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만물상점-44화 (44/167)

<-- 44화 : 남궁혜 -->

동하가 기력을 되찾은 건 30분 정도가 지나서였다.

그 전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서 마냥 누워만 있었다.

만약 이런 상황에 혹시 다른 괴수가 나타나면 어쩌나 걱정을 하고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30분.

온몸의 기력이 거의 떨어진 상태임을 생각하면 실로 엄청난 회복 능력이었다.

자이언트 악어에게 상처를 입었던 곳은 불사지체가 발동이 되어 벌써 치유가 되었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어렵던 체력도 거인의 힘이 알아서 회복시켜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동하는 기력을 회복하고 가장 먼저 자이언트 악어의 미간에 박혀 있는 낭인검을 뽑은 후 놈의 사체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덩치가 커다란 놈은 해체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나저나 자이언트 악어의 가죽도 사체와 함께 마법의 용광로에 녹여서 검을 강화하면 지금보다 단단해질까?”

워낙 자이언트 악어의 가죽이 단단하고 질겨서 흥미가 동했다.

만약 동하의 생각이 성공만 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하고 무서운 신검이 탄생하게 될 것이었다.

물론 강화가 실패할 수도 있었다.

이전 생애에서 사체의 가죽으로 무언가를 강화했단 이야기는 듣지 못했었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도전해 보는 건 동하 입장에서도 딱히 손해 볼 것이 없었다.

동하는 즉시 자이언트 악어의 가죽을 인벤토리에 챙겨 넣었다.

자이언트 악어가 정말 크긴 큰 모양이었다. 놈의 가죽까지 모조리 챙겨 넣고 보니 인벤토리에는 남아 있는 공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원래 인벤토리는 3평 크기의 규모였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3평형 방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이래서는 조금만 더 괴수들을 사냥하면 내일 안에 인벤토리가 가득 채워질 것 같았다.

그 이후부터는 사체를 해체할 필요 없이 무조건 사냥에만 초점을 맞추면 되니까 지금보다 더 편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인벤토리 공간을 늘리면 지금보다 더 많은 사체를 챙길 수 있으니 말이다.

☆ ☆ ☆

며칠이 지났다.

그 사이에 동하는 많은 괴수들을 사냥했지만, 가급적 늪지대가 있는 곳에는 가지 않았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죽을힘을 다해 자이언트 악어와 싸워서 이기나, 메가 스파이더와 싸워서 이기나 100포인트를 얻는 건 똑같았다.

그럴 바에는 굳이 목숨을 걸고 자이언트 악어와 싸울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동하는 인벤토리에 사체로 가득 채워 넣었기 때문에 더 이상 괴수의 사체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동하는 쉬운 상대들만 찾아서 사냥했다.

그 덕분에 밀림던전에 살고 있던 메가 스파이더와 메가 앤트는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하지만, 인생이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던가?

밀림던전을 돌아다니다 보면 가끔 원치 않게 자이언트 검치 호랑이와 자이언트 쇼트 페이스드 베어를 만났다.

타고난 힘과 스피드. 그리고 무시무시한 이빨과 발톱까지.

놈들은 확실히 쉽지 않은 상대였다.

사체로 강화한 낭인검으로도 한 번에 놈들의 단단한 피부를 베지 못했다.

오히려 그럴 때면 놈들에게 역공을 당하기 일쑤였다. 놈들의 이빨과 발톱에 사체로 강화한 옷이 몇 번이나 찢어졌다. 그와 함께 피부가 살짝 찢겨져 나갔지만, 이 정도 상처는 애교 수준에 불과했다.

아무튼 그렇게 몇 차례 격전을 치르고 상처를 받고 나서야 동하는 확실하게 깨닫는 것이 있었다.

자이언트 검치 호랑이와 자이언트 쇼트 페이스드 베어는 공격 마법으로 정신을 빼 놓은 다음 청운적하검법으로 마무리를 지으면 가장 효과적으로 쓰러뜨릴 수 있었다.

이는 자이언트 악어에게 써 먹었던 전법이었는데, 피부가 단단하고 공격력이 무서운 놈들일수록 이 전술이 통했다.

어느 한 가지 능력으로는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강한 상대와 싸우다 보면 동하의 전투 능력도 조금씩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슬슬 출구 쪽으로 가야겠군.”

날이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었다.

이로써 밀림던전에 들어온 지 사흘째가 지나가려 하고 있었다.

출구로 가는 길에는 사냥하지 않고 빠르게 움직일 생각이라 하루면 충분했다.

하지만, 혹시 출구가 애초에 생각했던 곳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틀 정도 시간적인 여유를 두었던 것이다.

동하는 일단 근처에서 잠을 잘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밀림던전은 날이 어두워지면 괴수들의 천국으로 변하기 때문에 동하 역시도 밤에는 어지간하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동하는 한참을 돌아다니고서야 수풀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동굴 하나를 발견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들어가는 건 위험했다. 괴수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라이트!”

동하의 손바닥에서 불빛이 흘러 나와 어두운 동굴 안을 비추었다.

동굴은 생각보다 넓고 깊었다.

“응?”

그때 갑자기 동하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춰 섰다.

바닥에 나뭇잎이 가지런히 깔려 있었다.

직사각형 모양으로 얼핏 봐도 침대와 비슷한 크기였다.

더구나 나뭇잎 위에는 열기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설마 괴수들 중에 나뭇잎을 가지런히 깔고 잠을 자는 것도 있나?”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동하는 밀림던전에서 10일 정도 보냈지만, 사람의 흔적을 본 적이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아악!”

동굴 안쪽에서 뾰족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어?”

동하는 자이언트 악어를 만났을 때보다 더 깜짝 놀랐다.

저건 백퍼센트 사람의 비명소리였다.

그렇다는 건 밀림던전 안에 자신 말고도 다른 누군가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동하는 깊이 생각할 여유도 없이 몸을 날려 동굴 안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 ☆ ☆

한 여인이 자이언트 쇼트 페이스드 베어와 힘겹게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녀의 신법은 날렵했고, 검법은 날카로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후기지수 중에서도 명성이 높아서 칠준사미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녀의 세가에서도 그녀에게 거는 기대도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그녀의 공격은 자이언트 쇼트 페이스드 베어에게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다.

자이언트 쇼트 페이스드 베어의 힘은 무지막지했다. 공력을 전력으로 끌어 올려도 오히려 힘에서 그녀가 밀릴 정도였다. 더구나 발톱과 이빨 공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서웠다. 그녀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자이언트 쇼트 페이스드 베어를 상대했지만, 점점 상처를 입고 기력만 빠져 나갔다. 그녀의 옷은 넝마처럼 찢어졌고, 온몸은 피로 얼룩져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이, 이대로는 안 되겠어.”

여인은 위기를 직감하고 동굴을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자이언트 쇼트 페이스드 베어의 본능은 인간의 감각을 초월했다.

놈은 여인이 벗어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여인을 더욱 사납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결국 그렇게 여인은 밀리고 밀려 동굴의 끝까지 물러나고 말았다.

이젠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었다. 그녀의 등에 차가운 동굴의 벽이 느껴졌다. 이것으로 끝이었다. 그녀는 완전히 사면초가의 형국에 내몰린 것이었다.

“아!”

그녀의 두 눈에 절망의 기운이 떠올랐다.

처음 자이언트 쇼트 페이스드 베어가 동굴 안에 들어왔을 때 도망쳤어야 했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날이 어두워져서 동굴에 남았던 것인데 결국 그것이 악수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쿠어어어!”

자이언트 쇼트 페이스드 베어도 드디어 마지막을 감지했는지 두 발을 높이 치켜들고 발톱으로 여인을 공격하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매직 미사일!”

동하의 낭랑한 외침과 함께 매직 미사일이 날아와 자이언트 쇼트 페이스드 베어의 뒤통수에 작렬했다.

쾅!

제대로 맞았다.

자이언트 쇼트 페이스드 베어가 방심하고 있던 터라 그 충격은 평소보다 더 했다.

“쿠어어억!”

놈이 성난 표정으로 동하를 돌아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동하는 곧바로 라이트닝 볼트를 시전했다.

동하의 손에서 번개 구체가 쏟아져 나갔다.

라이트닝 볼트는 명중률이 조금 떨어지긴 하지만, 위력만큼은 그 어떤 공격 마법보다 탁월했다.

그래서였다.

동하는 자이언트 쇼트 페이스드 베어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가 가장 제격이라 판단했다.

과연 동하의 생각은 적중했다.

놈은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라이트닝 볼트를 맞고 말았다.

콰지지직!

자이언트 쇼트 페이스드 베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제법 충격을 받은 것이다.

“쿠어어엉!”

놈이 잔뜩 화가 치민 표정으로 앞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하지만, 동하가 한 발 먼저 온몸에 실드를 걸어 자신의 몸을 보호한 다음 그대로 자이언트 쇼트 페이스드 베어에게 달려들었다.

펑!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6미터가 넘는 자이언트 쇼트 페이스드 베어의 몸이 충격을 받고 저 멀리 나가 떨어졌다. 동굴이 잠시 들썩거리고 흙먼지가 천장에서 우스스 떨어져내렸다.

동하도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십여 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별다른 상처는 입지 않았다.

고릴라와 멧돼지 등을 상대로는 수없이 펼친 수법이었지만, 자이언트 쇼트 페이스드 베어를 상대로는 처음 펼쳐 본 근딜 계열의 공격이었다.

“괜찮군.”

자이언트 쇼트 페이스드 베어가 중심을 잡지 못한 상태였기에 그 효과가 더 컸던 것 같았다.

☆ ☆ ☆

“세, 세상에…….”

여인은 놀라움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저 무서운 자이언트 쇼트 페이스드 베어를 어린애 상대하듯 가볍게 해치우는 모습이라니.

무림 종족 내에서는 ‘칠준사미’로 명성이 자자했던 그녀였지만, 상대적으로 초라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누구지?’

그녀가 밀림던전에 도전하는 것이 이번으로 벌써 세 번째다.

하지만, 도전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7일 안에 밀림던전을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살아남는 것도 어려웠다.

밀림던전 안에 있는 수많은 괴수들 중 어느 하나도 만만치 않은 게 없었다.

만물상점에는 무림 종족도 많았고 그들과 정보도 교환해 보았지만 솔직히 별로 쓸 만한 정보는 없었다.

-자이언트 검치 호랑이와 자이언트 쇼트 페이스드 베어를 만나면 무조건 도망쳐라.

-밀림던전에는 알려지지 않은 보스급 괴수들도 있다.

-가급적 늪지대는 가지 마라.

고작 이 정도가 전부였다.

이래서는 밀림던전을 클리어 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이언트 쇼트 페이소드 베어가 단 한 명의 손에 죽었다는 말은 아직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상대가 더욱 궁금해진 남궁혜였다.

동굴이 어두워 처음에는 동하의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그때 동하가 강화한 낭인검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던 자이언트 쇼트 페이스드 베어의 숨통을 끊고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괜찮…… 어?”

동하가 여인의 얼굴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그건 여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그대는 화장품?”

그랬다.

만물상점 안에서 화장품 얘기가 나올 사람은 오직 한 명.

그건 바로 동하에게 기적의 화장품을 하나만 반품해 달라고 했던 남궁혜였던 것이다.

동하는 필드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던 남궁혜라는 사실이 못내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는 동하를 판타지 종족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하는 자이언트 쇼트 페이스드 베어를 잡기 위해 공격 마법을 펼쳤고, 일절 무공을 보이지는 않았다.

“몸이 많이 다친 것 같은데 괜찮습니까?”

“구, 구해 주셔서 고마……. 으윽!”

남궁혜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가 비명과 함께 다시금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바람에 여기저기 찢어져 있던 그녀의 옷자락이 벌어지고 탐스러운 속살이 드러났다.

“험험!”

동하가 어색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전에야 천하의 개망나니로 살면서 온갖 못된 짓을 하고 다녔지만, 지금은 적어도 예의를 지킬 줄은 알고 있었다.

남궁혜의 미모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부상을 당한 여인을 상대로 음욕을 품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여인은 피를 흠뻑 뒤집어쓰고 있어도 아름다웠다. 창백하게 변한 그녀의 얼굴이 평소와는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남궁혜도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옷을 여미려고 했지만, 그것이 잘 되지 않았다.

더구나 그녀는 지금까지 극도의 두려움과 긴장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자이언트 쇼트 페이스드 베어가 죽고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동하라는 것을 알게 되자 한순간에 긴장이 풀어졌다. 엄청난 고통이 밀려오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부터였다.

“괜찮습니까?”

“으윽! 저, 저는 아직 고맙다는 인사도…….”

“알았으니까 일단 진정부터 하시죠.”

“저, 정말 고마워요. 이 은혜는 저, 절대 잊지 않겠…….”

남궁혜는 미처 말을 끝맺지 못하고 기절하고 말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