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아이템 연동-04 -->
“유경아, 이게 뭐니?”
“성분 분석표에요.”
“성분 분석?”
강혜련 여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경이 건네준 파일을 쳐다보았다.
성분 분석표 파일은 미셜 화장품 연구실에서 작성한 것이었다.
하지만, 테스트 제품은 미셜 제품이 아니었다.
그건 바로 동하가 유경에게 건네준 화장품 샘플의 성분을 분석한 것이었다.
원래 성분 분석이 끝난 건 며칠 되었지만, 연구소에서 테스트 제품에 특이한 성분이 있다며 좀 더 자세히 분석을 한다고 늦어졌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샘플에는 주름개선에 뛰어난 콜라겐이나 아데노신보다 10배 이상 뛰어난 효능을 지니고 있으면서 피부재생 능력에도 탁월한 성분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 효능이면 며칠만 사용해도 당장 눈에 띄는 효과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의 기분이 이럴까?
아직 콜라겐이나 아데노신보다 10배 이상 효과가 뛰어난 물질이 있다는 말은 연구소 내 누구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연구소의 사람들은 무척 흥분한 가운데서도 빨리 임상실험을 하고 싶어 했다.
그동안 성과를 못 내 활기를 잃고 무거웠던 미셜 화장품 연구소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밝아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들은 대한그룹 쪽에서 이 물질을 발견한 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요청을 하면 바로 샘플을 지원해줄 줄 알았다.
하나 그건 애초에 동하가 건네준 것이었다.
샘플의 양이 워낙 적어서 임상실험을 하는 것은 아예 꿈도 꿀 수 없었다.
흥분하긴 강혜련 여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유경에게 전후사정을 듣고 떨려오는 가슴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이런 게 있었으면 진작 엄마에게도 말을 했어야지.”
“엄마도 참. 저도 부탁을 받은 것뿐인데 어떻게 그래요?”
“아니, 얘가 지금 뭐래?”
강혜련 여사가 눈을 하얗게 뜨고 유경을 흘겨보았다.
지금 회사가 풍전등화에 빠져 있는데, 찬밥 더운 밥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엄마가 만나보고 싶은데 연락을 한번 해보렴.”
“동하 씨를요?”
“응? 나, 남자였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대상이 화장품이다 보니 샘플을 준 사람이 당연히 여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강혜련 여사였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공부에만 열중할 뿐 도통 남자에 관심이 없던 유경의 입에서 먼저 남자 얘기가 나올 줄이야. 이젠 화장품 샘플도 샘플이지만, 강혜련 여사는 동하라는 사람에게 관심이 더 생겼다.
“뭐하는 사람인데?”
강혜련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유경은 아직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 말하기가 조금 민망했지만, 강혜련 여사가 계속 채근을 하자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냥…… 학생이에요.”
“혹시 대학원생?”
“아니요. 동하 씨는 국문학과 2학년이에요.”
“구, 국문학과?”
☆ ☆ ☆
따르릉!
동하가 한창 자동차 안에서 예측 안경을 쓰고 문학경기장을 살펴보고 있을 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안경이 너무 촌스러워서 내려서 살펴보기 보다는 가급적 차 안에서 확인하는 쪽이 편했던 것이다.
“여보세요?”
-동하 씨, 저 유경이에요.
“오랜만이에요, 유경 씨!”
-잠깐 만나고 싶은데, 지금 어디에요?
“여긴…….”
왠지 인천이라고 말을 하면 유경이 내려온다고 할 것 같았다.
어쩌면 이번에도 택시를 잡아타고 올지도 몰랐다.
“유경 씨, 지금 집이죠?”
-예? 예. 집에 있어요.
“그럼, 내가 유경 씨 집 근처로 갈게요.”
예전에 유경을 집까지 바래다 준 적이 있지 않던가?
그녀의 집은 서초동에 있었다.
이곳 역시 대한민국 부촌 중 하나였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동하가 유경의 집을 떠올리는 순간 눈앞이 새하얘지더니, 갑자기 유경의 집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가?
“어억?”
동하는 소스라치게 놀라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동하는 유경의 집 바로 앞에 와 있었다.
잘 정비된 도로와 그 좌우에 위치한 대한민국 최고의 주택들까지.
결코 꿈이나 헛것이 보이는 게 아니었다.
“동하 씨, 갑자기 왜 그래요?”
유경도 덩달아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동하는 그녀의 말에 대꾸해줄 정신이 없었다.
동하는 꿈을 꾸는 듯 정신이 멍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마치 공간이동이라도 한 것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동하의 머릿속에 불현듯이 무언가 스쳐지나갔다.
공간이동.
그것 말고는 지금 상황을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필드라면 몰라도 여긴 마나가 없는 지구였다.
공간이동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설마…… 혹시?”
동하는 예측 안경을 벗고 자세히 쳐다보았다.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공간이동을 시작하기 전에 동하는 유경의 집을 떠올리지 않았던가?
그때, 수하기 너머로 유경의 다급한 목소리가 연이어 들여오고 있었다.
그제야 동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미안해요. 갑자기 황당한 일이 벌어져서…….”
“지금은 괜찮아요? 어디 다친 곳은 없어요?”
왠지 동하보다 유경이 더 놀란 것 같았다.
“나는 괜찮아요. 내가 조금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요.”
동하는 다시금 유경을 안심시켜 주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예측 안경을 쓰고 인천문학경기장을 떠올렸다.
스스스!
눈앞이 새하얘지며 동하는 어느새 인천문학경기장 앞에 있었다.
“여, 역시.”
동하의 생각이 적중한 것이다.
정말 공간이동이었다.
인천과 서울까지 왕복하는 데 2초 정도 걸렸을까?
동하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질 지경이었다.
☆ ☆ ☆
아이템 연동이었다.
동하가 만능 자동차에서 내린 후 예측 안경만 쓴 상태에서는 공간이동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대로 예측 안경을 벗고 자동차에 타도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조건 만능 자동차와 예측 안경이 함께 사용되어야 했다.
말하자면 두 가지 아이템이 연동이 된 상태에서만 공간이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이템 연동이 되었다고 아무 곳이나 갈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동하가 가보지 않은 장소로는 공간이동을 할 수 없었다. 단지 상상만으로는 공간이동이 되지 않았다. 사진이나 지도로 장소를 떠올려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무조건 동하가 가 본 적이 있고, 동하가 그 장소를 구체적으로 떠올려야 아이템 연동이 일어났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뭔가 엄청나게 진화한 느낌이 들었다.
이러면 굳이 만능 자동차를 비행기로 만들지 않아도 필드에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템들 사이에 연동이 일어나 전혀 새로운 기능이 나타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동하였다.
“정말 신기한 일이네.”
동하는 공간이동을 해서 순식간에 유경의 집 앞으로 날아갔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그리고 다시 인천으로 갔다가 서울에 온 동하였다.
그렇다면 시간이 엄청나게 흘러야 정상이지만, 전화를 끊고 아직 10분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따르릉!
“유경 씨, 나 동하예요.”
-지금 어디에요? 정말 괜찮아요?
“후후! 사실은 유경 씨 집 앞이에요.”
-예에?
“서프라이즈. 깜짝 놀랐죠?”
-아이, 그게 뭐예요.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유경이 원망어린 목소리로 말했지만, 속으로는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가 그려졌다. 동하가 서프라이즈를 해주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니 행복한 기분이 들 법도 했다.
아무튼, 한바탕 소란은 동하가 깜짝 이벤트를 한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로부터 20분 뒤.
유경이 비비드한 컬러감과 여성스러움이 돋보이는 테니스 스커트를 입고 또각또각 걸어 나왔다.
미끈하게 쭉 뻗어 내린 다리와 풍만하게 볼륨감이 살아있는 그녀의 몸매에 동하도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였다.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죠?”
시간이 없어서 최대한 서둘러서 단장을 해서 그런지 그녀는 자신의 패션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이쿠, 지금도 충분히 예뻐요. 여기서 더 단장을 하면 마음이 심약한 사람은 버텨낼 수 없을 걸요?”
“그게 무슨 소리에요. 버텨낼 수 없다니…….”
“유경 씨 모습 보고 가슴이 떨려서 심장마비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뜻이죠.”
“풉! 그게 뭐예요.”
어찌 들으면 유치해서 손발이 오그라들 수 있는 말이었다.
유경은 꽤나 이성적인 성격이었다.
연인들 사이에 오가는 유치한 대화들?
텔레비전에서 그런 말들을 들으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유치한 말이 은근히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동하 씨도…….”
“예?”
“아, 아니에요.”
유경이 얼굴을 붉히고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다.
원래는 동하도 마찬가지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동하는 하얀색 반팔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게 전부였지만, 그 어떤 명품을 걸친 것보다 더 멋있어 보였다. 워낙 키도 크고, 균형 잡힌 체형에,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는 동하인지라 넝마를 둘러도 멋있을 것 같았다.
“동하 씨. 여기요.”
“혹시 화장품 샘플 성분 분석?”
“예.”
유경이 가방에서 성분 분석표 파일을 꺼내 동하에게 건네주었다.
“근데, 동하 씨. 궁금한 게 있어요.”
“이상한 성분 말이죠?”
“예. 연구소에 따르면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럴 거예요. 나도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되었으니까.”
“그래서요?”
“후후! 미안하지만, 나머지는 영업 비밀입니다.”
동하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유경은 궁금하긴 해도 충분히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동하 씨, 그럼 그 성분을 계속 구할 수는 있는 건가요?”
“아쉽게도 아주 희귀한 물질이라서 물량이 많지는 않아요. 그래도 한정판 개념으로 화장품을 생산할 정도는 됩니다.”
“그거라도 상관없어요.”
유경이 어느새 진지한 표정으로 동하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희에게 공급해줄 수는 없나요?”
“정말요?”
“이런 말을 하면 조금 그렇긴 하지만, 요즘 화장품 사업이 무척 어렵거든요. 엄마도 그것 때문에 동하 씨를 만나고 싶어 하세요.”
“흐음.”
동하는 잠시 고민하는 척 했다.
미셜 화장품이 어렵다는 건 이전 생애에서도 알고 있던 일이었다.
물론 조만간 망한다는 것까지.
원래 동하는 화장품 사업은 미셜과 함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다.
이것도 갑질이라면 갑질이었다.
동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그룹을 상대로 얻어낼 수 있는 건 최대한 얻어낼 생각이었다.
“며칠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혹시 다른 곳과 할 생각은 아니죠?”
유경은 괜히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런 건 꼭 아니지만, 여러 곳과 접촉해볼 생각이었거든요.”
“그럼, 나도 오늘 동하 씨에게 로비 한 번 제대로 해야겠네요.”
“로비요?”
“풀코스로 할 테니까 동하 씨도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세요.”
“하하핫!”
동하는 불현듯 예전 상황이 떠올라서 한참을 웃었다.
그때는 동하가 로비를 하겠다고 했었는데, 지금 유경이 그때 동하를 따라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하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유경 씨가 로비하는 거 보고 결정을 하죠.”
“아싸!”
유경이 폴짝 뛰며 좋아했다.
동하가 피식 웃었다.
“로비할 수 있게 되었다고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은 생전 처음이네요.”
“그거야 뭐…….”
유경은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로비를 핑계로 동하와 놀러갈 구실을 만든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유경은 동하를 만나기 직전에 혜주에게 전화를 했더니 느닷없이 혜주가 아이디어랍시고 전해준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우리 인천에 가요.”
“예?”
“예전에 월미도에 갔었는데, 배를 타고 들어가면 영종도가 있어요.”
그녀는 동하가 인천에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아니, 그건…….”
동하가 거절하려는 줄 알고 유경이 쐐기를 박 듯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풀코스로 모신다고 했죠? 배도 타고 회도 먹고 백사장을 거닐다 보면 동하 씨가 왜 우리에게 물건을 공급해야 할지 알게 될 걸요?”
끙!
동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영종도는 아까 2시간 전에 갔다 온 곳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차마 내색할 순 없었다.
유경의 눈빛이 묘한 기대감으로 가득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뭐, 로비를 하겠다는 건지 사심을 채우겠다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동하는 속으로 빙그레 웃었다.
가슴이 설레긴 동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 ☆ ☆
이번엔 유경의 차로 움직였다.
동하가 힘들게 운전하게 놔둘 수 없다나 뭐라나.
아무튼, 하루 만에 영종도를, 두 번 오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다.
그래도 아까는 을왕리 해수욕장에 오지 않았으니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해수욕장에는 피서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동하와 유경이 회도 먹고 백사장을 거닐다 보니 어느새 서쪽 하늘에 노을이 아름답게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때요, 이제 마음의 결정이 되었나요?”
“글쎄요.”
“히잉, 아직도 그러면 안 되는데. 좋아요. 마지막 스퍼트를 위해서라도.”
유경이 놀이기구들이 있는 곳으로 동하를 이끌었다.
이때만 해도 해수욕장에 놀이기구들이 제법 있었다.
“유경 씨. 지금 이럴 시간 있어요? 배가 끊기기 전에 슬슬 돌아가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괜찮아요. 아직 시간 많이 남아 있어요.”
“아까 유경 씨 표 끊을 때 시간 확인했어요?”
오늘은 로비스트 서유경이었다.
운전부터 시작해서 하다못해 승선표를 사는 것 역시 유경의 몫이었던 것이다.
“9시까지일걸요?”
“그래요?”
유경도 자세히 확인은 하지 않았었다.
혜주가 마지막 배 시간이 9시까지니까 그전까지 놀 시간은 충분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기 때문에 굳이 확인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건 동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까 혼자 왔을 때는 굳이 마지막 배 시간을 확인할 이유가 없어서 살펴보지 않았었다.
그래도 유경이 그렇다니 그런 줄 알고 동하는 모든 놀이기구를 죄다 섭렵했다. 유경은 그날 동하의 학교에서 즐겼던 축제가 떠올라서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웃고 즐기는 사이 어느새 시간은 8시를 넘기고 있었다.
더 이상은 지체할 수 없어서 두 사람은 차를 타고 선착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청천벽력과 같은 상황을 접해야만 했다.
“마지막 배요? 그건 이미 6시 30분에 끊어졌는데.”
“그, 그럴 리가요. 9시까지 아니었어요?”
“아! 그건 토요일만 그런 겁니다.”
“맙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