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6
286. 전란의 시대.
286.
본래 역사 BC 58년, 카이사르가 갈리아 정복을 시작했을 즈음 갈리아는 이미 수많은 족속들이 이합집산(離合集散)을 거듭하며 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갈리아족은 말할 것도 없고 켈트족이나 게르만족도 섞여 있었다. 사실 이들을 정확히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용한 일이었다.
어쨌든 이 당시 가장 두각을 보였던 갈리아 족속은 하이두이족과 세콰니족이었는데 세콰니족이 패권을 잡기 위해 게르만 계파인 수에비족에게 도움을 청했고 이에 라인강을 넘어선 수에비족의 도움을 받아 세콰니족이 하이두이족을 필두로 한 갈리아 연합을 쳐부수고 패권을 잡았다.
하나 수에비족은 세콰니족의 공물에 만족하지 않고 아예 세콰니족의 영토에 자리 잡고 갈리아침공을 계획했다. 당연히 이들을 끌어들인 세콰니족도 후회했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이런 상황에서 헬베티족 역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헬베티족은 알프스 산맥과 론강, 로마 속주와 레만누스 호수로 둘러싸였기 때문에 영토를 확장하기도 어려웠고 이들은 수시로 게르만족의 침입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갈리아 내에도 헬베티족 전사의 용맹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에 헬베티족은 자신들의 12개 도시와 400개의 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30만이 넘는 대규모의 전력과 3개월 치 식량을 가지고 갈리아를 침공한다.
역사에서 카이사르가 가장 먼저 맞닥뜨렸던 갈리아 부족은 바로 이 헬베티족이었다.
카이사르는 헬베티족의 론강 도하를 막기 위해 다리를 부숴 저들의 진격을 저지하고 저들과 대립각을 세우다가 본인들의 영토를 침입한 헬베티족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한 하이두이족의 원군요청으로 본격적으로 헬베티족과 전쟁을 시작한다.
여기서 다시 카이사르의 영민함이 드러난다. 단순히 침공이 아니라 원군요청으로 인한 군사행동을 취한 것이다.
어쨌든 카이사르는 이 헬베티족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뒀고 그가 남긴 갈리아 전기에 의하면 36만 명 중 11만 명만 살아남아 도망쳤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게르만족을 밀어낼 것을 요청하는 갈리아족의 원군요청으로 게르만족과 다시 치열한 전투를 치러 저들을 갈리아 지역에서 몰아낸다.
BC 56년, 지금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지역을 거의 점령. 카이사르는 그간 손수 기록한 전쟁 기록, 곧 갈리아 전기를 로마에 보냈는데 객관적인 관점을 유지하되 본인을 은연중 부각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치밀하게 영웅화시켰다.
이에 야심과 능력이 있는 군인들이 카이사르에게 합류했고 이때 합류한 기병 장교 중 하나가 바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였다.
카이사르는 동서 경계를 따라 수많은 부족과 싸우며 계속해서 북진했는데 그는 심지어 갈리아 경계를 넘어 게르마니아나 브리타니아까지 정복군을 보냈다. 로마 역사상 그보다 멀리 진출한 정복자는 없었다.
이에 카이사르는 BC 53년, 무려 39만 제곱킬로미터의 땅을 정복하는데 게르고비아 인근 지역만 남겨두고 있었다.
이때 베르킨게토릭스라는 갈리아의 걸출한 영웅이 나타난다. 본인을 갈리아의 왕이라 지칭한 그는 갈리아인들을 이끌고 적이 사용할만한 모든 물자와 식량을 불태우는 청야전술(淸野戰術)까지 펼치며 카이사르와 대항한다.
본국의 보급이 아니라 갈리아 내의 현지조달을 통해 식량을 충당하고 있던 로마군에게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1년을 버티면 로마를 갈리아 지역에서 물러나게 만들 수 있다고 판단한 베르킨게토릭스는 모든 식량과 물자를 챙겨 알레시아라는 마을로 후퇴한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베르킨게토릭스의 전략을 역이용하여 알레시아 바깥쪽에 거대한 장벽을 세워 6만에 이르는 갈리아족을 가둬버린다. 식량과 물이 부족하기는 갈리아족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에 갈리아인 25만 명이 봉기하여 갈리아의 왕 베르킨게토릭스를 구하고 포위를 부수기 위해 알레시아로 진격한다. 이쯤 되면 후퇴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알레시아 바깥쪽에 2km도 안 되는 폭을 두고 외벽을 더 세운다. 병력이라도 많았다면 모를까 내벽과 외벽을 경계하는 카이사르의 군인은 6만이 전부였다.
갈리아인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내벽의 베르킨게토릭스군과 외벽의 갈리아 지원군이 동시에 카이사르를 향해 진격한다. 먼저 세워진 내벽을 방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급히 만든 외벽은 취약한 부분이 있었기에 갈리아인 역시 취약한 벽을 찾아내고 그곳을 공략했다.
결국 외벽이 뚫렸지만 카이사르는 그 지점에 병력을 보강하고 기병대를 내보내 갈리아 지원군의 후미를 박살내 버린다. 역으로 포위된 상황에 처한 갈리아인은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카이사르는 4일 동안 10만 명이 넘는 갈리아인을 죽이고 승리를 거둔다.
이에 베르킨게토릭스는 항복하고 갈리아 정복이 끝이 난다. 이 당시 카이사르가 물러서지 않았던 점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지금껏 존재하지 않던 갈리아 왕이라는 단일한 통치자가 나왔으니 베르킨게토릭스를 쳐부수면 갈리아 정복을 마무리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섰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카이사르의 승리는 영토를 50만 제곱킬로미터까지 확장시켰고 로마 제국의 큰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
BC 58년 당시만큼 갈리아 내부가 혼란스럽지는 않지만 갈리아인들의 갈등이 한두 해 지속된 것도 아니었기에 BC 74년 갈리아의 상황 역시 혼란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카이사르는 이러한 갈등을 파악하고 전쟁 초기에 갈리아 깊숙한 곳까지 진격한다. 역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카이사르는 로마 본국의 보급에 의존하지 않고 현지 음식과 현지 포도주를 마시며 저들과 3년 동안 치열한 전쟁을 벌였고 놀랍게도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이번에도 카이사르는 손수 작성한 기록을 로마에 전송했고 이에 야심과 능력을 가진 젊은이들은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너나 할 것 없이 카이사르에게 합류한다.
사실 그 부분은 별로 놀라울 것이 없었지만 전쟁 초기부터 키케로가 카이사르와 함께했다는 점은 눈 여겨볼 만한 대목이었다.
카이사르는 1년의 집정관 임기를 마치기 전에 이미 로마에 요청해 갈리아 총독직을 요청했고 후임 콘술의 허가로 인해 바로 이어서 총독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당시 본인의 예상과 달리 승승장구하는 카이사르의 행보를 막고자 크라수스가 나섰지만 이미 콘술에 오를 사람과 원로원 등에 이미 손을 써놓았기에 크라수스도 그 일을 막을 수 없었다.
동방원정 역시 순조롭게 흘러갔다.
미트리다테스 6세의 예상과 달리 갈리아족은 로마에 어떤 악영향도 미칠 수 없었고 역으로 로마가 갈리아를 정복해가자 로마의 위상은 전쟁 전보다 더욱 높아졌다.
기실 이집트 쪽에도 사람을 보내 로마와 싸울 것을 요청했지만 어쩐 일인지 나름 로마에 반감이 깊을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우스는 매우 신중한 태도를 고수하며 상황을 본 연후에 합류하겠다고 소식을 보내왔다.
로마가 승승장구하는 상황에서 이집트가 폰토스와 아르메니아의 움직임에 동조할 이유가 없으니 결국 폰토스는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에게, 아르메니아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게 패배했다.
이에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는 역사와 마찬가지로 자결했고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2세는 로마의 속국을 자처했다.
거창한 승리와 더불어 막대한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온 루쿨루스와 폼페이우스는 나란히 콘술 위에 올라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루쿨루스는 돌연 정계에서 은퇴를 선언하며 호화로운 저택에 칩거했다. 어쩌면 ‘루쿨루스가 루쿨루스를 위한 연회를 여는 날’을 준비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 결과 궁지에 몰린 것은 바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였다. 사실 딱히 궁지에 밀릴 것도 없었다. 돌연 루쿨루스가 호화로운 저택에 칩거하면서 그 영향력을 본인이 흡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계보가 다르긴 하지만 같은 리키니아 명문가 출신 아닌가?
하지만 루쿨루스는 폰토스를, 폼페이우스는 아르메니아를 정복했고 심지어 두 장군의 공적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루쿨루스는 은퇴를 선언했으니 차치하더라도 노예 반란군을 처리한 군공은 폼페이우스가 예전에 세운 군공에 비춰봐도 빛을 잃어버릴 것이다.
심지어 애송이라 생각했던, 그러니까 실패할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한 카이사르마저 갈리아 정복을 차근히 이뤄가고 있었고 연일 카이사르의 이름이 로마에 울려 퍼졌다. 이대로 카이사르가 갈리아 정복에 성공한다면 저 폼페이우스의 군공조차 카이사르 앞에 빛을 바랠 것이다.
그리되면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그 이름 외에는 세인들에게 거론되지 않을 터, 따라서 크라수스는 본인 삶에 있어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군공을 압도할 만한 공적을 세우리라. 폰토스와 아르메니아가 로마의 속국이 되었으니 그것을 토대로 자신은 동방의 강국, 파르티아를 제패하여 크라수스의 이름만이 로마에 울려 퍼지게 만들리라.
결단을 내린 크라수스는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파르티아 정벌을 강행했다. 크라수스는 자신의 막대한 재산과 인맥을 총동원하여 막강한 군세를 형성했고 지체하지 않고 BC 70년 파르티아를 향해 군을 이끌었다.
*
로마에 이런저런 일이 발생하는 동안 테세우스는 카파도니아에 칩거하며 로마인들로부터 서서히 잊히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카파도니아인들은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테세우스가 뭔가 행한 것이 아니다. 그는 카파도니아 왕궁에서 마련해준 호화스럽고 거대한 저택에 칩거하며 자신과 함께 한 병사들과 시간을 보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의 명성이 그토록 높아진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와 함께 카파도니아로 온 병사들 때문이었다.
테세우스는 4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저택에 칩거했지만 포도주나 마시며 어영부영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4년이란 시간을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보냈다. 테세우스는 자신을 끝까지 쫓아온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심하게 가르쳤고 인도산 철을 구해 대장간에서 병사들의 개인 무구까지 완성했다.
무예뿐만이 아니라 전술과 전략에 대한 부분도 아낌없이 가르쳤기에 이들은 병사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장군의 임무를 수행해도 무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테세우스의 명성이 높아진 사건은 너무나 간단했다.
카파도니아에서 가장 무예가 뛰어나다는 이들은 테세우스의 저택 문 앞을 지키고 있는 호위병도 이기지 못했고 카파도니아의 내로라하는 장군들이 테세우스 호위병들과 전략과 전술을 논하는 진풍경(珍風景)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소문이 퍼지자 테세우스에게 무예, 전략, 전술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카파도니아 각지에서 몰려 왔지만 테세우스는 예외로 둔 몇 명을 제외하고 자신의 병사들만 가르칠 뿐이었다. 따라서 카파도니아의 대다수는 테세우스의 무예와 지략을 어떤 수준인지 알지 못했지만 누구도 테세우스를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먼저는 걸출하다 못해 탁월하기 그지없는 그의 병사들이 테세우스의 실력을 보증했고 그의 저택 역시 카파도니아 왕가가 마련한 것이었다. 왕가를 무시하는 미친 짓을 할 게 아니라면 테세우스를 괄시하는 사람이 카파도니아에 있을 수 없었다.
따라서 카파도니아에서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의 이름은 자연히 그리고 나날이 그 명성을 더해가고 있었다. 로마인들의 기억에서 나날이 잊혀가는 것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다그닥! 다그닥! 덜컹! 덜컹!
그런 테세우스의 저택에 호화스러운 마차 한 대가 들어서고 있었다.
대상이 누구든 삼엄한 경계를 쉬지 않기로 유명한 테세우스의 호위병들이건만 놀랍게도 마차를 검문하지도 않고 통과시켰다. 먼저는 마차의 주인이 누군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기실 테세우스를 암살하는 건 자신들이라고 해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호위임무를 게을리 할 자신들이 아니지만 말이다.
4년간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든 마차의 주인은 바로 카파도니아의 아리오바르자네스 왕과 아테나스 필로스토르고스 여왕의 딸 이시아스 왕녀였다.
마차가 멈추자 육감적인 몸매를 드러낸 옷을 입은 이시아스 왕녀가 마차에서 사뿐히 내려왔다. 이국적이고 화려한 미모를 가진 그녀는 별다른 화장을 하지 않았음에도 매우 매력적이었다.
“테세우스 님은?”
이시아스는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에게 말했다.
“연무장에 계십니다.”
“또?”
“왕녀께서 무예를 배우는 날이니 당연한 것 아닙니까?”
스스럼없는 병사의 말에 이시아스 왕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거야······. 하아.”
“오셨습니까?”
그때 날카로운 보검을 보는 것 같은 기세를 풍기는 중년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바로 나디르였다.
“예. 테세우스 님께서 오늘도 연무장에 계시다는데 오늘은 좀 어떻게 안 될까요?”
“하하하. 그건 저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이시아스는 불을 부풀려 뾰로통한 표정을 짓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나디르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나디르를 따라 도착한 곳에는 상체를 드러낸 한 사내가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있었다. 지상최강의 사내이자 무신이라 불러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사내. 바로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