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서유경-03 -->
10분이란 시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내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먼저 갤럭시엔터테인먼트의 우수한 시스템을 설명해 주는 한편 서유경을 연기자로 만들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만약 사내가 자기 PR부터 했다면 역효과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자기가 누굴 발굴했고, 누굴 키웠는지는 전혀 검증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나 사내는 갤럭시엔터테인먼트의 시스템을 먼저 설명했다. 그것이 묘하게 신뢰감을 높여 주었다.
“일단 광고로 얼굴을 조금씩 알린 다음 단역으로 TV에 몇 번 출연해서 연기를 하다보면 1년 안에 최고의 배우로 올라설 수 있을 겁니다.”
사내는 확실한 비전도 제시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죠? 연예계가 그리 쉬운 게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요.”
“후후! 유경 씨 정도의 미모와 학력이라면 충분합니다. 한국대학교에 다니신다고 하셨죠? 최고의 학벌과 최고의 미모라면 대중들의 관심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하죠. 이건 무조건 성공합니다. 만약 1년 안에 유경 씨가 최고의 배우가 되지 못한다면 그건 저희 회사의 능력이 부족한 것이겠죠.”
“이제 10분이 지났네요.”
“핫핫! 그렇군요. 끝까지 이야기 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내는 호탕하게 웃었다.
유경은 처음 가졌던 경계심을 완전히 버렸다. 설마 이렇게까지 젊잖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을 사기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저희 갤럭시엔터테인먼트는 유경 씨를 최고의 연기자로 만들 수 있습니다. 제가 물심양면 유경 씨를 서포트 할 테니 믿고 맡겨 주십시오.”
“흐음.”
확신에 찬 사내의 말에 유경은 잠시 고민했다.
연예인이 되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던 유경이었다.
더구나 집안이 상당히 엄해서 부모님들이 허락을 해줄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처음 사내가 명함을 건네주었을 때와 비교하면 그녀의 태도는 약간 바뀐 상태였다. 호기심이 들었던 것이다.
사내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유경 씨, 그럼, 이건 어떻겠습니까?”
“뭘요?”
“일단 저희 회사를 둘러보시고 결정을 내리세요.”
“구경할 수도 있나요?”
“핫핫! 그거야 당연하죠……. 마침 여기서 회사까지 그리 멀지 않으니 지금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내가 이렇게까지 부탁을 하니 유경도 계속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좋아요. 그럼, 잠시 구경만 하고 오는 걸로 할게요.”
“유경 씨 편하실 대로 하십시오.”
유경은 이곳에서 약속이 있었는데, 다음에 보자는 문자를 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보며 사내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흐흐, 이제 끝났어.’
☆ ☆ ☆
동하는 혀를 내둘렀다.
자신에게 글자가 보이는 능력만 없었다면 동하 역시 사내의 말을 철썩 같이 믿었을 정도로 사내의 화술은 대단했다.
선하가 그랬다.
그녀는 사내가 정말 갤럭시엔터테인먼트 실장인 줄 알고 마냥 부러운 표정으로 유경을 쳐다보았다.
“선배님, 저 언니 지금 길거리 캐스팅 받은 거죠?”
“나는 잘 모르겠는데.”
“아마 그럴 거예요. 요즘 길거리 캐스팅 받고 연기자나 아이돌로 데뷔하는 사람들 많다고 하잖아요. 저 언니는 어지간한 여배우보다 아름다우니까 정말 1년 안에 스타가 될지도 몰라요.”
“글쎄. 꼭 그렇지만도 않을 걸?”
“뭐가요?”
“저 인간 인상을 보면 딱 사기꾼이다.”
“선배님, 관상 보실 줄 아세요?”
“흐음.”
동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처음에는 남의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수수방관 했지만, 아마 서유경이 이대로 사내를 따라 나서면 십중팔구 덫에 걸려 인생을 망칠 게 뻔했다. 서유경이 잘못될 걸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 한다면 그건 비겁함을 넘어 사내와 똑같은 인간이 되는 꼴이었다.
‘그래, 최동하! 적어도 이전 생애서처럼 쓰레기같이 살지는 말자.’
마음을 굳힌 동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선하도 따라 일어섰다. 마침 서유경도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선배님, 이제 학교로 돌아가시게요?”
“잠깐 볼 일이 있다. 금방 끝나니까 너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선배님, 어디 가시려고요?”
동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는 선하를 뒤로 하고 서유경에게 다가갔다.
☆ ☆ ☆
“여기서 혜주라는 친구와 만나기로 하셨죠?”
“누구시죠?”
유경이 의아한 표정으로 동하를 쳐다보았다.
“그럼, 그냥 혜주나 만나세요. 요즘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딸랑 명함 한 장 받고 따라 나섭니까?”
아까 서유경이 혜주에게 문자를 보낼 때 알게된 사실이었다.
“이봐요? 그쪽이 혜주하고 어떤 관계이신지 모르지만, 초면에 너무 주제 넘는다고 생각하지…….”
“내가 저 사람 좀 아는데, 저 인간 사기꾼입니다.”
“뭐, 뭐라고요?”
유경이 놀란 표정으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어느새 사내에 대한 경계심이 떠올라 있었다.
‘으으. 이놈이 나를 어떻게 안 거지?’
사내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가 지금 가장 꺼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경찰과 피해자 가족들이었다.
하나 동하가 경찰이었다면 신분증을 보여 주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동안 자신에게 사기를 당한 여자들의 가족이라고 하기에도 뭔가 이상했다.
피해자의 가족이라면 처음 자신을 봤을 때부터 멱살을 잡거나 달려들었어야 정상이기 때문이었다.
‘경찰도 아니고 피해자 가족도 아니야.’
사내는 어느새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러자 슬금슬금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다 된 밥이었다. 이제 커피숍만 나가면 유경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는데, 하필이면 겨우 2,3초 정도를 남겨두고 동하가 태클을 걸었으니 오죽할까.
“이봐, 학생! 초면에 말이 너무 심하군. 어린 학생 같아서 한 번은 그냥 넘어가주지만, 또 다시 쓸데없는 소릴 하면 그땐 명예훼손으로 고발하는 수가 있어.”
“그럼 고발하면 되겠네.”
“뭐야?”
동하는 팔짱을 끼고 비릿하게 조소를 흘렸다.
어디 고발을 할 테면 하라는 뜻이었다.
“후후! 막상 경찰에 고발을 하려니 그건 못하겠지?”
“헛헛!”
사내는 황당한 표정으로 웃었지만, 속으로는 신음성을 삼켰다.
‘이놈이 무얼 믿고 이리 당당한 거지?’
하지만, 그는 결코 애송이가 아니었다.
이 당혹스러운 상황에서도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고 있었다.
“당신 본명이 우승하 맞지?”
“그렇긴 한데 어린 학생이 아까부터 계속 말이 좀 짧군.”
“근데 좀 이상하네. 주민등록증에는 김일택이라 되어 있는데 왜 명함하고 이름이 틀릴까?”
흠칫!
사내가 예상치 못한 말에 주춤 거렸다.
그는 하마터면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가져갈 뻔했다.
“핫핫! 재미있는 학생이군. 무슨 근거로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건가?”
“쯧쯧, 내가 관상을 좀 보는데 어디 보자……. 67년생이시군. 지금 사는 곳은 경기도 군포이고 본적은 강원도네?”
주민등록증 앞뒷면에 적혀 있는 주소가 달라서 혹시나 싶어 말한 것뿐인데 김일택의 눈이 크게 치떠졌다. 본적이 맞는 것 같았다.
“너, 너 누구야?”
해서는 안 될 말이 튀어 나왔다.
애송이나 하는 실수였지만, 그만큼 김일택은 당황했단 뜻이었다.
“아마 오른쪽 주머니에 명함이 몇 개 더 있을 걸? 모두 연예기획사 명함 같아 보이는데 회사 이름이 모두 다르네?”
“으으.”
이젠 소름이 돋으려고 했다.
이건 관상이 아니라 아예 작두를 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상황이 이쯤 되자 유경도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의혹어린 시선으로 김일택을 쳐다보았다.
“해명을 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제길!”
김일택은 이제 모든 게 다 끝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카페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여기저기서 경악어린 탄성이 쏟아진 것도 언뜻언뜻 들려오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어쩌면 누군가 경찰에 신고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대로 도망치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의 정체를 폭로한 동하만큼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이 새끼! 죽여 버리겠다.”
휘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김일택의 주먹이 동하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비록 여자를 등쳐먹는 사기꾼이었지만, 고등학교 때까지 권투를 배운 김일택이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선수로 뛴 적도 있었다. 지금까지 싸워서 누군가에게 맞고 산 적이 없었기에 이 주먹 한 방으로 동하의 얼굴을 충분히 짓이겨 버릴 줄 알았다.
하지만, 이게 웬걸?
동하의 움직임이 김일택보다 더 빨랐다.
단전에 공력이 생기고 싸움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겨우 1성의 공력이라 그 위력이 어떨까 싶었는데 거칠고 빠른 김일택의 주먹이 굼뜨게 날아오고 있었다.
동하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동하는 즉시 팔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손바닥을 펴서 김일택의 주먹을 붙잡았다.
탁!
둔탁한 음성이 카페 안을 진동했다.
“윽!”
김일택의 얼굴이 붉어졌다.
동하에게 붙잡힌 주먹이 으스러질 것처럼 아파왔다.
그렇다고 주먹을 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그의 팔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 반해 동하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치고 있었다.
동하의 악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가 손에 살짝 힘을 더하자 김일택은 당장이라도 주먹이 으스러질 것 같았다.
“으아악! 이 새끼 당장 손 안 놔?”
김일택이 이를 갈아 붙이고 반대쪽 팔을 휘둘렀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잭나이프가 들려져 있었다.
카페에 있던 손님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옆에서 지켜보던 유경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선하의 두 눈에는 공포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동하에겐 너무 굼떠 보였다.
동하가 꽉 움켜쥐고 있던 팔을 뒤로 슬쩍 잡아 당겼다.
순간 김일택의 자세가 무너지고 휘청거리며 날아오던 주먹이 허공에서 허우적 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동하가 잡고 있던 팔에 힘을 주고 힘차게 돌렸다.
팽그르르!
“컥!”
김일택의 몸이 허공에서 몇 바퀴를 구르더니 바닥에 쿵 하고 패대기쳐졌다.
숨이 막힐 것 같은 통증이 몰려왔다. 바닥에 머리를 부딪친 것인지 정신이 아찔했다.
그때 동하가 그의 가슴을 발로 짓밟았다.
“한 번만 더 까불면 그땐 정말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