 보고 빵 터지고 말았다.
“푸하하!”
“왜, 왜 웃어요?”
“혹시 나 꼬실려고 일부러 마지막 배를 놓친 건 아니죠?”
“아, 아니에요. 그건 진짜 아니에요. 나도 정말 몰랐어요.”
동하는 다시 한 번 빵 터졌다.
“푸하하! 유경 씨 그런 모습이나 변명도 원래 남자들이 하는 전형적인 수법인데.”
“히잉, 진짜인데.”
유경은 창피한 나머지 목덜미까지 붉어졌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건 정말 남자들이 여자 친구와 하룻밤 보내기 위해 써먹는 전형적인 수법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오늘은 내가 여자 역할을 해볼까요?”
“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영화나 드라마 보면 그런 거 있잖아요. 배가 끊겨서 하룻밤을 같이 보내야 하는 연인이 좁은 방에서 같이 잠을 자는 거죠. 그때 여자는 이불로 선을 만들어 놓고 넘어오지 말라고 하고, 남자는 오빠 못 믿느냐고 말하면서 슬금슬금 넘어오고. 결국 얼마 후에 화면은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으로 넘어가는 거죠.”
“자, 자꾸 놀릴 거예요?”
“그래도 잠은 자야할 거 아닙니까?”
“그, 그건…….”
“난 무조건 가만히 있을 테니까 유경 씨가 넘어와요.”
“내, 내가 왜 넘어가요?”
“그럼, 내가 넘어갈까요?”
“아, 아니에요. 넘어오지 마세요.”
유경은 기겁을 했다.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아까 동하가 말했던 장작불이 계속 떠올랐다.
“그나저나 잘 수 있는 곳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 민박집 뭐 그런 거 말이죠?”
아까 해변가를 돌아보았지만, 리조트나 호텔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보이는 건 모두 민박집뿐이었다.
하지만, 유경은 텔레비전에서나 민박집을 보았지 지금까지 민박집에서 자 본 적이 없어서 약간 망설여졌다. 하긴, 재벌집 손녀가 평민 코스프레 하는 것도 아니고 호텔과 리조트를 놔두고 민박집에서 묵을 리 없었다.
동하가 피식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민박집이 조금 지저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못 잘 곳도 아니니까.”
“그, 그렇죠.”
“그래도 바퀴벌레 몇 마리는 기본으로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건 충분히 감안하시구요.”
“예에?”
유경이 기겁을 했다.
처음으로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풋!’
동하의 눈동자가 순간 짓궂은 어린아이처럼 변했다.
“무얼 그리 놀래요? 콩벌레는 그나마 조금 귀여운 축에 속할 걸요? 아마 모기와 파리는 기본으로 있을 테고……. 신발이 알아요?”
“시, 신발이요?”
“처음 들어보나 보네. 다리가 50개 정도 있다고 해서 ‘쉰발이’라고도 불리는데 아무튼, 상당히 흉측하게 생긴 벌레에요.”
“꺄악!”
유경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지네는 알죠? 재수 없으면 지네가 있을지도 몰라요.”
“자, 자꾸 겁주지 말아요.”
그러면서도 유경은 자신도 모르게 동하의 팔을 꽉 붙잡았다.
“그럼, 지금부터 한번 벌레 체험 하러 가볼까요?”
동하는 사색으로 변한 유경을 데리고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동하와 유경에게 배 시간을 알려주었던 중년 사내가 끌끌 혀를 찼다.
“어이구, 세상 말세라더니. 아무리 남자가 좋아도 그렇지 저렇게 참하고 예쁜 처자가 뭐가 아쉬워서 남자들이나 하는 수법을 사용하누.”
그는 연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처음에는 동하가 유경을 꾀려고 고의적으로 마지막 배를 놓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중년 사내였다.
한데, 이게 웬걸?
두 커플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남녀의 역할이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 ☆ ☆
동하와 유경이 해수욕장에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9시가 훌쩍 넘은 상태였다.
하지만, 여전히 해변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고기를 굽고 술을 먹는 사람들.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사람들. 거기에 백사장을 거니는 연인들까지. 반짝반짝 빛나는 식당의 간판까지 더해져 해변가는 불야성이 따로 없었다.
이런 상황에 남아 있는 민박집이 있을 리 없었다.
유경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동하가 하도 겁을 주었던 탓에 속으로 계속 민박집이 없기만을 기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남아 있는 민박집이 한 곳도 없자 이제 노숙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동하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이 늦은 시간에 사람들까지 북적거리는 상황에 민박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아쉽게도 벌레 체험은 다음에 해야겠네요.”
“진짜 못 됐어. 자꾸 그렇게 놀릴 거예요?”
유경이 눈을 하얗게 흘겼다. 농담도 주고받고 우여곡절을 겪어서 그런지 동하와 유경은 한층 더 편해졌다.
“그나저나 오늘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데 집에 전화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 동하 씨, 잠깐만 실례할게요.”
유경은 그제야 생각이 난 듯 황급히 전화를 꺼내들고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서 집에 전화했다.
이것도 일탈이라면 일탈인 셈이었다. 외박한 적이 한 번도 없던 유경이었지만, 혜주와 경포대에 놀러왔다고 하자 강혜련 여사는 별다른 의심 없이 믿어 주었다. 이 시간에 혜주에게 확인 전화를 하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 혜주에게 다시금 전화를 걸었다.
이번 사태의 원흉이 바로 혜주였다.
아니나 다를까.
혜주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유경의 전화를 받자마자 키득키득 웃었다.
“너는 지금 웃음이 나오니?”
“고마우면 고맙다고 해, 이것아. 친구 좋다는 게 뭐니? 앞으로 동하 씨하고 잘 되면 다 내 덕인 줄 알아.”
하지만, 정작 혜주조차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동하와 유경의 사이를 밀어주려고 약간의 음모를 꾸미긴 했지만, 원래 유경의 성격이 꼼꼼한 편이라 백퍼센트 실패할 줄 알았던 것이다. 키득키득 웃고는 있지만, 사실 혜주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서울에 올라가기만 해봐.”
유경은 나중에 보자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가 동하에게 돌아갔을 때는 10여분 정도 시간이 지난 뒤였다.
“어?”
유경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동하가 한창 텐트를 치고 있는 중이었다.
“이, 이게 뭐에요?”
“후후! 식당에 돌아다니면서 사정을 설명했더니 인심 좋은 이모님이 빌려주시더라고요.”
“지, 진짜요?”
유경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텐트를 쳐다보았다.
동하는 단순히 빌렸다고 말하는데, 유경이 보기에는 텐트의 상태가 새것처럼 깨끗하고 좋아 보였다.
더구나 아무리 인심이 좋아도 그렇지 이런 곳에서 텐트를 빌려주는 사람도 있나? 하물며 저렇게 깨끗한 텐트를?
물론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했다.
원래 인벤토리에는 필드에서 사용하려고 사 두었던 텐트가 있었다. 게다가 텐트 외에도 코펠과 침낭, 베개 등 캠핑에 필요한 장비가 모두 인벤토리에 있어서, 사실 동하는 처음부터 잠 잘 걱정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그저 유경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놀렸던 것이었다.
동하가 전화 운운한 곳도 사실은 유경의 정신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기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유경은 전화를 하려고 자리를 옮겼고, 동하는 주변을 살피고 지켜보는 시선이 하나도 없는 걸 확인하고는 인벤토리에서 텐트를 꺼냈다.
동하에게는 두 개의 인벤토리가 있었다.
하나는 가장 처음에 샀던 것으로, 여성용 핸드백처럼 생겨서 남자인 동하가 가지고 다니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그래서 지금은 만능 자동차 전용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얼마 전에 샀던 것으로 이건 남성용 크로스백이라 평상시에 들고 다녀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때문에 평상시에도 공간 안에 밀어 넣지 않고 어깨에 메고 다녔다. 지금처럼 갑자기 필요한 물건을 꺼낼 때도 제법 유용했다.
동하는 캠핑 장비를 모두 꺼낼까 싶었지만, 그러면 유경이 너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았다. 그래도 덮고 자야 할 이불은 필요할 것 같아서 침낭은 꺼내놓았다.
텐트가 완성이 되자 유경은 그제야 해변에 놀러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호텔이나 리조트도 좋지만, 텐트엔 나름대로의 낭만이 있었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유경은 여름 하면 평생 이번 여행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화장품 공급 건 말이에요.”
“예, 동하 씨.”
“내일 어머님을 만나 뵙고 계약 하는 것으로 하죠.”
“저, 정말이요?”
“하지만, 무지 비싸게 계약할 거니까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헤헤. 그건 상관없어요. 어차피 대한민국에서 가장 돈 잘 버는 그룹이니 동하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부르세요. 그런다고 얼마나 손해 보겠어요.”
유경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하루 종일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하긴, 처음부터 동하가 미셜을 놔두고 다른 곳과 계약할 것 같진 않았다.
왠지 긴장이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유경은 갑자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침낭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지퍼를 열면 이불처럼 덮고 잘 수 있지만, 결국 침낭 하나로 동하와 같이 덮고 자야 한다는 뜻이었다.
‘어, 어떡해…….’
아까 동하가 농담처럼 했던 장작불 얘기가 또 다시 떠올랐다.
유경이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 하지 못한 채 동하를 쳐다보았다.
하나 동하는 살짝 눈살을 찌푸린 채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이 평소와는 달라서 유경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동하 씨, 갑자기 왜 그래요?”
“흐음. 신경 쓰이는 것이 있어서요.”
동하는 옆에 있는 텐트를 응시했다.
텐트 앞에서는 십여 명의 남녀가 모여 앉아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고 있어서 다른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남자가 8명에 여자가 4명이었다. 그들의 주변에는 술병이 널브러져 있었다. 어떻게 보면 대학생들이 놀러 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기타 소리와 노래 소리 속에 아주 희미하게나마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동하는 공력을 끌어 올려 천이통을 시전했다.
천이통은 천리 밖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지고무상의 절기였다.
이미 100년에 육박하는 공력을 지닌 동하였다. 완벽한 천이통은 어렵다 하더라도, 인간이 들을 수 있는 한계 범위를 넘어선 건 이미 오래전 일이었다.
“읍읍.”
텐트 안에서 무언가에 억눌린 듯한 여인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이어 들려온 위협적인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썅! 죽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입 닥치고 있어.”
동하는 이제 대충 어떤 상황인지 깨달았다.
하지만,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다.
텐트 앞에서 노래하는 인간들은 뭐지?
거기에 여자들이 끼어 있어서 동하는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텐트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들키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노래를 부르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아, 나 참.”
어딜 가나 쓰레기들이 있기 마련이다.
동하도 이전 생애에서 온갖 쓰레기 짓을 하고 다녔지만, 그래도 이건 조금 심하다고 생각했다. 정의의 사도가 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누군가의 인생이 망가질 걸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 외면하는 인간쓰레기가 되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뚜벅뚜벅!
동하가 텐트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유경도 천천히 따라나섰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지금은 동하에게 말을 걸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응?”
가까이서 보니 여자들의 얼굴이 생각보다 더 어려 보였다.
화장을 진하게 하고 옷을 야하게 입고 있어서 멀리서 보았을 때는 대학생처럼 보였는데, 이건 영락없는 고삐리였다.
지갑은 있는데 주민등록증이 없었다.
주민등록증이 있었다면 아마 동하의 눈앞에 그녀들의 정보가 둥실 떠다녔겠지만, 4명의 아이들 중 어느 누구도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열여덟 살 미만의 청소년들이란 뜻이었다.
“어이, 텐트 안에 있는 놈. 이제 그만 하고 나오지?”
뚝!
갑자기 기타 연주가 멈춰지고 노래가 끊어졌다.
“뭐야, 넌?”
“저리 안 꺼져?”
남자들은 이십대 중후반의 나이였다.
여자 아이들과 확연하게 나이가 차이나는 것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었다.
분명 오갈 데 없는 가출 청소년들에게 밥도 주고 잠도 재워주면서 그걸 미끼로 욕망을 푸는 인간들이 틀림없었다.
“원조교제까지는 못 본 척 넘어가 줄 수도 있는데, 강간은 조금 그렇잖아?”
“아니, 이 새끼가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그들이 험악한 표정으로 동하를 노려보다가 유경을 보고 두 눈을 크게 치떴다. 주변이 어두운 밤인데도 불구하고 테니스 스커트 사이로 미끈하게 빠진 유경의 다리와 풍만한 가슴은 그야말로 사내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기에 제격이었다.
“호오?”
8명의 사내들 입에서 약속이나 한 듯 탄성이 터져 나왔다.
더 가관인 건 여자들의 반응이었다.
그녀들은 무서운 눈빛으로 유경을 노려보았다.
“아. 씨. 딱 봐도 우리보다 나이도 많아 보이는데, 오빠들 너무 밝히는 거 아니야?”
동하는 잠시 어이가 없었다.
이건 도저히 열여덟 살 미만의 여자 아이들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이 아니었다.
하긴, 심보가 저리 못됐으니 텐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면서도 돕고 있는 것일 터였다.
동하가 차갑게 내뱉었다.
“다들 눈 깔아라.”
“하아, 이 멍청한 새끼. 아까부터 여자 앞이라고 폼 잡는 꼴 하고는. 앞으로는 낄 때 안 낄 때 구분 좀 하며 살아라.”
곱슬머리가 무섭게 눈을 치켜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하게 변했다.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곱슬머리가 사람들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아, 씨발. 구경났어? 저리 안 꺼져?”
그의 협박에 사람들은 찔끔 놀라 모두 흩어져 버렸다.
여전히 해변가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주변에는 텐트를 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 누구 하나도 험악한 사내들의 기세 때문에 도와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