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270화 (270/298)

# 270

270. 장벽을 넘어.

270. 장벽을 넘어.

그렇게 질문한 호라티우스는 조금 답답한 표정으로 재차 말했다.

“아니 말이 나온 김에 그것보다도 다른 걸 먼저 여쭤보겠습니다.”

테세우스가 자신에게 시선을 주자 호라티우스는 지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대체 왜 참으시는 겁니까? 그냥 모조리 쓸어버리면 될 일 아닙니까? 듣자하니 저번 정찰 때 반란군 척후대 2천을 홀로 쓸어버리셨다지요? 이젠 별로 놀라울 것도 없습니다. 그런 테세우스 님을 대체 누가 막을 수 있습니까? 저로서는 테세우스 님의 행보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테세우스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대답했다.

“누차 말했던 부분이 아닌가?”

“예. 야심이 없는 분이라, 그런 분이라 생각하고 넘어가려고 했지만······. 하아. 오늘도 보십시오. 저들이 요구하는 것이 어떤 정의를 세우는 것입니까? 그저 잃어버린 기득권을 어떻게든 찾으려고 아득바득거리는 게 전부 아닙니까? 그 가운데 누가 죽던 저들은 전혀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비단 저들뿐입니까? 로마의 귀족들은 저들보다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테세우스 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

“로마가 당신을 위협하지 않는다면 또 모르겠지만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타국의 왕녀도 로마가 테세우스 님을 꺼려한다는 걸 압니다. 전장에서 적은 그저 죽여야 할 대상입니다. 베어야 할 적에 대해 인정을 두기 시작하면 그 인정이 나를 죽이고 아군을 죽이는 칼이 되어 돌아올 것이란 말입니다. 역시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다 못해 피를 보기 두려워하는 분도 아니고 필요하다면 수천도 베어 넘길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까? 로마의 위협은 허상 따위가 아니라 당신의 안전과 목숨까지 위협하게 될 겁니다.”

“수천수만을 죽여야만 내 목숨을 보존할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 그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하지만 단순히 내 안전을 위해 수십만 명 어쩌면 수백만 명을 전쟁터로 밀어 넣을 수는 없다.”

“결국 같은 말이 아닙니까?”

“아니 다르다.”

“대체 무엇이 말입니까?”

“전자는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후자는 결국 모든 위협을 배제하고자 하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누차 말하지 않았던가? 로마를 무너뜨려? 내가 군을 이끌고 움직이면 로마가 내 손에 함락되든 아니든 로마는 갈가리 찢어지고 말 것이다. 로마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수백만 명이 나 한 사람의 선택으로 고통받게 되겠지.”

테세우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로마를 무너뜨리는 일도 지난한 일이지만 내가 로마를 무너뜨리면? 모든 위협이 사라지나?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신생국가가 로마만큼의 강제력을 가지려면 대체 얼만큼의 피를 흘려야만 가능할 것 같은가? 결국 나는 끝없이 피를 흘리고 흘리다가 원치도 않는 권좌 위에서 삶을 마무리 지어야겠지. 심지어 잠을 잘 때도, 물 한 잔을 마셔도 경계를 늦추면 안 될 것이다. 곁에 오는 자들은 모두 그럴 듯하고 화려한 가면을 쓰고 내게 다가오겠지. 등 뒤로 칼을 숨긴 채 말이야. 언제 풀릴지 모르는 팽팽한 활시위 같은 삶 가운데 무슨 즐거움인들 즐거울까?”

“음.”

“호라티우스! 네가 보기에 내게 세상을 바꾸겠다는, 로마를 바꾸겠다는 거창한 대의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은가? 만약 그렇게 생각했다면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다. 그런 건 내게 있지도 않고 딱히 바라지도 않는다. 저들이 진정 내 목숨줄을 끊을 생각이라면 마음을 달리 먹을지 모르나 나 테세우스는 1만 정병도 두렵지 않다. 로마의 위협이란 내게 고작 그 정도에 불과하단 소리다. 그런데 내 안전을 위해서 로마를 전복시켜라? 그 행동이야말로 도리어 내 안전을 위협하는 행동이다.”

호라티우스는 잠시 말이 없다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 기대하게 됩니다. 테세우스 님이라면 뭔가 다른 세상을 만들어줄 것 같은 기대가 생긴단 말입니다. 그게 저만 그런 것 같습니까? 그런 사람이 열 명이 되고 백 명이 되고 천 명이 되고 만 명이 되면!”

테세우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이 시대는 로마로 충분하다. 로마로 충분해. 어느 순간부터 시민권이 별 의미가 없어지긴 했지만 그래서 로마의 시민권을 얻고자 했던 것이었고. 또 그렇기에 로마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에 녹아들기로 결정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제 와 로마를 무너뜨려? 이기적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세상의 평안은 솔직히 내 관심사가 아니다. 그 일을 수행하느라 내 삶이 무너진다면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그간 평안하기를 바란 것은 나와 세상이 동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지 무슨 나를 희생해서 세상의 평안을 강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소리다. 정 위험하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훌쩍 떠나면 될 일이야! 그런 내가 굳이 로마와 싸우는 번거로움을 자초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해 봐라. 무엇이 내게 현명한 선택 같은가?”

호라티우스는 입을 다물고 테세우스를 가만히 바라봤다. 테세우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사람의 일평생이라고 해봐야 길게 잡아서 백 년이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무릇 국가의 일이란 그렇기 마련이다. 국가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 내 삶을 바칠 생각도 없고 무엇보다 그럴 가치를 못 느낀다. 이미 내 양손은 피로 잔뜩 물들었지만 고작 내 안전과 편의를 위해서 수많은 사람을 전쟁터에 갈아넣고 싶지도 않다. 적어도 그 시작이 나이고 싶진 않아.”

호라티우스는 한숨을 내쉬며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한편으로는 납득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결정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후우. 뜻이 그러하시다면 제가 무슨 말을 더하겠습니까? 동부. 시칠리아 동부는 왜 보류하고 계신 겁니까? 본래 시칠리아를 서둘러 안정시키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잠깐 보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굳이 질문에 답변하자면 간단히 로마와 적대하지 않기 위한 안배라고 해두지. 오늘과 같은 잡다한 일을 정리하고 상황을 살피기 위한 시간도 벌고 로마가 지급하지 않을 수고비도 받을 겸 말이야.”

“후우. 역시 이해할 수 없군요. 대체 무슨 안배 말입니까?”

“시칠리아 기득권층은 내게 강한 반감을 가질 것이다. 저들의 항의는 머잖아 로마에 닿을 것이고 이에 로마는 자력으로 군을 유지할 수 없는 증거 내지 시칠리아에서 내 영향력이 저조하다는 증거로 받아들일 것이다. 나를 경계할 이유가 그만큼 줄어드는 셈이니 앞서 언급한 로마의 위협은 더더욱 의미없는 소리가 되겠지. 사람 일이라는 것이 어찌될지 장담할 수 없기에 이시아스 왕녀의 제안을 제한적으로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렇게 된다면 굳이 카파도니아로 떠날 필요도 없을 거다.”

“흠.”

“아울러 내 명을 따른 병사들에게 소량의 금액이라도 쥐어줄 수 있다. 항복한 포로들 역시 보상으로 넘겨준다면 내가 임의대로 군을 해산하더라도 무법자로 돌아서기보다는 나름의 경제활동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시칠리아의 무너진 경제가 삐걱대나마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할거야. 로마도 시칠리아가 중요하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테니 일이 그쯤되면 사람을 보낼 것이다. 그가 시칠리아를 안정시키든 더욱 개판으로 만들든 그 뒤의 일은 더 이상 알 바가 아니다.”

“반란을 일으킨 노예를 처단하지 않고 병사들에게 준단 말씀이십니까? 물론 테세우스 님이 계시는 한 저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킬 생각은 하지 못하겠지만 아무래도 위험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언급한 대로 항복한 자들은 살려준다. 무엇보다 식량을 생산하려면 일손이 많이 필요할 거다. 그 주인들이 부하게 되든 노예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든 그 역시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이번 일도 시칠리아의 혼란이 로마에 큰 혼란을 불러 일으킬 것을 알았고 그 일을 해결할 사람이 자신 외에 대안이 없는 상황이라 움직인 것에 불과하다. 할 수 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내버려 둔다면 어떤 변명을 내세워도 책임을 회피하기 어려울 테니까. 하다 못해 반란이 일어날 때 시칠리아에 있지만 않았어도 관심을 끊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자신은 시칠리아에 있었고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는 능력과 위치에 놓인 사람은 아무리 봐도 자신 외에는 없었다.

‘그러나 내 손을 떠난 일이라면 더 이상 돌아볼 이유가 없다.’

*

온몸이 흠뻑 젖은 사내가 물기를 털어내며 입을 열었다. 붉은 머리칼에 파란 눈, 탄탄한 근육과 날렵한 체구를 가진 사내였다. 다만 오른쪽 가슴에는 흉물스러운 흉터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총 인원은?”

“이천 오백입니다.”

무려 오백에 달하는 전사가 바다를 건너다가 익사해서 죽은 것이다. 운이 나쁘면 모두 죽을 수도 있었으니 오백이라면 생각보다 적은 희생에 가까웠다. 따라서 오이노마우스는 말없이 씁쓸한 표정을 잠시 지었을 뿐이었다.

그 말에 다른 검투사가 안타까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메사나로 향하는 것이었다면······.”

“그랬다면 우리 모두 죽었을지도 모르지. 그나마 나서스로 방향을 잡았기에 이만큼이나마 살아남은 거다.”

오이노마우스는 저들의 대화를 잠시 듣고 있다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잠시 몸을 추스른 후 나서스로 향한다. 그곳을 점거하고 있는 자들이 로마군이라면 일단 몸을 피하고 반란군이라면 접선하여 향후 계획을 거론하겠다.”

“알겠습니다.”

이들에겐 다행스럽게도 나서스는 아직 반란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

“우아아아아아아!”

“우아아아아!”

“몰아쳐라!”

“죽여라!”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3만 7천에 이르는 대군은 크라수스가 건설해 놓은 장벽을 향해 총공세를 펼쳤다. 기략이 무용한 전장이다. 레기움을 둘러싼 긴 장벽이 어디 수풀이나 바위 틈 사이에 건설될 리가 없지 않은가? 은폐나 엄폐가 불가능한 대지 위에 세워졌기에 스파르타쿠스의 군은 몸을 드러내 놓고 장벽을 향해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에 맞서는 크라수스의 군대는 2만 정도, 수적 열세에 놓인 상황이었지만 크라수스 군은 장벽을 보유하고 있었다. 장벽 건설 및 보수는 인근 도시 거주민들의 도움까지 받아 이뤄졌기에 신속하게 건설된 것치고 매우 튼튼했다.

크라수스는 스파르타쿠스의 대군에 잠시나마 간담이 서늘해졌지만 오히려 그것은 기쁨이 되어 돌아왔다. 오늘의 전투만큼은 철저하게 준비했다. 로마 정규군이라고 해도 쉽사리 뚫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노예군이 무슨 수로? 크라수스는 냉소하며 크게 소리쳤다.

“저들이 장벽을 넘지 못하게 막아라! 궁수대는 활을 준비해서 사정거리에 들어오는대로 사격하라!”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노련한 지휘관들이 거리를 확인하고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수없이 많은 화살이 장벽 위에서 퍼부어졌다.

쉬시시시식! 쉬시시식!

“방패! 방패 들어!”

스파르타쿠스를 비롯한 크릭서스, 가니쿠스, 카스투스가 급히 명령을 내렸지만 별다른 대열 없이 진격하는 군대가 빼곡이 날아오는 화살을 막아내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으아아악!”

“크아아아아악!”

결국 상당히 많은 이들이 화살에 맞아 피를 흩뿌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달려라!”

“장벽까지 밀어 붙여!”

그러나 스파르타쿠스 군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고함을 지르며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그 모습은 마치 광기어린 광전사를 보는 것같아 장벽 위 크라수스 군의 마음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쿠우우우웅!

콰지직!

“크아아악!”

“아아악!”

하지만 그 마음은 장벽 위에서 날아간 거대한 화살이 저들의 선봉을 찢어버리는 모습에 완전히 해갈되었다. 장벽 위에 배치된 스콜피온과 발리스타의 육중한 화살이 반란군을 무참히 찢어버린 것이다.

“와아아아아!”

그 모습에 크라수스 군은 함성을 크게 지르며 사기를 고양시켰다.

“쏴라! 놈들이 다가오기 전에 모조리 죽여버려라!”

반란군이 토벌군 등에게 노략한 무구를 착용하고 있었지만 저들은 로마군만큼 장비를 다루는 것에 서툴렀다. 3만 7천에 이르는 병력이 모조리 검투사라면 말이 달라졌겠지만 저들 중 검투사의 수는 1만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스쿠툼을 들고도 저들의 원거리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검투사라고 할지라도 필룸에 의해 못쓰게 된 방패를 땅에 버릴 수밖에 없었다.

스파르타쿠스는 굳은 표정으로 전장을 바라봤다. 두 번의 승리 모두 유인 후 습격하여 승리한 것으로 대규모 전면전을 치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첫 전면전이 아군에게 너무 불리한 전장이었다.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이번에도 크라수스 군을 장벽에서 유인해 전투를 치르길 바랬다. 그 숫자를 조금이라도 줄인다면 수적 우세로 장벽을 점령해 버리면 될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두 번의 패배로 인해 적장 크라수스는 더 없이 신중해졌고 무엇보다 현재 아군은 굶주림과 같은 인고의 시간을 견딜 인내심이 전혀 없었다. 기다린다면 내부에서부터 무너져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러니 패배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투에 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크릭서스! 가니쿠스! 장벽 북쪽과 남쪽을 흔들어라!”

명을 받은 두 사람은 지체없이 병력을 이끌고 북쪽 남쪽으로 이동했다. 2만의 병력을 분산시켜 병력 우위를 더 가져오기 위한 계책이었다. 엄청난 희생이 뒤따르겠지만 스파타쿠스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카스투스! 상황을 보다가 저들의 병력이 이동하면 너는 나와 함께 중앙을 공략한다. 반드시 장벽을 넘어야 한다!”

카스투스는 말없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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