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첫 번째 필드-01 -->
그날 만물상점에 간 것은 운기행공을 끝내고 난 직후였다.
이번에도 그런 것 같았다.
분명 운기행공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어플에는 하루를 의미하는 1이란 숫자가 있었는데, 운기행공을 끝내고 난 직후 다시 확인을 하자 01:58이란 숫자로 바뀌어 있었다. 아마도 1시간 전부터는 이런 식으로 카운트다운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대략 2분 정도 남은 건가?”
그러는 와중에도 시간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동하는 잠시 학과실을 돌아보았다.
무언가 깜박하고 빠뜨리거나 안 해놓은 일은 없었다.
동하는 혹시 어떻게 될지 몰라서 어제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학과실에서 잠을 잤던 것이다.
오늘은 축제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동하는 오늘 사용할 음식 재료들도 모두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시간이 정확히 00:00이 되는 순간 동하의 눈앞에 공간이 일렁이는 듯 싶더니 온몸이 공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동하는 어느새 새하얀 공간에 있었다.
일전에 한 번 왔던 기억이 있는 곳이었다.
이래서 경험이 중요한 법인가 보다. 예전에는 이 낯선 공간에 많이 놀랍고 당황했었는데, 지금은 나름 여유가 생긴 상태였다.
그때 양쪽 벽에서 붉은 빛이 쏟아져 나오며 동하의 몸을 스캔했다.
이번에도 예전과 똑같은 절차가 진행 되었다.
띠링!
-테스터 인증 완료.
그와 동시에 하얀색 벽에 동하의 상태가 떴다.
한글이 아닌데도 동하는 그 뜻을 자연스럽게 이해했다.
종족: 무림
단계: 비기너
순위: 250,000명 중 250,000등
여기까지는 동하도 한 번 본 적이 있는 문구였다.
한데, 지금은 가장 하단에 새로운 문구 하나가 추가되어 있었다.
[VVIP: 상위 0.01-0.02%. VIP: 상위 0.021-0.2%.]
“이게 뭐야?”
언뜻 떠오른 건 만물상점 회원 승급에 관한 내용인 것 같았다.
하긴, 필드를 다녀오면 포인트가 생기고 그것으로 만물상점을 이용할 수 있다고 했으니 대충 맞는 것 같았다.
“VVIP는 최대 상위 50명까지고, VIP는 최대 상위 500명까지군.”
이제 겨우 비기너인 동하에겐 까마득한 숫자였다.
동하는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든다 싶었더니 백화점과 비슷한 구조였다.
백화점도 VIP와 VVIP 고객들에게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지 않던가?
하긴, 만물상점이니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만물상점 역시 VIP와 VVIP고객에게 특별한 혜택을 제공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VIP가 되고 VVIP가 될 수 있는지 적혀 있지 않았다. 백화점의 경우엔 돈을 가장 많이 쓰는 고객이면 누구나 VIP가 되고 VVIP도 될 수 있지만, 만물상점은 왠지 그런 단순한 구조 같지는 않았다.
필드 때문이었다.
띠링!
-필드 1관을 개방합니다.
또 다시 공간이 일렁거린다고 느낀 순간 동하는 동굴 안에 서 있었다. 동굴이 시작되는 지점인지 눈앞으로 통로가 길게 펼쳐져 있는 반면 동하의 등 뒤에는 동굴의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원래라면 출입문이 있거나 동굴 입구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겪어본 바에 따르면 이쪽 세계는 문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음침하고 스산한 기운이 느껴진다.
동굴 양 옆으로 횃불이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동하는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내리는 것만 같았다.
띠링!
-본인의 능력으로 출구를 찾아 나오세요. 시간제한은 7일입니다. 실패 시 멤버십 카드 회수 및 접속을 차단합니다.
“으음.”
동하는 접속 차단이란 말에 표정이 급격하게 무거워졌다.
만물상점의 위력을 제대로 체험한 동하였다.
이곳에서 마법 아이템을 사서 서클도 만들고 영약도 사서 내공을 높여나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활관에서 파는 물건들을 활용해 돈을 벌 생각도 하고 있었다.
때문에 지금 동하에게 접속 차단만큼 무서운 말도 없었다.
동하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괴음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나 괴음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설마 이게 끝?”
하다못해 녹슨 단검 하나 지급되지 않았다.
결국 맨손으로 싸우라는 소리였다.
그제야 동하는 접속 차단이란 말에 정작 본인의 능력이란 말을 흘려들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어쩌면 이게 더 중요한 뜻을 포함하고 있는지 몰랐다.
동하는 무림 종족으로 인증이 되지 않았던가?
그렇다는 건 무공을 사용해서 동굴을 헤쳐 나오라는 뜻일 터였다.
“끙!”
처음부터 뭔가 꼬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동하는 무공 초식을 펼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장풍을 사용하는 방법도 며칠 전 전철 안에서 알아냈을 정도였다.
☆ ☆ ☆
조심조심!
동하는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동굴 안이라 작은 발자국 소리도 크게 울리기 마련이다.
‘만사불여튼튼’이라고 했다.
단순히 동굴을 빠져나오는 데 7일씩이나 걸릴 리 없다.
게다가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고 보면 동굴 안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하지만, 5분 정도 걸었는데도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그저 길게 펼쳐진 동굴의 통로만 계속될 뿐이었다.
동하는 혹시 자신이 너무 깊게 생각하고 조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려는 찰나였다.
문득 콩콩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하는 급히 자세를 낮추었다.
긴장감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이건 며칠 전 김일택과 싸울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콩콩 거리는 소리가 이상하게 신경을 거슬리고 있었다. 동굴의 음산한 분위기와 맞물려 동하의 공포심을 높여주고 있었다.
동하는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는 두려움을 떨쳐냈다.
그리고는 살금살금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 동하가 믿을 건 장풍 밖에 없었다. 그는 은밀하게 다가가 기습적으로 장풍을 펼쳐서 적을 쓰러뜨릴 생각이었다.
치사하게 여기질 수도 있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무조건 빠져나가고 볼 일이었다. 예의 차리다 잘못되면 결국 동하만 손해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상대를 확인하고 난 다음에는 아예 들지도 않았다.
‘가, 강시?’
형체만 보면 사람의 형상이 맞았다.
하지만, 두 팔을 앞으로 쭉 내밀고 콩콩 뛰는 모습은 영락없이 강시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강시라니.
무림 종족으로 인증을 받았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다른 종족으로 인증을 받았다면 어쩌면 좀비가 나왔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자, 잠깐! 좀비라고?’
동하는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몬스터들의 2차 침공 때 좀비가 있었다.
중국 등 몇 개 나라에서는 좀비 대신 강시였다는 기억도 떠올랐다.
우연의 일치라고 치부하기에는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동하는 필드를 만들고 만물상점을 운영하는 주최자가 누구인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만물상점의 화려함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었다.
사실 9성급 S몬의 능력이 전이되어 몬스터화 된 동하였다.
그리고 애초부터 베타테스트란 어플 역시도 9성급 S몬의 영향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는 건 만물상점은 지구를 침공한 몬스터와 관련이 있다는 뜻이었다.
‘도대체 이 필드는 뭐고 만물상점은 또 뭐지?’
그리고 자신이 여기에서 무엇을 하는 것인지도 의문이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마냥 좋아 보이던 만물상점도 이젠 그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동하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강시가 대기 중에 흐르던 공기에서 신선한 냄새를 느끼고는 동하가 숨어 있는 곳을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아차!”
의문은 일단 접었다.
눈앞의 강시부터 처리하는 게 먼저였다.
동하는 재빨리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순간 단전에서 뜨거운 기운이 일렁이더니 팔을 타고 손바닥으로 강렬한 기운이 빠져 나갔다.
쇄애애액!
한 줄기 바람이 날아가 강시를 덮쳤다.
쾅!
강시가 저 멀리 나가 떨어졌다.
강한 충격 때문에 얼굴이 뒤로 돌아가 있었다.
정상적이라면 당연히 죽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강시가 벌떡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뒤로 돌아갔던 고개가 그그극 소리를 내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강시의 눈빛이 흉포하게 변해 있었다.
‘으음. 저 모습도 2차 침공했던 강시의 정보와 비슷한데?’
동하는 이전 생애에서 몬스터와 싸운 적은 없었다.
그는 능력자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몸이 멀쩡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뉴스 기사 등을 통해 어느 정도 몬스터들의 정보는 알고 있었다.
강시는 좀비와 마찬가지로 언데드 계열이었다.
목이 잘리지 않는 이상 죽지 않는다.
더구나 좀비와는 다르게 행동이 민첩하고 손톱 사이에 독이 있어서 살짝 긁히기만 해도 중독이 되어 죽을 수도 있었다.
‘혹시 저 강시도 목을 잘라야 죽는 건가?’
그르르릉!
강시가 동하를 향해 괴성을 지르며 폴짝 뛰어 올랐다.
“이런, 미친!”
동하의 두 눈이 크게 치떠졌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놈의 발끝에서 경공이 펼쳐졌던 것이다.
쇄애애액!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동하와 거리가 좁힌 강시는 동하를 향해 길게 자란 손톱을 그어갔다. 날카로운 보검이 따로 없었다.
동하는 뒤늦게 장풍을 날렸지만, 그보다 강시의 손톱이 먼저 동하의 가슴에 닿았다.
까앙!
어이없게도 둔탁한 쇳소리가 튀어나왔다.
동하의 상의만 길게 찢어졌을 뿐, 피부는 멀쩡했다.
괴수 종족의 불사지체가 일종의 방어막이 되어준 덕분이었다.
여기에 요즘 꾸준하게 웨이트트레이닝을 하며 단련한 근육 운동도 무시할 수 없었다.
비록 그 능력이 3% 밖에 되지 않지만, 강시의 능력치도 하급에 속하는 것이기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동하도 그것을 깨닫고 기운이 솟구쳤다.
그에게는 인증되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 능력들이 숨어 있는 것이다.
“좋아, 그렇단 말이지?”
이번엔 동하가 먼저 달려들었다.
강시가 괴성을 지르며 두 팔을 그어 왔다.
동하는 망설이지 않고 왼쪽 팔로 강시의 두 팔을 막았다. 비록 아무 장비도 갖추지 않은 적수공권이긴 하지만, 동하의 팔이 방패 역할을 대신하기에 충분했다.
까앙!
이번에도 쇳소리가 튀어 나왔다.
동하는 왼쪽 팔이 방패 역할을 충분하게 소화하자 다음은 오른쪽 팔을 움직였다.
퍽!
강시의 목이 두 동강 나며 바닥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