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만물상점-4화 (4/167)

<-- 4화 : 첫 번째 각성 -->

동하는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벌써 캠퍼스를 몇 번이나 돌았는지 몰랐다.

구관과 신관 그리고 본관까지 상당히 넓었지만, 피곤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모든 것이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심지어 캠퍼스에 학교 축제와 관련해서 현수막이 걸려 있었는데, 그곳에는 17년 전의 날짜가 적혀 있었다.

동하는 현수막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가 떴지만, 현수막에 적혀 있는 날짜가 달라지거나 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확인을 했으니 믿기 힘들어도 이제는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17년 전 과거로 회귀한 것이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사람이 과거로 돌아간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몇 번을 생각해도 대답은 하나였다.

불가능!

그러니 사람이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17년 전의 모습들 그대로였고, 그렇다고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현상인지 몰랐다.

그때였다.

“야, 최동하! 거기서 멍 때리고 뭐해?”

“어?”

“나 참. 뭘 그리 놀라냐? 누가 보면 내가 꼭 너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줄 오해하겠다.”

키가 작고 얼굴에 제법 살집이 있는 녀석이 실실 웃으며 다가왔다.

낯이 익은 얼굴이었지만, 당장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무려 17년 전의 일이었다. 더구나 동하의 기억력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생각이 날 듯 하면서도 떠오르지 않았다.

바로 그때 난데없이 그의 눈앞에 하얀 물체들이 둥실 둥실 떠다니기 시작했다.

‘응?’

글자들이었다.

주민등록증

윤상덕

790718-114****

서울특별시 마포구…….

그건 바로 윤상덕이 소지하고 있는, 뒷주머니 속 지갑에 들어있는 주민등록증이었다.

동하도 어렴풋이 그걸 느끼고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유, 윤상덕?”

“뭐야, 유치하게! 그럼 내가 윤상덕이지 김상덕이냐?”

헉?

진짜였다.

그것으로 동하는 자신의 눈앞에 떠다니고 있는 글자들이 정말로 윤상덕의 주민등록증이라는 것을 깨닫고 경악했다.

“그, 그래 윤상덕. 네가 윤상덕이었지?”

그제야 모든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이 돈을 펑펑 쓸 때는 간이고 쓸개고 모두 빼줄 것처럼 따라다니다 막상 집안이 망한 걸 알고 났을 때는 누구보다 빨리 자신의 뒤통수를 때리고 떠나간 놈.

같은 국문학과 동기였지만 앞으로 절대 친하게 지낼 필요가 없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 이거 뭐야?”

동하는 두 눈을 비벼 보았다.

하지만, 하얀 글자들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윤상덕이 지갑 속에 넣어둔 지폐의 숫자가 눈앞에 둥실 떠다니는 것은 물론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 안에 들어 있는 책들의 제목과 내용들이 쉴 새 없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글자들이 너무 많다 보니 나중에는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동하는 모기를 쫓듯 두 팔을 내저어 글자들을 없애려 했지만, 막상 손에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윤상덕이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 지금 뭐하는 건데?”

“응?”

“거기에 뭐 있어?”

윤상덕이 괴상한 표정으로 동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이거!”

동하가 여전히 자신의 눈앞에 떠다니는 글자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거 뭐?”

“이것들 안 보여?”

“그러니까 뭐가?”

윤상덕의 눈에는 먼지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동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도 두둥실 떠다니고 있는 글자들이 자신의 눈에만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마 글자 어쩌고 얘기하면 미친놈 소리 들을 게 뻔했다.

☆ ☆ ☆

‘아!’

그러고 보니 아까 과실에서 선하 등 세 명의 신입생 여학생들과 만났을 때도 이랬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는 워낙 정신이 없었던 지라 미처 이런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을 뿐이었다.

‘나는 그게 지옥의 형벌을 받는 중이라고만 생각했었지.’

어이가 없는 생각이었지만, 당시 동하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동하는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멀쩡한 사람도 이런 상황에서는 제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것이었다.

하물며 동하는 S몬과 함께 죽었던 기억이 너무도 생생한데 17년 전 과거로 돌아온 것도 부족해서 이젠 헛것이 보이고 있었다.

분명 미쳤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눈앞에 떠다니는 글자로 윤상덕의 이름을 맞히지 않았던가?

동하는 좀 더 자세히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마음을 최대한 진정시킨 다음 입을 열었다.

“상덕아, 너 요즘 수학 과외 하니?”

“어, 어떻게 알았어?”

“거기 수학의 정석 책이 보이는데?”

동하가 턱짓으로 상덕의 가방을 가리켰다.

한때 고등학생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본 기억이 있는 수학의 정석.

당시에는 과외를 하면 대부분 <수학의 정석>이란 책으로 교재를 삼곤 했다.

“설마! 그게 보인다고?”

황급히 가방을 살펴보았지만, 지퍼는 열려 있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찢어지거나 구멍이 나 있지도 않았다.

상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내가 과외를 한다고 얘기 했었나?”

책이 보였다는 동하의 말은 믿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과외 한다고 말한 적이 없어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하아! 지, 진짜네!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니었어.’

이젠 두려움이 일 정도였다.

한마디로 멘붕이었다.

상덕의 가방에 몇 권의 책이 더 있었다.

동하는 다시 한 번 시험을 해볼까 했지만, 그러다 괜히 의심만 살까 싶어 그만 두었다.

이것으로 한 가지는 확실해진 셈이었다.

그는 어떤 이유로 17년 전 과거로 돌아왔고, 눈앞에 글자들이 둥실 떠다니는 괴상한 능력을 갖게 되었다.

‘능력이라…….’

어찌 보면 별로 시답지 않은 능력이라 할 수도 있지만, 주민등록증만 가지고 있다면 생판 모르는 사람들의 이름과 주소를 알 수 있을 것이고, 점쟁이 흉내는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동하는 이것이 9성급 S몬의 능력 중에서 가장 하찮은 것이라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나저나 차는 다 수리했냐?”

“차? 무슨 차?”

“니 애마! 고장 나서 수리한다고 카센터에 맡겨 놓았다고 했잖아.”

상덕은 뭔가 의심쩍은 표정으로 동하를 쳐다보며 물었다.

허세 작렬 최동하가 차를 못 타고 다닌 지 벌써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나름 이해하려 했었다.

동하의 애마는 BMW 3시리즈였다.

외제차는 부품을 전량 수입해서 수리하기 때문에 국산차 보다 수리 기간이 오래 걸린다.

하나 아무리 외제차라도 그렇지 수리기간이 한 달 넘게 걸린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 때문에 동하네 집이 망한 게 아니냐는 소문이 조금씩 퍼지고 있었고, 상덕은 예전부터 재수 없게 생각하던 동하의 꼬투리를 잡기 위해 집요하게 파고들 생각이었다.

동하는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지금 이맘때쯤이면 아버지인 성진의 회사가 부도가 나서 모든 재산이 차압당한 상태였다.

이전 생애에서는 집안이 망했다는 것이 알려지는 게 쪽팔려서 그냥 카센터에 맡겨 놓았다고 둘러 댔었다. 하지만, 나중에 차압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온갖 창피와 망신을 다 당했었고, 동하는 그걸 견디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 두었었다.

‘축제가 끝나기 직전에 벌어졌으니까 며칠 남지 않았구나!’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열성적으로 퍼뜨리고 다닌 놈이 윤상덕이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집안이 망한 게 그리 쪽팔린 일은 아니었다.

까짓 거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그에겐 건강한 몸이 있었다.

이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동하는 다리 불구가 되고 얼굴이 망가져 야차처럼 변하고 나서 깨달은 것이 있었다.

자신감 그거 아무것도 아니었다.

누군가는 잘생기고 예쁜 얼굴 덕분에 자신감으로 가득할 수도 있을 테고, 어떤 사람은 돈이 많아서 자신감이 가득할 수도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 자신감 가지고 살긴 어려운 세상이었다.

하나 동하는 건강한 육체에 정상적인 얼굴만 가지고 있어도 충분히 자신감이 생길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돈이 없어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뜻이었다.

이전 생에서는 왜 그리 모든 일을 돈으로만 해결하려 했었는지 몰랐다. 어쩌면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해서일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동하의 외모가 그리 못난 것도 아니었다.

얼굴도 잘생긴 편이었고, 키도 183센티미터가 넘었다.

살이 쪄서 통통한 것이 옥에 티라면 티였지만, 키가 커서 비호감일 정도는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그때는 자신의 장점을 전혀 살리지 못하면서 살았던 것 같았다.

사지육신 멀쩡한 놈이 왜 그리 찌질하게 살았는지 한심한 생각마저 들었다.

동하는 자신의 집안이 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든 말든 이젠 두렵지 않았다.

이전 생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과 친구들이 위로해 준답시고 놀려 대거나 자존심을 긁어대는 말을 했었는데, 몸을 다치고 야차의 모습이 되었을 때와 비교하면 그건 놀림 받는 축에도 끼지 못했다.

‘자, 잠깐! 지금이 17년 전이잖아? 그렇다는 건…….’

동하는 가족들을 떠올렸다.

한심한 놈.

이 중요한 사실을 지금에야 떠올리다니.

아무리 정신적인 충격에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고 해도 이건 아니었다.

동하의 호흡이 갑자기 빨라졌다.

생각만으로도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눈앞에 상덕이 있었지만, 동하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가족들을 다시 볼 수 있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동하는 곧바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상덕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동하를 불렀지만, 동하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