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서유경-02 -->
캠퍼스는 축제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오늘부터 축제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인근에 사는 동네 사람들은 물론이고 교복을 입은 여고생들의 모습도 보였다.
여고생들의 경우는 오늘 저녁에 벌어질 가수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 찾아온 것이 틀림없었다.
주점과 부스는 학생회관과 인영호라는 연못 사이에 길게 펼쳐져 있었다.
이쪽으로 가로수길이 조성이 되어 있어서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도 시원한 그늘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동하는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었다.
식품영양학과의 부스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다.
전통의 강자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 반해 다른 주점이나 부스들은 한산한 분위기였다.
오직 술과 안주만 파는 주점들은 저녁이 되기만을 바라고 있으니 별 문제될 건 없었다.
하지만, 밥이나 간식류 등 음식을 파는 부스들은 낮에 팔지 못하면 밤에는 더 경쟁력이 떨어진다. 때문에 한 명이라도 더 손님을 유치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공대는 공대 특유의 기술을 살려 부스를 화려하게 꾸며 놓았고, 산업디자인학과는 아름다운 그림과 조각들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려고 했다.
“이거 남의 일이 아닌데?”
한산한 주점과 부스들의 모습에 동하도 살짝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워낙 오래된 일이라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아도 음식을 파는 부스들이 저렇게까지 사람들이 없진 않았었다.
국문학과의 주점은 가장 안쪽에 있었다.
동하가 모습을 드러내자 동기들은 물론이고 후배들까지 난리도 아니었다.
“최동하, 이 웬수야? 지금 오면 어떡하냐?”
“선배님, 큰일 났어요. 우리 어쩌면 좋아요?”
“다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네 눈엔 지금 저게 안 보이냐?”
주문을 하려고 길게 늘어선 줄.
그리고 빈자리 하나 찾을 수 없는 테이블.
한마디로 대박이었다.
사람들의 반응이 가히 폭발적이었다.
한쪽에서는 쉴 새 없이 김치말이 국수를 만들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몇 명이 달라붙어 또띠아 피자를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끊임없이 스파게티를 만들고 있었는데도 도저히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동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장사가 잘 되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선하가 한창 또띠아 피자를 만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이것으로 선하가 자살할 일은 완전히 사라진 셈.
동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근데 동하야, 재료가 벌써 다 떨어졌다.”
“진짜?”
냉면 육수는 200인분 정도로 내일까지 사용할 생각으로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맛있다고 한마디씩 하고 가더라.”
“오늘은 여기까지만 팔고 주점으로 넘어간다 해도 내일부터는 어떡하지?”
작년까지 7년 연속 축제 브레이커라고 놀림을 받던 국문학과가 이런 걱정을 하게 될 줄이야.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동기들이 크게 들 뜬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동안 국문학과를 놀려댔던 학과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줄 절호의 기회였다.
동기들은 즉시 이 영광을 3, 4학년 선배들에게 알렸다.
그것도 부족해서 졸업생 선배들에게도 연락을 해서 상황을 전해주었다.
“저녁에 선배님들도 오기로 했다.”
연락을 받자마자 바로 달려오는 것을 보면 그동안 다른 학과에 놀림 받았던 것이 어지간히 쌓여 있었던 모양이었다.
☆ ☆ ☆
학교 근처에는 대형 마트가 없었다.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을 가서 내일 사용할 식재료를 사와야 하는데, 혼자 들고 오기에는 양이 좀 많았다.
동하는 옆에서 보조해줄 사람으로 선하를 지목했다.
동기들 중에서는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래도 하루 종일 서서 음식을 만들려니 중노동도 이런 중노동이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장사가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계속 밀려들다 보니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하지만, 선하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저번 주에 과실에 찾아가 동하에게 대놓고 항명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기 때문이었다.
“저……. 선배님?”
“왜?”
“고, 고맙습니다.”
“뭐가?”
“그, 그냥 전부 다요.”
처음에는 마음이 불편해서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동하에 대한 안 좋은 소문도 많이 들어서 괜히 무서운 생각도 들었다. 동하의 성격에 언제 보복을 해와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나 동하는 그때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딱히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나이트클럽 콘셉트를 과감히 버리고 대신 건전한 음식으로 바꾸어 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물어볼게 있는데. 혹시 너희 집에 요즘 우환이 있거나 그런 거 있냐?”
“예? 아, 아니요. 그런 거 없는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건지…….”
“없으면 됐다.”
동하는 이제 마음의 부담을 모두 털어버릴 수 있었다.
사실 이거 물어보려고 일부러 선하를 대동하고 왔던 것이다.
쇼핑은 속전속결이었다. 내일 사용할 식재료만 샀는데도 동하의 양 손은 물론 선하의 손에도 커다란 마트 봉투가 들려져 있었다.
선하의 봉투에는 그리 많은 물건이 담겨져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꽤 무거워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동하는 혀를 찼다.
대신 들어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그럼 선하를 데려온 이유가 없었다.
“잠깐 커피 한잔 하고 가자.”
“저, 저는 괜찮아요. 선배님!”
“잠자코 따라오기나 해, 인마! 지금 학교 들어가면 또 음식 만들어야 하잖아?”
동하가 성큼 발걸음을 옮기자 선하도 주춤거리며 따라 나섰다.
사실 그녀는 지금 더위를 먹기 일보직전이었다.
‘평소와는 많이 다르네.’
도저히 개진상 최동하의 모습이 연상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툴툴거리며 하는 말속에 은근히 선하를 배려해 주고 있었다.
☆ ☆ ☆
커피숍 안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동하와 선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여자 손님들이 힐끔 거리며 동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선하는 그동안 잔뜩 긴장하고 있어서 제대로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까 동하의 모습이 모델처럼 멋있었다.
“선배님, 저번 주만 해도 약간 통통하신 편 아니었나요?”
“살 좀 뺐다.”
“그, 그게 가능해요?”
선하의 눈빛이 달라졌다.
요즘 은근히 똥배가 나와서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선배님, 단시간 안에 살 빼신 비결이 뭐에요? 좀 알려 주세요.”
“흐음. 비결이야 간단하지. 일단 너도 회귀를 해. 그리고 9성급 몬스터의 능력을 받아서 열심히 무공을 수련하면 돼.”
“풉!”
선하가 마시고 있던 아메리카노를 뿜고 말았다.
“야아, 더럽게 지금 뭐하는 거냐?”
“히잉! 선배님이 갑자기 웃기시니까 그렇죠.”
선하도 이제는 동하가 많이 편해졌는지 스스럼없이 말대꾸를 했다.
이게 바로 농담의 위력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양복 차림의 30대 남자가 동하의 맞은편에 앉은 여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으면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여인은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고 있던 중이었다.
그녀는 명함을 건네받고 이어폰을 뺐다.
“무슨 일이시죠?”
파란색 스트라이프 원피스를 입고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아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눈이 번쩍 떠질 만한 미인이었다.
별다른 화장을 하지 않은 것 같았는데 피부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는 청순해 보였지만, 가슴이 상당히 풍만해서 섹시한 느낌도 들었다.
동하는 이내 관심을 끄고 시선을 돌렸다.
이전 생애에서라면 술과 여자 그리고 노는 것 말고는 관심 있는 것이 없었다. 당연히 저런 미인을 보면 눈길부터 음흉하게 변했다. 아마 은밀한 눈길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고 어떻게 작업할까 고민했을 것이었다.
하나 지금은 철이 들었다고나 할까?
돈을 버는 일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 갖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이전 생애에서 사고를 당하고 불구의 몸으로 14년 이상을 살아야만 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동하는 14년 넘게 연애는커녕 여자들의 시선 한 번 받지 못했기에 연애에 굶주려 있긴 했다.
‘아서라. 지금이 연애할 때냐?’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동하의 눈앞으로 여인과 양복을 입은 사내의 정보가 촤르륵 밀려 들어왔다.
‘서유경?’
그것이 여인의 이름이었다.
그녀의 가방에는 지갑이 있었고, 그 안에는 학생증이 있었다.
‘한국대학교 경영학과라…… 나이는 나 보다 한 살이 많네?’
동하는 원치 않았지만, 서유경의 신상을 알게 되었다.
한국대면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교였다. 그것도 경영학과라면 상위권 학과인 만큼 전국 1%에 들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문제는 양복을 입은 사내의 정보였다.
그가 서유경에게 건네준 명함에는 갤럭시엔터테인먼트라고 적혀 있었다.
한국에서 갤럭시엔터테인먼트를 모르면 간첩일 정도로 굉장히 유명한 기획사였다. 처음은 아이돌로 시작해서 지금은 연기와 예능까지 발을 넓혀 대한민국의 연예계를 대표하는 곳으로 성장한 상태였다.
명함에는 우승일 실장이라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지갑 속에 있는 주민등록증에는 전혀 다른 이름이 적혀 있었다.
‘혹시 기획사를 사칭한 사기꾼인가?’
동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시사에 관심이 없는 동하라 해도 기획사를 사칭해서 여인들을 성폭행 하고 금전을 갈취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
한편, 사내는 유경을 열심히 설득하는 중이었다.
“저희 회사는 한 번쯤 들어보셨죠?”
“그렇긴 한데 그건 왜 묻는 거죠?”
“핫핫! 그렇게 경계하실 필요 없습니다. 작업을 걸려는 것이 아니라 혹시 연기해 보실 생각이 없는지 궁금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연기요?”
“저희 기획사는 연기, 노래, 그리고 예능. 이렇게 세 개의 파트로 나뉘는데 저는 그중에서 연기 쪽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죄송한데요, 저는 그런 쪽엔 관심 없어요.”
“잠깐만요. 일단 제 얘기를 한 번 들어보시고 그때 가서 결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정말 관심 없다니까 자꾸 왜 이러세요?”
“그럼, 딱 10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으음. 알았어요, 그럼 딱 10분이에요.”
유경의 말에 사내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다들 처음엔 관심이 없다고 말을 해도 막상 이야기를 듣고 나면 조금이라도 관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특히 여자들은 낯선 남자를 경계한다.
때문에 비록 10분이라 해도 일단 대화를 한다는 건 어느 정도 경계심을 풀었다는 뜻이었다.
'흐흐, 작업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