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277화 (277/298)

# 277

277. 호라티우스.

277.

호라티우스는 그간 테세우스를 따르면서 그가 구사한 여러 전략과 전술, 처세술을 보고 여러 번 경악했고 그 충격으로 인해 그 일들을 아주 깊이 숙지한 사람이다. 그건 호라티우스뿐만이 아니었다.

육상에 비유하자면 최선두에서 뛰는 주자가 빠르면 빠를수록 그 집단의 평균 속도도 자연히 빨라진다. 비록 그를 넘어서진 못하더라도 더 이상 뒤처지지 않고자 죽을 힘을 다해 뛰기에 일어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테세우스가 원체 다방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지니다 보니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 역시 자연히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능해진 것이다.

따라서 반란군의 도발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 저들이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 짐작하지 못할 호라티우스가 아니었다. 도발 행위에 분노한 것은 사실이지만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여 현 상황에서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전술이 무엇인지까지도 도출해낸 것이다.

테세우스만큼 뛰어난 전략은 구사하지 못하겠지만 자신을 미끼로 적을 위기에 빠뜨리는 건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아군의 총사령관을 노리는 놈들의 노림수를 역으로 이용해 반란군 수뇌부를 일망타진 할 수 있다면 전쟁을 단번에 끝내진 못하더라도 전장의 흐름을 아군에게 유리하게 만들 수 있다.

결국 개인전이나 집단전이나 기본 맥락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유리한 전장에서 서는 것, 불리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리한 전장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필승의 전략이었다.

“명예롭게 전투를 치르고자 했다면 준비한 수를 사용하지 않았겠지만 명예롭지 못한 전장을 택하겠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호라티우스는 가니쿠스의 장검을 스쿠툼으로 걷어내며 말했다. 가니쿠스의 장검은 스쿠툼의 경사면을 따라 미끄러지며 힘을 잃고는 그대로 튕겨져나갔다.

그 뒤를 이어 크릭서스가 벌겋게 변한 얼굴로 재차 달려들었다.

“잔말말고 죽어라!”

스쿠툼을 휘두르느라 옆구리가 빈 것을 보고 그곳을 향해 검을 내지른 것이다. 자세가 잠시 흐트러지긴 했지만 가니쿠스도 호라티우스의 양손을 묶기 위해 곧바로 짓쳐 들었다.

크릭서스의 공격을 방어하면 전방의 가니쿠스가 문제가 될 것이고 가니쿠스를 상대하고자 크릭서스를 내버려 두면 그의 검이 당장에라도 옆구리를 찌를 것처럼 보였다.

위험한 순간이었지만 호라티우스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몸을 가볍게 틀었다. 그러나 여전히 크릭서스의 공격권 안에 있었다.

“흥!”

크릭서스는 호라티우스는 미온적인 움직임에 코웃음을 치며 기세를 더해 호라티우스의 옆구리를 찔렀다.

까가가각!

그러나 크릭서스의 공격은 허무하게 무산되었다. 검이 갑주에 닿는 순간 쇠 긁기는 소리와 함께 빗겨난 것이다. 호라티우스가 이번에는 갑주의 경사면을 이용해 아주 절묘하게 검을 빗겨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읏?”

당황한 크릭서스가 급히 검을 회수하려고 들었지만 어디 호라티우스가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사내던가? 자신의 대응으로 타격점을 잃어 균형이 무너진 크릭서스가 지척거리로 다가오자 호라티우스는 스쿠툼의 모서리 부분으로 크릭서스의 얼굴을 후려쳤다.

모서리라고는 하지만 스쿠툼의 단단함을 생각하면 어지간한 둔기만큼이나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터, 그런 곳에 얼굴을 찍히면 최악의 경우 사망할 수도 있었다. 이에 기겁한 크릭서스는 앞으로 엎드리듯이 자세를 낮추며 뒹굴었다.

부우우웅!

호라티우스는 자신의 공격을 피한 크릭서스를 일별한 뒤 가니쿠스를 바라봤다. 검투사치고는 제법이다. 아니 직접 부딪쳐 보니 육체적인 능력이나 반응속도는 호라티우스 자신보다도 뛰어나보였다. 전방에서 달려드는 말총머리의 날렵한 검투사 놈도 예삿 놈이 아니었다.

테세우스 휘하에서 무력이나 모든 부분이 예전의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지만 세월의 흐름은 산을 뒤엎을 장사도 쇠약하게 만드는 법이다. 끝없는 훈련을 통해 예전의 기량을 유지하려 했지만 자신의 의지와 노력과 무관하게 어쩔 수 없이 흘러가는 부분도 있는 법이다.

테세우스의 심정을 아예 모르진 않는다. 테세우스가 뜻을 세우더라도 아마 자신은 그 끝을 보지 못할 것이다. 전장에서 생을 마감해야만 하리라. 어쩌면 그 전에 마감할 수도 있고.

그가 대의를 완수한 후에 그와 함께 대의를 꿈꿨던 사람들이 테세우스 곁에 얼마나 남아 있을까? 사비누스는 말할 것도 없고 나디르와 자신 역시 이미 전성기를 지났다. 본래도 별다른 야망이 없던 사람이니 더욱더 의미를 찾기 어려웠겠지.

파노르모스산 포도주라······.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젊은이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테세우스처럼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내는 더더욱.

호라티우스는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짓다가 싸늘한 표정으로 빠르게 쇄도하는 가니쿠스의 장검을 바라봤다.

노병이 어디 신병보다 힘이나 육체 능력이 좋아서 전장에서 살아남던가? 무엇보다 자신은 아직 노병이 아니다. 팔팔하던 시절보다 더 왕성한 자신을 누가 감히 노병이라 치부할 것인가?

호라티우스는 가니쿠스의 검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그의 검을 절묘하게 쳐냈다. 이번에는 통할 것이라 생각했던 가니쿠스는 무기술의 달인을 보는 것 같은 심정으로 호라티우스를 바라봤다. 지금껏 자신이 만났던 그 누구보다 뛰어난 무기술을 보유한 사내였다.

반란군들이 왜 그토록 테세우스를 두려워했는지 실감되기 시작했다. 이런 능력을 가진 사내라면······.

두려움이 슬금슬금 자신의 마음을 잠식하려 들자 가니쿠스는 정색하며 생각했다. 그래도 2천은 불가능하다.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사람의 체력과 힘엔 한계가 있다.

크릭서스와 자신을 상대로도 선전할 정도로 놀라운 무력의 소유자지만 그의 힘과 체력은 크릭서스에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다. 사납고 강력한 맹수지만 사냥할 수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주변에 매복한 병사들까지 합류한다면?

“그러니 죽어라!”

가니쿠스는 마음을 다지며 재차 호라티우스에게 짓쳐 들었다. 그건 크릭서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때 주변에서 전투 소리와 함께 비명이 울려 퍼졌다.

“크아아아악!”

“아아악!”

“저곳은?”

방향을 확인한 가니쿠스는 놀란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 알 수 없는 로마군들이 합류하려던 전사들을 무참히 도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습을 드러낸 로마군은 바로 호라티우스가 신뢰하는 100명의 전사들이었다.

“너희 두 놈은 이만 죽어야겠다.”

싸늘한 어조로 말을 마친 호라티우스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저돌적으로 전투에 임했다. 크릭서스와 가니쿠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연신 물러서며 호라티우스의 공격을 받아냈다.

챙 채챙!

크릭서스와 가니쿠스가 이끄는 반란군은 공포에 휩싸였다. 테세우스를 습격하기 위해 나선 모든 전사들이 처절하게 도륙을 당하고 있었고 크릭서스와 가니쿠스 역시 테세우스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해 쩔쩔대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이익!”

가니쿠스와 함께 싸웠음에도 계속되는 수세에 크릭서스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호라티우스에게 짓쳐 들었다. 그것이 사달을 일으켰다.

호라티우스는 벌써 전에 크릭서스의 성품을 파악하고 그의 신경을 계속 건드렸다. 신중한 가니쿠스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여러 번 무마시켰지만 이번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크릭서스!”

가니쿠스가 소리쳤지만 크릭서스는 호라티우스의 글라디우스를 크게 걷어내고자 검을 강하게 휘둘렀다. 놈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하던지간에 힘은 자신이 더 좋다는 것이 판별난 상황이다. 그러니 이대로 검을 걷어내고 놈의 몸통을 잡아 던지던지 팔을 부러뜨리던지 할 생각이었다.

후우우웅 챙캉!

그러나 전혀 예상과 다른 일이 발생했다. 호라티우스의 검과 강하게 부딪치는 순간 크릭서스의 검이 산산이 박살났기 때문이다.

크릭서스는 물론이고 가니쿠스 역시 크게 당황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오직 한 사람 호라티우스만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검을 내질렀다.

푸우우욱!

“크릭서스!”

실로 맹수같은 놈이다. 분명 목젖을 노리고 찔렀는데 그 찰나의 순간 몸을 뒤틀어 쇄골 부분에 검이 틀어박히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 끝이다. 호라티우스는 눈을 번뜩이며 검을 뽑아 충격에 비틀거리는 크릭서스의 목을 쳤다.

“안돼!”

경악한 가니쿠스가 고함치며 그를 막으려 들었지만 호라티우스의 검을 막기엔 이미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크릭서스는 핏발이 잔뜩 선 눈을 부릅뜨고 호라티우스를 바라봤다.

부우우웅! 부웅!

“크흐흑!”

챙캉!

절체절명의 순간, 호라티우스 뒤편에서 두 자루의 투창이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호라티우스는 급히 몸을 뒤틀며 한 자루의 투창은 피했지만 이어서 날아온 두 번째 투창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얻어맞았다.

다행인 것은 단단한 갑주로 인해 몸이 관통되지는 않았다는 점이지만 투창은 골이 흔들릴 정도로 강한 충격을 호라티우스의 육체에 남겼다. 잠시 비틀거리던 호라티우스는 몸을 바로 세우고 투창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봤다. 이에 가니쿠스는 구사일생한 표정으로 크릭서스에게 다가가 급히 그를 부축했다.

다그닥 다그닥!

호라티우스가 바라보던 방향에서는 두 필의 말이 빠르게 쇄도하고 있었다. 말 위에 앉은 사내를 확인한 가니쿠스가 천군만마를 얻은 표정으로 소리쳤다.

“스파르타쿠스! 오이노마우스! 이자가 바로 테세우스다! 반드시 이곳에서 죽여야 한다!”

미라에와 틴달리스를 수복한 스파르타쿠스가 그 지역과 더 가까운 북부 히메라가 아니라 왜 남부 세리누스로 군을 이끌고 왔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여기서 테세우스를 죽일 수만 있다면 그런 건 이해할 필요도 없는 부분이다.

스파르타쿠스는 크릭서스와 가니쿠스가 세리누스로 진격했다는 소식을 듣기 무섭게 빠르게 진격하여 세리누스로 이동했다.

테세우스에 대한 모든 소문을 믿지는 않지만 오이노마우스를 처참한 지경으로 몰아넣었던 디오클레스를 단신을 죽인 사내라면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사내가 아니라 생각했기에 그럴 바에는 군을 나누기보다 한꺼번에 몰아치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이것이 바로 스파르타쿠스가 히메라가 아닌 크릭서스 등을 따라 세리누스로 진격한 이유였다.

스파르타쿠스와 오이노마우스는 크릭서스와 가니쿠스를 압도하는 무용을 보이는 사내를 보는 순간 그가 바로 테세우스라는 걸 알아차렸다. 과연 시칠리아 반란군들이 두려워할 만한 무용이었다.

“오이노마우스!”

오이노마우스는 스파르타쿠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전신의 근육을 팽팽하게 당겼다. 당시 30명에 달하는 최고의 검투사들과 함께 디오클레스와 대적했었다. 그럼에도 모두 살해당하고 자신만 간신히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런 괴물을 단신으로 처단한 사내가 테세우스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스파르타쿠스, 가니쿠스, 크릭서스 그리고 자신까지 달려들어도 부족하다. 그 테세우스를 앞에 두고 긴장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리라.

오이노마우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고삐를 강하게 쥐며 스파르타쿠스와 멀어졌다.

두두두두두.

스파르타쿠스 역시 굳은 표정으로 말을 달렸다.

“차! 차!”

*

두 필의 말이 전부가 아니었다.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두 필의 말이 전부였지만 두 필의 말을 선두로 무수히 많은 말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두두두두. 두두두.

스파르타쿠스라니? 놈이 히메라가 아니라 세리누스로 진격했단 말인가? 보아하니 보병들은 뒤에 두고 기병들과 먼저 이곳에 당도한 모양인데 이유야 어쨌든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다.

반란군의 도발에 응했기 때문에 위험에 처한 것도 있지만 반란군이 세리누스 성에 총공세를 펼치기로 결정했다면 그 위험은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5천의 병사만으로 저들의 총공세를 막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이곳 세리누스 성은 이미 한 번 함락되었기에 수성에 용이한 곳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멍하니 있을 생각은 없었다.

호라티우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품에서 피리같은 것을 꺼내 짧게 불었다.

삐이이익!

날카로운 소음이 어둠을 뚫고 제법 멀리까지 퍼졌다. 그와 함께 세리누스 성을 나선 병사들이 듣기엔 충분한 소음이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가니쿠스가 사나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딜! 이대로 도망치게 내버려 둘 것 같아?”

크릭서스 역시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호라티우스를 노려보며 전의를 다졌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이 이곳에서 벗어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호라티우스는 광오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 어디 막을 수 있다면 막아봐라!”

그리곤 그대로 저들을 향해 짓쳐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