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6
266. 굶주린 늑대처럼.
266.
“이미 세리누스, 릴리바에움, 드레파눔 그리고 히메라까지 전복된 상황에서 지원군을 보내기는커녕 사실상 무용지물인 군 지휘권에 제한까지 두다니······. 정말 정신 나간 작자들이 아닙니까?”
폼페이의 수석 백부장 출신 오필리우스가 흥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자 역시 폼페이의 함장 출신인 라에리우스가 오필리우스의 말을 거들었다.
“이건 정말 너무합니다. 이제 시칠리아에서 반란군에게 함락당하지 않은 도시는 파노르모스와 메사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로마에서 모든 지휘권을 인정하더라도 두 도시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메사나의 시칠리아 정규군의 지원을 받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로마의 고위 인사라는 작자들이 이곳의 상황을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토벌은커녕 버티는 것도 어려울 겁니다.”
“기이한 것은 서부 지역의 도시를 모조리 점령한 반란군이 이곳 파노르모스는 내버려 두고 우회하여 히메라를 함락시켰다는 점인데······.”
반란군의 이동 경로에 더 가까운 도시였을뿐더러 이곳 파노르모스는 시라쿠세와 더불어 시칠리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였다. 물론 이곳의 방비가 다른 도시들에 비해 튼튼하기는 하나 이미 수많은 도시를 무너뜨린 반란군이 우회하면서까지 히메라를 먼저 칠 이유가 없었기에 오필리우스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더 의아한 것은 복수에 사로잡힌 저들이 도시를 함락시켰다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베어 넘겼을 텐데 상당한 숫자의 피난민이 이곳 파노르모스로 몰려들었다는 점이었다. 복수에 불타오르던 저들이 갑자기 자애로운 마음을 품고 피난민을 놓아 주었을 리도 만무한데 정말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불과 이틀 전날 밤, 이곳에 도착한 테세우스를 보는 순간 그 기이한 일이 누구 때문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날 밤 모습을 드러낸 테세우스의 갑주 곳곳은 피로 얼룩져 있었는데 그를 발견한 피난민들은 하나같이 엎드려 맹목적인 경의와 감사를 표했기 때문이다. 이에 테세우스가 저들을 도와준 것이라 짐작했지만 분노한 반란군의 손에서 대체 어떻게 저들의 목숨을 구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었다.
호라티우스는 잠잠히 입을 다물고 있다가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만 명의 병사가 당신의 명령이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간과 물자가 주어졌다면 13만 정병을 양성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13만 정병?”
이시아스와 함께 조용히 회의에 참석 중이던 나세스가 깜짝 놀라 반문했다. 놀라긴 파노르모스에서 합류한 지휘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 뭣?”
“13만 정병? 허언이 심하시오! 지금 일어난 반란군과 정규군을 모두 합쳐도 그 정도 숫자가 되지 않을 텐데!”
“아.. 아니 잠깐만! 그건 둘째치고 이미 만 명의 병사가 준비되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주둔지로 향하는 것은 확인했지만 대체 무슨 수로 그 많은 사람들이 병사로 훈련시켰단 말인가?”
이시아스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말을 꺼낸 호라티우스를 바라봤다. 시간과 물자만 주어지면 13만 정병을 양성해 낼 수 있다고? 게다가 이미 만 명의 병사를 양성했다니······. 이건 마치 미리 병력을 양성할 준비라도 한 것 같지 않은가?
호라티우스는 저들의 의문을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테세우스를 따르는 1,300명의 병사들은 정병 중의 정병이다. 그 어떤 전사라고 해도 무찌를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군대 말이다. 사실 테세우스와 함께라면 다른 병력을 모집할 필요도 없이 모든 반란군을 씹어먹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움직인다면 테세우스의 안위와 1,300 정병의 안위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반란군이 문제가 아니라 향후 로마의 대응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테세우스는 호라티우스에게 병력을 모집 양성할 것을 지시했고 이에 호라티우스는 1,300명의 정병을 중심으로 로마군의 기본단위인 콘투베르니움(8인 구성)을 형성했다. 엄밀히 말해 만 명이 아니라 만 사백명에 달하는 병력 구성이었다. 정병이자 선임병 1명이 8명의 자원한 신병을 굴리고 굴렸으니 부족하기는 하나 반란군을 상대하기는 부족함이 없는 군대였다.
물자와 병장기는 벌써 전에 준비했던 부분이니 당분간 전투를 치르는 것에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본래 이것은 로마를 상대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1,300에 달하는 정병은 원래부터 로마인이 아닌 자들이라 로마에 대한 충성심이 전무했고 오로지 테세우스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군대였다. 저들을 기본으로 80에서 100명에 달하는 병사를 훈련하게 한다면 로마에 대항할 군단을 만들어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시칠리아에서 당장 13만 명의 군대를 양성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겠지만 시간과 풍족한 물적, 인적 자원만 주어진다면 양성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니 공연한 허풍은 아니었다. 그 절반의 절반에 달하는 숫자만 양성해도 시칠리아에서 로마 본토로 진격할 수 있을 테고 테세우스라면 저들이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로마까지 밀어붙였을 것이다.
호라티우스는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자신이 따르는 사내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는 능히 로마를 취할 수 있는 사내였고 다스릴 수도 있는 사내였다.
홀로 반란군 무리를 휘젓고 다니며 피난민을 구하는 모습에 눈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자신의 안위마저 아랑곳하지 않고 관계없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전쟁에 임하는 군주가 세상천지 어디에 존재하는가? 누구보다 권좌에 어울리는 사내다. 그럼에도 정작 테세우스는 권좌를 멀리하니 매우 답답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테세우스가 권좌를 취하든 아니든 자신은 따를 뿐이다.
‘본국에서 지휘권이 떨어진 이상 이제는 병력을 움직여도 상관없겠지. 쓸데없는 죄목에 얽혀 승전을 거두고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태는 없겠어.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 병력을 모집한 일을 트집잡을 수도 있는 노릇이나 승전한 후 해산시키면 문제 삼기도 어려울 터.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두고 봐야겠지만 말이야.’
“히메라, 헨나, 아그리겐툼을 함락시킨다.”
이 세 도시를 함락시키면 동부와 서부의 반란군이 반으로 쪼개지는 결과를 낳는다.
“공성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을 테니 저들을 반으로 쪼갠 후 서부의 반란군 무리를 말살시킨다.”
“말살입니까?”
“항복하지 않는 자들은 모조리 참하라.”
“알겠습니다.”
“저.. 저희는 무.. 무엇을?”
테세우스의 기세등등한 모습에 파노르모스의 지휘관들이 주춤거리며 입을 열었다. 파노르모스를 지키는 군대는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천 명에 달하는 군대였다. 본국에서 지휘권을 인정한 이상 테세우스에게 적법한 명령권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의견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도시를 지켜라.”
“예.. 예?”
“싫은가?”
“아.. 아닙니다.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때 호라티우스가 호기 넘치는 표정으로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언제 출정합니까?”
“준비되는 대로 바로!”
“출정준비는 이미 완료되었습니다. 바로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함께 하시겠습니까?”
“딱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사실 호라티우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그럴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자신이 반란군이라고 해도 테세우스라는 이름에 두려움을 느낄 테니 그가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다. 테세우스의 담담한 말에 호라티우스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늦어도 일주일 안에 세 도시를 함락시키겠습니다.”
시간이 지체되면 지체될수록 보급이 열악해질 수밖에 없으니 서둘러 전쟁을 마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은 호라티우스도 잘 알고 있었다. 파노르모스의 풍부한 물자 지원이 적시에 이뤄지지 않았다면 군대를 애써 양성하고도 전쟁을 수행하기는커녕 해산해야 하는 사태에 처할 수 있었다.
“맡기도록 하지.”
회의는 그것을 끝으로 파했고 잠시 뒤 만 명에 달하는 대군이 호라티우스의 지휘를 받아 일사불란하게 두 무리로 나눠졌다. 히메라와 헨나로 향하는 방향이었는데 아무래도 두 곳을 동시에 함락시킬 것처럼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히메라와 헨나를 함락시킨 후에는 세 도시 중 최남단인 아그리겐툼을 공략해 함락시킬 것이다.
*
“잠시. 잠시만요.”
테세우스를 뒤쫓아 나온 이시아스가 그를 붙잡았다. 가벼운 튜니카만 걸친 테세우스가 이시아스를 돌아보자 이시아스는 걸음을 멈춰 세우며 말을 꺼냈다.
“상황이 급박하다보니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네요.”
“그것이라면 되었습니다.”
테세우스는 다시 몸을 돌려 걸음을 재촉하려고 하자 이시아스가 급히 다시 말을 꺼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계획을 여쭤봐도 될까요?”
“그걸 왕녀가 알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만?”
이시아스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테세우스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녀가 이 사실을 듣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정확히 어떤 일을 묻는 것입니까?”
“시칠리아의 반란을 토벌한 이후의 일을 여쭤보고 싶어요.”
“시칠리아에서 일어난 노예 반란이 극심하다는 것은 왕녀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쉽게 토벌 이후의 일을 거론할 계제가 아닙니다.”
“저도 눈이 있고 귀가 있어요. 반란군이든 피난민이든 테세우스라는 이름을 경외시한다는 것을 저라고 왜 모를까요? 또한 그날 밤, 반란군의 비명이 끊이지 않고 울려 퍼졌어요 저도 나세스도 모두 들었지요. 감히 돌아갈 생각은 하지 못했지만 그런 일을 겪은 당신은 어떤 상처도 입지 않고 돌아왔으니······.”
테세우스는 미간을 좁히며 이시아스에게 말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호라티우스와 용맹한 1,300명의 전사들 그들이 전부 당신의 사병이라고 들었어요. 로마에 충성하는 이들이 아니라 오직 테세우스 당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들 말이예요. 호라티우스는 조금 전 13만 정병도 아무렇지 않게 거론하더군요. 예.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겠죠. 그런 이들이 함께하는 군대이니 노예 반란군은 맥도 쓰지 못하고 격파되고 말 거예요. 저들의 원동력이던 분노 역시 그간의 약탈과 파괴로 많이 누그러졌을 테니까요. 심지어 당신은 로마 본국의 지휘권마저 얻어냈더군요. 제한적이긴 하지만 말이예요.”
테세우스가 살짝 미간을 좁히며 이시아스를 바라보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카파도니아에서 테세우스 당신을 지목하여 로마에 요청한다면 그 요청을 들어주실 수 있나요?”
테세우스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매몰차게 대답했다.
“거절합니다. 만에 하나 내가 수락할 마음이 있다 한들 임페리움이 없는 자에게 해외 군단을 내게 맡길 것 같습니까? 로마에서도 그 요청은 받아들이지 않을 거요.”
“늦든 빠르든 당신이 이곳 시칠리아에서 군단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는 건 로마도 결국 알게 될 일이예요.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지 않으시겠죠?”
“알게 된다고 달라질 것이 무엇이오? 그때라면 군대는 이미 해산했을 테고 나는 그 군대로 로마의 영토를 지킨 사람이오. 그 일을 가지고 내게 죄를 물을 수 있을 것 같소? 과가 있더라도 공으로 상쇄되고도 남을 겁니다. 그러니 괜한 소리 마시고 왕녀는 카파도니아로 서둘러 돌아가시지요. 이는 내가 아닌 본국의 권고이니 무시하면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겁니다.”
“지금 바로 대답해주길 원하는 것이 아니예요. 또한 제 말을 오해하셨군요. 저는 로마의 해외 군단 파병을 로마에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을 따르는 사병들의 원조를 요청한 것이예요. 군단 파병은 거절할지라도 과연 로마가 우호국인 카파도니아의 그런 작은 요청마저 거부할까요?”
이시아스의 말에 테세우스가 서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이시아스는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물론 당신이 이 자리에서 거부한다면 그런 요청 자체를 하지 않을 생각이예요.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이는 당신에게도 나쁜 일이 아닐 거예요.”
테세우스는 여전히 서늘한 눈으로 이시아스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