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대박-02 -->
사실 그녀가 인벤토리를 꺼내는 모습을 봤는지 안 봤는지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동하가 이대로 그냥 떠나면 그녀와는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는 사이였다.
설령 그녀가 어디 가서 지금 이 일을 사람들에게 말을 한다 해도 믿어줄 사람이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분명 농담 정도로 생각하겠지.’
그건 누군가 UFO를 봤다는 말과 비슷한 것일 터였다.
오히려 동하는 기획실장이란 사람이 혼자서 비상계단에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영업의 신은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주고 기분을 맞춰주면 호감도가 급속도로 상승하지 않던가? 지금 영업의 신을 사용하기 가장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그녀의 호감만 얻을 수만 있다면 이곳의 잉크와 토너를 싹쓸이 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테니 절호의 기회를 만난 셈이었다.
다행히 영업의 신 알약은 조그만 병에 담겨져 있었고, 주머니 속에 있었다.
동하는 수정 모르게 주머니에서 알약을 꺼내 입속에 털어 넣었다.
바로 그때 수정이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며 동하에게 물었다.
“방금 그거 뭐였죠?”
“어떤 거 말입니까?”
“시치미 떼 봤자 소용없어요. 가방에서 커피를 꺼내고 가방을 허공 속에 집어넣는 거 다 봤어요.”
인벤토리를 불러내는 장면은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동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커피 말하는 겁니까? 이걸 어디에서 꺼내요? 난 가방 안 멨는데.”
“누가 가방을 멨다고 했어요? 머리 위 허공 속으로 밀어 넣었다구요.”
“핫핫! 보기보다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뭐라고요?”
수정이 얼굴을 찌푸렸다
“말이 그렇잖아요. 상식적으로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허공에 뭘 밀어 넣어요?”
“상식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으니까 그렇죠. 아까 그건 분명 영화에서 나올 법한 마법 같은 일이었다고요.”
“풉!”
동하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기분 나쁘게 왜 웃죠?”
“원래 이런 식으로 작업을 겁니까?”
“뭐, 뭐라고요?”
“나에게 말을 걸려는 의도였다면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요. 하지만, 마법이라니. 너무 황당해서 뭐라 대꾸해야 할지를 모르겠네.”
“이봐요, 지금 사람을 어떻게 보고…….”
“아아, 좋습니다. 내가 연상은 취미가 아니지만, 그쪽 성의를 생각해서 딱 10분만 시간을 드릴게요.”
“뭐가 10분이란 거죠?”
“텐 미닛. 10분 안에 나를 꼬셔보라는 겁니다. 열심히 하면 내가 넘어가 줄지 또 압니까?”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수정은 이제 화도 나지 않았다.
그녀야말로 연하는 남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동하와 나이가 그리 많이 차이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도 엄연히 20대였다. 물론 아홉수를 1년 남겨둔 28살이지만, 노땅 취급 받을 나이는 절대 아니었다.
수정은 도도하고 차가운 느낌의 서구적인 스타일의 미녀였다. 게다가 다온그룹의 손녀로 태어났으니 어지간한 남자는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런 그녀조차도 동하처럼 자신감 쩌는 남자는 본 적이 없었다. 재벌 2세들도 저렇게까지 자신감이 넘치지는 않았다.
‘무얼 믿고 자신감이 넘치는 거지? 저 인간이 정말 내가 작업을 걸려고 마법 운운한 줄 아는 건가?’
이쯤 되면 수정도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아까 그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지만, 어쩌면 자신이 잘못 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평소였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수정은 방금 본 자신의 기억에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이젠 무엇이 진짜이고 거짓인지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으로 변하고 말았다. 영업의 신이 강력하게 작용한 결과였다. 그리고 기억을 조작하는 것이 염동력과 닮아 있었다.
사실 상대의 호감을 얻지 못하면 아무런 효과도 얻을 수 없는 것이 영업의 신이다.
하지만, 영업의 신은 궁극적으로 자신감을 높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아이템이었다. 설명서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문구가 바로 ‘말하는 것이 두려워 고개 숙인 그대. 더 이상 영업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란 것이다.
영업은 자신감과 직결된다.
애초에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 영업의 신을 필요로 할 리 없는 것이다.
바로 그랬다.
동하가 방금 수정에게 보여준 자신감 있는 말투와 행동은 확실히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원래 회귀하고 난 이후 멀쩡한 몸 하나만으로도 자신감이 생겼던 동하였다. 하물며 특별한 힘을 얻고 특별한 존재가 된 지금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부러 시치미를 떼기 위해 평소보다 더 자신감 있게 나갔던 것이다.
한데, 그것이 영업의 신의 효과를 증폭시켜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동하가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수정을 대하는 과정에서 동하의 몸속에 녹아 있는 염동력의 힘과 상호작용을 일으켜 그 능력이 크게 증폭된 것이다.
아직 수정의 호감을 얻지 못했는데도 동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대충 인벤토리 문제는 해결한 것 같았다.
‘영업의 신이 증폭됐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동하는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자신감 때문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에 동하는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심안의 눈동자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동하에겐 아직 사용하지 않은 영업의 신 알약이 4정이나 남아 있었다.
그렇다는 건 영업의 신을 잘만 활용하면 애초에 동하가 생각했던 목표액을 훨씬 초과해서 목적을 극대화 시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직 좋아하기에는 이르다.
동하는 여전히 수정의 호감을 얻어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인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여자 혼자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혹시 사고라도 쳤어요?”
☆ ☆ ☆
가벼운 질문으로 시작된 대화는 어느새 1시간 넘게 이어지고 있었다.
비상 계단에 나란히 앉아서 동하는 거의 듣기만 하고 말하는 쪽은 수정이었다.
수정은 처음 보는 사람과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얘기하고 있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동하는 그녀보다 나이가 7살이나 어렸다. 하물며 아까 동하가 보여주었던 말도 안 되는 자신감만 생각하면 지금도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동하에게 말을 하고 나면 힘들었던 마음이 힐링을 얻은 것처럼 편안해졌다.
그것이 못내 이상한 수정이었다. 그녀는 친구들에게도 하지 못했던 고민들을 동하에게 털어놓았기 때문이었다.
“학생 맞죠?”
“대학교 2학년입니다.”
“혹시 심리학과에요?”
“국문학과인데 그건 갑자기 왜요?”
“말도 안 돼. 요즘 국문학과는 심리치료를 주 전공으로 배우는 건 아니죠?”
“설마요. 하지만, 제가 어려서부터 남의 말을 잘 들어주곤 했어요. 아마 그런 것이겠죠.”
아무래도 영업의 신이 믿음과 신뢰를 얻는 능력만 증폭된 게 아닌 모양이었다. 가만히 듣고만 있는데도 수정은 고해성사라도 한 것처럼 어렸을 때 받았던 상처와 아픔들까지 모두 치유 받는 기분이었다.
동하는 이번에 느낀 게 있다면 실생활과 관련된 아이템은 자신이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 능력이 크게 증폭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어릴 때 꿈은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집안에서는 그녀가 경제학과에 들어가서 엘리트코스를 밟고 회사를 물려받길 원했다.
결국 그녀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못하고 회사에서 경영 수업을 받고 있었지만,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한 번도 즐거웠던 적이 없었다.
“나는 사업에 소질이 없어요. 그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긴 한데, 그게 잘 되질 않네요.”
이번 일만 해도 그랬다.
그녀가 협력업체에 핸드폰 판매를 강요한 것은 아버지의 힘이 되어 주고 싶어서 진행했던 것인데, 오히려 그것이 아버지의 발목을 잡을 것만 같았다.
“내 생각이 너무 짧아서 벌어진 일이니 누굴 탓하겠어요.”
수정이 자책하며 고개를 떨궜다.
“흐음.”
동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확실하진 않았지만, 이 당시 다온텔레콤은 여러 가지 악재가 겹쳐 상당히 고전하고 있을 때였다. 여론도 안 좋을 뿐더러 시장 점유율은 점점 더 떨어져서 바닥이 보이지 않을 시기였다.
그래서였다.
이런 분위기가 계속 굳어져서 다온텔레콤은 끝내 만년 꼴찌를 벗어나지 못했다.
‘마케팅부장이 지금 획기적인 연구를 하고 있다고 했지?’
수정은 그 말을 하면서 정말 부러운 지 몇 번이고 입맛을 다셨었다.
하지만, 동하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건 별로 주목받지 못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다온텔레콤의 시장 점유율은 한 번이라도 꼴찌를 벗어난 적이 없는데다 동하는 그런 획기적인 기술이 있었는지도 몰랐으니까 말이다.
‘응?’
그때 동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지금까지 핸드폰 시장은 통화품질이 좌우했다.
하긴, 같은 집에 사는데도 주방에서는 잘 터지던 핸드폰이 안방에 들어가면 안테나가 사라지고 통화권 이탈이 되던 시기였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통화품질은 거의 비슷해지고 서비스 차별화가 대세로 떠오를 터였다.
‘서비스 차별화라…….’
생각할수록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동하는 수정을 향해 말했다.
“우리 혹시 거래해보지 않을래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사실 나는 여기에 다 쓴 잉크와 토너를 가져가려고 왔어요. 한마디로 뭐, 잡상인이죠.”
“풉!”
수정이 동하를 만나고 처음으로 웃었다.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의 입에서 잡상인 소리가 나오자 그렇게 웃길 수가 없었다.
그 순간 호감도가 대폭 상승했다. 이제부터 동하의 말과 행동에 더욱 믿음과 신뢰가 높아질 것이었다.
“미, 미안해요. 동하 씨를 비웃으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후후! 알고 있어요.”
“그나저나 다 쓴 잉크와 토너는 그냥 버리는 건데 그걸 가져다가 어디에다 쓰려고요?”
“쓰레기도 돈이 될 수 있는 법이죠. 아무튼, 아까 한 달 안으로 획기적인 아이템이 필요하다고 했죠?”
“예, 그렇게 말했죠.”
“그리고 다온텔레콤의 이미지가 올드하고 보수적이라 젊은 세대들이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고도 했고요.”
수정은 대답하지 않고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내가 수정 씨에게 획기적인 아이템을 줄 수 있어요. 어쩌면 지금 곤경에 처한 수정 씨의 상황을 180도 반전시킬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젊은 세대들에게 어필해서 시장 점유율도 끌어 올릴 수도 있고요.”
동하가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수정을 쳐다보았다.
“어때요? 한 번 거래해보지 않을래요?”
“근데 지금 그게 가능한 일이에요?”
지금 동하에겐 영업의 신이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수정은 선뜻 동하의 말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온텔레콤의 그 어떤 직원도 해결하지 못한 일이었고, 심지어 다온그룹 내에서도 거의 포기한 일이었다.
한데 그걸 동하가 너무 쉽게 얘기하고 있으니 쉽게 믿으려 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
“어차피 잉크와 토너는 버리는 것들이라면서요?”
“그거야 그렇지만…….”
“그렇다면 굳이 손해볼 일도 없는 거 아닌가?”
도대체 저 자신감은 어디에서 오는지 부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수정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손해 보는 일도 아니고 한번 동하 씨 말을 들어보죠.”
“참고로 나는 다온텔레콤에 있는 잉크와 토너만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온전자는 물론이고 다온그룹의 계열사. 그리고 협력업체의 잉크와 토너를 모두 넘겨주는 게 제 조건입니다.”
“세상에. 그 많은 걸 어디다 쓰려고…….”
“나중에 때가 되면 알려줄게요. 아무튼, 할 수 있어요, 없어요?”
“동하씨 말처럼 되기만 하면 뭔들 못해주겠어요?”
영업의 신의 효과가 작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일개 대학생의 말만 듣고 다온그룹 전체의 잉크와 토너를 것을 내주는 건 어려웠다.
“제 아이디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