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 새로운 카운트다운 -->
오후가 되면서 하늘은 더욱 화창해졌다.
장마가 끝난 직후라 매연에 찌든 서울의 공기도 상쾌하게 변해 있었다.
동하와 유경은 공원을 거닐고 있었다.
“에게? 로비한다고 하더니 겨우 공원을 산책하는 거예요?”
“커피도 있잖아요?”
동하가 손에 쥔 캔 커피를 흔들어 보였다.
뭔가 거창한 것을 기대했던 유경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런 것이야말로 동하다운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동하는 유경의 수준에 맞추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자기 멋대로지만, 자신감이 없이는 이렇게 하기 어려웠다.
“좋아요, 로비는 그렇다고 치고. 어디 투자 설명회도 한번 해봐요.”
유경이 팔짱을 끼고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동하도 거기에 장단을 맞춰 주었다.
“예, 투자자님! 잘 좀 봐주십시오.”
“풋!”
그렇게 웃고 농담을 하면서 동하가 화장품 샘플을 건네주었다.
“동하 씨, 이게 뭐에요?”
“보시다시피 화장품 샘플인데 성분 분석 좀 부탁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이 세상 물질이 아니라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화장품 사업을 위해서는 반드시 성분 분석을 해야만 했다.
유경은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게 끝이에요?”
“예.”
“그럼, 투자 설명회는요?”
“후후! 그건 성분 분석이 끝나야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이제 유경도 대충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동하가 이 화장품 샘플을 만든 것 같았다.
유경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동하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못하는 게 없어 보였다. 하긴, 관상을 볼 줄 아는 걸 보면 처음부터 평범한 사람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알았어요. 대신 저도 부탁이 하나 있어요.”
“혹시 영화?”
“어? 그,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와! 정말요?”
동하도 깜짝 놀란 척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동하는 진작부터 그녀의 가방 안에 영화예매권이 있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침 나도 영화가 보고 싶던 참이었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유경은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 ☆ ☆
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전철역이 있었다.
동하와 유경은 공원을 나와 전철역으로 향했다. 나름 동하를 배려하기 위해 차를 일부러 집에 놓고 온 유경이었다.
거리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양복을 입고 분주하고 움직이는 사람들, 커플들로 보이는 연인들, 그리고 테라스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까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저쪽에 신호등이 있네요.”
유경이 횡단보도 근처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 순간 동하는 불길한 기운을 감지했다. 공력이 4성으로 높아지고 청운적하검법을 수련하기 시작하면서 동하의 기감은 더욱 발달한 상태였다.
동하가 재빨리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돌아보았다.
“응?”
아무것도 보이지는 않았다.
하나 방금까지 도로 한복판에 무언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희미하게 공간이 왜곡된 현상이 동하의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바로 그와 동시에 차선을 따라 달려오던 버스 운전기사가 무언가를 보고 깜짝 놀라 핸들을 옆으로 확 꺾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눈앞에 보이던 이상한 물체가 사라지고 난 뒤였다. 그것이 더 사람을 놀래게 만들었다.
끼이익!
기사 아저씨가 황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속도를 이기지 못한 버스가 인도를 넘어와 횡단보도를 덮쳤다.
“위험해요.”
동하가 몸을 던져 유경을 껴안은 채 옆으로 피했다.
바닥에 떨어질 때의 모든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동하는 허공에서 살짝 위치를 바꾸었다. 동하는 유경의 몸을 위로 향하게 만들고 자신의 몸을 밑으로 내려가게 했다.
쿵!
제법 둔중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등이 부딪치며 떨어졌지만,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동하의 몸은 별다른 충격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편, 버스가 빠른 속도로 달려와 방금까지도 유경이 있던 곳을 지나갔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였다.
여기저기서 행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버스를 피했다.
기사 아저씨도 급브레이크를 밟았기 때문에 머지않아 버스는 멈춰 섰다. 다행히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사람이 많지 않아서 큰 인명피해로 연결되진 않았다.
동하가 유경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경 씨, 괜찮아요?”
“저, 저는 괘…… 괜찮아요.”
유경은 놀란 나머지 덜덜 떨고 있었다.
“동하 씨는 어디 다친 곳 없어요? 저 때문에 바닥에 심하게 부딪치셨는데…….”
“그러게요. 보다시피 이렇게 멀쩡하네요.”
동하는 두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이며 유경을 안심시켜 주었다.
하지만, 은밀하게 아까 공간이 왜곡된 곳을 쳐다보았다.
‘분명 뭔가 있었다. 그것도 나를 지켜보고 있었어.’
☆ ☆ ☆
동하는 영화를 보고 유경을 집에 데려다 주었다.
시간이 7시 정도 밖에 되지 않아서 여전히 날은 밝은 편이었다.
유경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다른 남자들은 어떻게 수작 한 번 걸어보려고 술을 먹이려고 난리인데 동하는 그런 게 없었다. 아쉬운 생각이 들면서도 그래서 더 믿음이 가는지도 몰랐다.
동하는 두 번이나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렇다면 작별 인사로 키스를 해도 못이긴 척 받아줄 생각이었다.
그때, 동하가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유경 씨.”
“예?”
유경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입술을 내밀 번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풉!”
동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부동의 재계 서열 1위의 대한그룹 손녀라고 하기엔 귀여운 면이 너무 많았다.
“나는 그냥 잘 들어가라고 말하려던 것이었는데.”
“모, 몰라요.”
유경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도망치듯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쿡쿡!”
동하는 계속 웃음이 나오는 걸 주체하기 어려웠다.
그러고 보니 동하도 누군가와 키스를 한지 정말 오래된 것 같았다.
사고를 당하고 10년도 더 되었으니 은근히 동하의 마음도 설레고 있었다.
그렇게 유경과 헤어지고 집에 돌아오니 9시가 넘어 있었다.
뉴스에 UFO를 봤다는 사람들이 나타났지만 사진을 찍은 사람도 없고, UFO를 보았다는 사람도 극소수에 불과해서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동하는 생각이 달랐다.
사람들이 본 게 UFO가 맞을 것이었다.
동하는 이미 우주에는 수많은 종족이 있으며 과학 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종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까 그 불길한 기운과 관련이 있겠군.”
동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그 불길한 기운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상황을 다시 생각해 보니 지켜보는 것보다는 마치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왜지?
처음에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하자 문득 짚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설마…… 인증 절차 때문인가?”
원래 동하는 만물상점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뭔가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인증 절차에 오류가 생겨서 자신이 주목을 받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조사에 착수를 시작 했겠지.
“젠장.”
그렇다면 아까 그 기운도 자신을 인증하려고 했었던 게 틀림없었다.
상대는 9성급 S몬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만물상점이었다.
아직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자신을 인증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인증을 하기에는 동하가 너무 빨리 이상한 기운을 감지해서 경계심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또 올 수도 있겠군.”
아마 다음에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인증하려 들 게 뻔했다.
뭔가 대책을 세워두긴 해야 하는데, 딱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상대가 인증하려고 할 때마다 적의 존재를 간파하고 경계심을 갖는 것도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이었다. 그렇다고 상대를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도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이 역시 자신의 정체를 말해주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가장 좋은 건 평범한 인간으로 보이는 것인데…….”
모든 능력을 감출 수만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미 동하는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니었다.
그의 몸에 9성급 S몬의 능력이 전이되어 있어서 평범하게 보이는 것이 더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길, 정말 방법이 없나?”
바로 그때였다.
바지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스마트폰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우우웅!
“응?”
띠링!
-적의 위협이 감지되었습니다. 닌자의 은둔술을 활성화 하시겠습니까?
“뭐, 뭐라고?”
동하가 두 눈을 크게 치떴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었다.
괴음의 도움을 받고 몇 번이나 능력을 끌어올린 적은 있지만, 지금처럼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먼저 방법을 제시해준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동하는 지금 엄청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이미 동하와 하나가 된 9성급 S몬의 프로그램도 덩달아 위기의식을 느끼고 대응방법을 찾아냈던 것이다.
띠링!
-은둔술과 관련된 심법을 다운로드 합니다.
☆ ☆ ☆
은둔술은 근본적으로 마법이나 무공과는 그 성질이 전혀 달랐다. 적과 싸울 때 쓰는 것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적진에 잠입하거나 아니면 적의 추격을 뿌리칠 때 사용하기 때문에, 사물을 이용해 몸을 숨기거나 호흡을 멈추고 기도를 안으로 갈무리해서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 않게 하는 것들이 전부였다.
-닌자의 인술이 복구되어 3%로 올라섰습니다.
-주변의 지형지물과 동화될 순 없습니다.
-모든 기도를 안으로 갈무리해서 적의 이목을 속일 수 있지만, 30초 이상 사용할 수 없습니다. 쿨타임 3분.
기도라 하면 몸안에 존재하는 기운.
즉, 능력이라 할 수 있었다. 아직 3% 밖에 능력이 각성되지 않아서 30초 이상 펼칠 수 없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이것만 있으면 평범한 인간처럼 모든 능력을 감추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동하는 이것으로 확실히 깨달았다.
자신의 몸속에는 만물상점에 있는 모든 종족의 능력들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들이 저절로 각성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것들은 특별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각성이 되기도 하며 상황에 따라서는 능력이 증폭이 되기도 했다.
“이것이 9성급 S몬의 힘이구나!”
동하는 새삼 9성급 S몬의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만물상점이 곧 9성급 S몬인지도 모르겠단 생각마저 들었다.
평생을 수련하고 단련해도 동하는 자신의 몸속에 녹아든 9성급 S몬의 능력을 모두 각성하고 그것들을 모두 대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사실 이것을 위해서라도 만물상점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솔직히 만물상점에 들어가는 건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격이었다.
무엇보다 인증 절차가 문제였다.
이번에 가면 또 다시 인증에 오류가 생길 게 뻔하다.
그렇다고 은둔술을 사용하는 것도 문제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범한 인간으로 보일 수는 있어도, 그 어떤 종족으로도 인증이 되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일단은 눈앞에 있는 적부터 해결하는 것이 먼저였다.
동하는 다음 날부터 은둔술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심법이 이끄는 대로 정신을 집중해서 모든 기운을 안으로 갈무리하는 데 노력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적이 나타나서 자신을 인증하려고 할지를 알 수 없기에 동하는 수련을 하면서도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 ☆ ☆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흘렀을까?
동하는 잠깐 시간을 내서 증권사 지점으로 향했다.
제약회사 주식을 매수한 이후 벌써 한 달이 훌쩍 넘어 있었다.
원래는 딱 한 달이 되는 날 주식을 빼려고 했었는데, 인증 오류라는 뜻밖의 사건이 벌어져 최근에는 은둔술 수련에 거의 모든 시간을 사용했던 것이다.
“휴!”
동하는 벽에 설치되어 있는 화면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주식이라는 것이 매수하는 것도 어렵지만, 매도하는 타이밍을 찾는 것도 어렵다.
타이밍이 잠깐만 틀어져도 이익구간이던 것이 순식간에 하한가를 치고 깡통 계좌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주가는 투자 시 금액의 3배를 넘어 4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원금 3천9백만 원을 투자했던 주식이 수수료를 떼고도 1억3천만 원이 넘어있었다.
수련 때문에 바빠서 조금 늦게 찾아온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동하는 이 돈을 고스란히 다온텔레콤에 밀어 넣었다.
다온텔레콤의 주식도 예전에 52주 신저가를 기록한 이후 조금씩 올라가고 있는 추세였다.
“그러고 보니 멤버십 카드와 관련된 발표가 이틀 뒤로구나!”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기대심리가 작용하면 주가는 지금보다 더 오르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응?”
증권사를 나오는 순간 동하는 또 다시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동하는 본능적으로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다시 왔다는 건 역시 인증을 시도하기 위해서일 것이었다.
하지만, 동하는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아니, 자신의 생각보다 오히려 늦은 감이 있었다.
솔직히 그날 이후로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아서 조금씩 초조해 하던 중이었다.
동하는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은둔술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30초.
하나 놈이 언제 인증을 시도하려 들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최대한 무방비 상태를 만들어서 놈이 안심하고 인증을 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동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유경에게 전화했다. 키스 사건 이후로 유경은 처음엔 어색해 했지만, 동하가 농담도 하고 아무렇지 않게 대하자 유경의 목소리도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
“참, 유경 씨. 성분 분석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며칠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유경 씨는 지금 뭐하고 있어요?”
동하는 최대한 자신의 몸을 무방비 상태로 만들었다.
놈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아직 은둔술을 사용할 때는 아니었다.
‘조금 만 더 기다린다.’
동하는 최대한 놈을 끌어들이는데 주력했다.
다행히 동하의 작전은 주효했다.
놈이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지금이다.’
동하는 재빨리 은둔술을 펼쳐 자신의 기도를 안으로 갈무리했다.
1, 2, 3…….
동하는 유경과 통화를 하면서도 속으로 숫자를 셌다.
타이밍이 정확했다.
놈은 20초가 되었을 때 모든 인증 절차를 마무리하고 떠나갔기 때문이었다.
“휴!”
동하는 긴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동하 씨, 갑자기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수화기 너머로 깜짝 놀란 유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핫핫! 아무것도 아니에요.”
동하는 크게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켜 주었다.
이것으로 한 고비는 넘긴 것 같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카운트다운을 준비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