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마법의 용광로 -->
“여기 있네.”
생활관 안이었다.
동하는 낡은 화로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네 개의 다리가 몸체를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화로처럼 보였지만, 실제 용도는 미니 용광로였다.
[마법의 힘으로 화염 계열의 열기를 주입하면 순식간에 달아올라 모든 것을 녹일 수 있다. 단 3서클 이상만 가능.]
동하가 용광로를 처음 봤을 때는 그저 신기하다는 생각만 하고 지나쳤었다.
무엇이든 녹인다는 것에 흥미가 일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실생활에서 딱히 쓰임새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고철을 모아다가 녹여서 합판을 만들때나 유용할까. 그렇다고 대량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크기도 아니었다.
긴지름 1미터, 짧은지름 80센티미터 정도의 타원형 모양의 용광로는 높이가 1.5미터 정도되었다.
쓰레기통의 용량과 비교해 볼 때 용량이 대략 100리터쯤 되어 보인다.
그리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낡고 볼품없어 보이는 마법의 용광로가 500포인트였다.
동하는 그 가격을 보고 실소가 나왔다.
“누가 저 가격에 저걸 사겠어?”
500포인트면 자신의 능력을 조금이라도 더 높일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동하는 이번이 만물상점을 3번째 방문하는 것이지만, 마법의 용광로는 항상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마 다른 테스터들 역시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만물상점은 인기 있는 것들만 계속 팔리고 비인기 아이템들은 먼지만 쌓여 가는 방식이었다. 지금까지 마법의 용광로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건 앞으로도 계속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한데, 그러던 것이 필드 2관에서 괴수들을 만나고 생각이 바뀌었다.
괴수들의 모습은 지구를 침공했던 몬스터들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건 무척이나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당시 지구는 몬스터들의 침공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도시가 파괴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인류에게 축복이란 말도 있었다. 몬스터들의 사체에서 나온 부산물과 결정체들이 새로운 에너지로 각광을 받으며 인류의 문명과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때문이었다.
이전 생애에서 동하는 몬스터들의 사체를 가공해 무기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했었다.
몬스터들의 사체를 어떻게 가공하고 활용해야 하는지 자세히는 몰라도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동하는 자이언트 검치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을 잘라서 인벤토리에 챙겨 넣었다. 사실 가죽이며 뼈도 챙기고 싶었지만, 사체를 해체하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그건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게 티라노사우루스와 자이언트 쇼트 페이스드 베어의 이빨과 발톱도 챙겼다.
메가 스파이더와 메가 앤트에겐 이빨이나 발톱이 없었다.
대신 이것들이 지구를 침공한 몬스터와 연관이 있다면 심장 안에 결정체가 숨어 있어야 했다.
동하는 자이언트 검치 호랑이 이빨을 이용해 메가 스파이더와 메가 앤트의 심장을 갈랐다. 단단하고 질기던 놈들의 근육이 종이처럼 쭉쭉 찢어졌다.
엄청난 성능에 동하는 혀를 내두르면서도 재빨리 놈들의 심장을 확인했다.
“으음. 아무것도 없네.”
그건 티라노사우루스나 자이언트 쇼트 페이스드 베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하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하게 변했다.
과연 이것들이 지구를 침공한 괴수들이 맞는지 아닌지 헷갈렸다.
사실 결정체는 괴수들의 사체보다 더 중요하다. 괴수들의 사체에서 나온 결정체를 이용해 인간들이 각성을 하고 능력자가 되기 때문이었다.
결정체를 이용한다고 모두가 능력자가 되는 건 아니었다.
고작 만 명에 한두 명 꼴로, 확률이 그리 높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체의 성향에 따라 각성되는 능력도 천차만별이었다.
인류는 결정체가 능력을 각성 시켜준다는 사실을 알아내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지구에 본격적으로 능력자들이 나타난 것은 3차 침공 때부터였다.
아무튼, 이때는 아직 샤이언 종족이 결정체를 만들기 전이었다. 지금은 실험 단계이기 때문에 결정체가 생겨나는 건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리고 이때가 본격적으로 우주 말살 프로젝트가 가동되는 시점이기도 했다.
“이게 과연 될까?”
결정체가 없는 걸 확인하고 동하는 한동안 망설였다.
자칫 잘못하면 포인트만 왕창 날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설령 실패할지언정 충분히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괴수들의 이빨과 발톱이 동하의 피부를 너무 쉽게 찢는 게 심상치 않았다. 아무리 8% 수준이라 해도 9성급 S몬의 능력이 담긴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는 건 괴수들의 이빨과 발톱에 특수한 능력이 담겨 있을지도 몰랐다.
“좋아, 까짓 거.”
성공하면 대박이란 말로도 부족하다.
그 가치는 지금까지 아이템을 이용해서 돈을 번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 ☆ ☆
첫 번째 실험 대상은 싸구려 낭인검이었다.
동하가 가장 싸구려 검을 산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7포인트짜리 싸구려 낭인검은 아무런 속성이 없어서 그야말로 내구성이 형편없었다.
동하가 힘을 주고 바닥에 내려치는 것만으로도 낭인검은 두 동강이 나 버렸다.
이것으로 낭인검의 내구성은 충분히 확인했다.
이제 반쪽 남은 낭인검을 괴수들의 사체를 녹인 것으로 강화시켜보는 일만 남은 셈이었다.
실험은 만물상점에서 감행했다.
이곳에 마나가 풍부해서 마법을 펼치기에 적당했고, 현실 세계로 돌아가면 당장 마법의 용광로를 꺼내 보일 곳도 없었다.
동하는 간밤에 체크인 했던 호텔로 돌아가 인벤토리에서 마법의 용광로를 꺼냈다.
일단 시작은 간단하게 자이언트 검치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을 각각 하나씩만 실험해볼 생각이었다.
아직 인벤토리에는 티라노사우루스의 사체 2마리와 자이언트 쇼트 페이스드 베어의 사체 1마리에서 얻은 이빨과 발톱이 있었다. 이번에는 사체를 완벽하게 해체하지 못하는 바람에 뼈를 가져오진 못했지만, 다음에는 괴수들의 뼈는 물론이고 가죽도 챙겨올 생각이었다.
아무튼, 사체를 정제하는 방식에는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냥 이빨과 뼈만 넣고 녹이면 나중에 수분이 모두 빠져나가 가루로 변하는데, 이건 폭탄이나 미사일 등 무기를 제조하는 데 유용한 재료다.
다른 한 가지 방법은 물을 넣고 녹여 액체화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액체에 또다시 어떤 재료를 첨가하느냐에 따라 액체를 사용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석유를 대체하는 신에너지로 사용할 수도 있고, 단순하게 물건을 강화시킬 수도 있었다.
동하는 두 번째 방식으로 액체를 만들어보려고 했다.
긴장되는 마음을 가다듬은 후 두 손을 마법의 용광로에 가져다 대고 불꽃을 일으켰다.
“파이어.”
마법의 용광로가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오르더니 물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단단하기 그지없던 자이언트 검치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이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토록 엄청난 열기가 일어났는데도 정작 주변은 그리 뜨겁지 않았다.
대략 10분 정도가 지난 뒤에 자이언트 검치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이 완전히 녹아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마법 용광로의 성능은 확실히 좋았다.
그 단단한 자이언트 검치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을 완벽하게 녹여버린 것이다.
마법이 3서클이 되어야 가능하다는 점에서 현실에서는 자주 쓰기 어렵다는 페널티가 있긴 하지만, 일단 첫 번째 산은 넘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이 액체를 낭인검에 발라 그 성능을 시험하는 일만 남았다.
마법의 용광로 하단에는 배출 장치가 있었다. 마개를 몇 번 돌리자 안에 있던 액체가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동하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그릇에 액체를 담았다.
붓이나 솔은 없지만, 호텔에는 대신 칫솔이 있었다. 동하는 양치질 한 번 안 하는 셈치고 칫솔을 가져와 액체를 묻힌 후 부러진 낭인검에 두루 발랐다.
사실 지금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마법의 용광로가 아무리 괴수들의 사체를 녹일 수 있다 해도 이 액체가 아무런 효과도 없다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쾅!
동하가 두 동강 난 낭인검을 몇 번이나 바닥에 내리쳤다.
그 결과는?
당연히 부러지지 않았다.
자이언트 검치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을 녹여서 만든 액체에 물건을 단단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성공이다.”
동하는 뛸 듯이 기뻤다.
이제 천하에 그 어떤 명검도 부럽지 않았다.
이 정도 내구성이면 필드 2관에서 충분히 버틸 수 있을 터였다.
동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밖으로 나가 싸구려 낭인검을 하나 더 사왔다.
그리고 이번에도 칫솔을 이용해 낭인검에 액체를 골고루 발랐다.
푸하하!
생각만 해도 흐뭇한 일이었다.
고작 7포인트짜리 싸구려 낭인검이 전설의 명검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신검으로 탄생했는데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마법의 용광로를 사기 위해 쓴 500포인트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아직 자이언트 검치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을 녹여서 만든 액체가 많이 남아 있었다.
“어디보자…… 강화시킬 무기가 또 뭐가 있지?”
방패가 하나 있으면 좋겠군.
동하는 방패도 가장 저렴한 것으로 사왔다.
내구성이 형편없는 것이었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기왕이면 기다란 창이 하나 더 있으면 공격력에 큰 힘이 될 것 같았다.
동하는 창도 하나 샀다.
그렇게 동하는 액체가 모두 바닥이 날 때까지 무기와 장비를 사서 강화를 했는데, 거기에 들어간 포인트는 모두 합쳐 30포인트도 되지 않았다.
“움화화화홧!”
벌써부터 다음 필드가 기다려지는 동하였다.
☆ ☆ ☆
사실 동하는 무기를 강화하려고 마법의 용광로를 사서 괴수들의 사체를 정제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현실에 돌아가 사업적인 아이템으로 사용할 생각이 더 강했다.
적용할 곳은 광범위했다. 동하의 머릿속에는 이전 생애에서 인류가 사체를 이용해 발명했던 온갖 물건들이 떠올랐다.
“이건 돌아가서 실험을 해봐야겠지.”
자신이 알고 있던 괴수들과 이곳의 괴수들 사이에 어느 정도 갭이 있고, 차이가 있다 보니 확실하게 검증하기 전까지는 설레발을 치긴 어려웠다.
동하는 다시금 생활관을 찾아갔다.
그가 생각했던 것들을 모두 적용시키려면 더욱 정밀하게 정제할 수 있는 도구가 필요했다.
동하는 이곳저곳 발품을 팔아 보았지만, 아쉽게도 당시 지구에서 괴수들의 사체를 정제했던 수준의 도구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심연의 눈동자나 영업의 신 같은 아이템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이런 것 밖에 없네.”
- 기적의 화장품. 한번 사용으로 동안 피부 보장! 놀라울 정도의 미모 상승 및 변신 효과! 효과 지속 시간은 24시간.
기적의 화장품은 여러 종류가 있었다.
섹시한 외모용, 청순가련 외모용, 베이글녀 외모용 등
동하는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리려고 했다.
전에 성혜를 위해 마스크 팩을 사놓고 정작 바빠서 사용하지도 못한 적이 있지 않던가?
하지만, 왠지 어머니나 동생들에게 선물을 해주면 좋아할 것 같았다.
100ml 용량은 100포인트였고, 70ml짜리는 70포인트였다.
비싸다면 무지 비싸지만, 여자들이라면 그래도 무조건 살 것 같았다.
지금 동하의 수중에는 200포인트 조금 넘게 남아 있었다.
동하는 종류별로 70ml짜리를 3개 구매했다.
그러고 나니까 포인트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더 이상 살 만한 아이템도 없어서 그냥 질러 버렸다.
미진과 미현은 아직 학생이라 화장품을 쓸 나이는 아니다.
그래도 나중을 생각했다.
미진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졸업 선물로 주면 좋아하겠지.
동하가 값을 치르고 돌아서려는 순간이었다.
“이봐요.”
“응? 나 말입니까?”
“그래요, 그대 말이에요. 나에게 하나만 팔면 안 돼요?”
궁장을 입은 여인이었다.
커다란 눈망울에 갸름한 얼굴. 머리카락을 위로 틀어 올려 비녀로 곱게 단장한 모습이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온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동하는 첫 눈에 그녀가 무림 종족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미안하지만, 이건 제가 선물로 산 것이라…….”
그리고 눈짓으로 100ml를 가리켰다.
“끙! 그건 나도 알아요. 한데, 딱 70포인트 밖에 없는데 그대가 70ml를 3개 모두 다 사 버렸네요.”
여인은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의 반응을 보니 이걸 사기 위해 꽤 오랜 시간 기다렸던 것 같았다.
“흐음.”
동하의 수중에 35포인트가 남아 있긴 했다.
하나를 반품하고 100ml로 구매해도 5포인트가 남기 때문이었다.
여인은 여전히 미련이 남는지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나는 무림 종족의 남궁혜라고 해요.”
“아, 나는…….”
동하는 하마터면 무림 종족이라 말을 할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판타지 종족입니다.”
“그, 그런가요? 판타지 종족 치고는 상당히 특이하시네요.”
남궁혜가 먼저 소속을 밝힌 것은 혹시 동하가 무림 종족이 아닌가 싶어서였다.
동하의 모습은 무림 종족에 가까웠다. 같은 무림 종족이라면 남궁세가를 모를 리 없을 테고 그럼 편의를 봐주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말투가 무림 종족과는 거리가 멀었다.
남궁혜는 문득 요 며칠 만물상점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소문이 떠올랐다.
“칭호를 발견한 사람이 판타지 종족이라고 했죠?”
“글쎄요. 저는 이제 막 필드에서 나와서 무슨 얘기인지 잘…….”
동하는 대충 얼버무렸다.
무조건 시치미를 떼고 볼 일이었다.
남궁혜는 동하의 눈을 쳐다보며 무언가 더 물어보려 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판타지 종족과 무림 종족은 경쟁 관계에 있지 않던가?
동하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한다 해도 잘못은 아니었다.
“오늘 여러모로 결례가 많았어요.”
남궁혜는 정파의 여협답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동하는 잠시 생각을 하고 화장품을 내밀었다.
“어떤 스타일을 원하세요. 베이글? 섹시? 아니면 청순?”
“예?”
“이거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 그래요.”
“내가 하나 반품 할게요.”
“그래도 괜찮아요?”
“후후! 나는 35포인트 정도 더 있으니까 100ml로 사면됩니다.”
“그래주신다면 정말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그것이 나중에 어떤 인연으로 다가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동하는 100ml로 교환을 한 후 만물상점을 나왔다.
그리고 로그아웃을 하고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