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262화 (262/298)

# 262

262. 공포.

262.

고작 한 명이다. 고작 한 명에게 이 무슨 치욕이란 말인가?

게다가 저놈 역시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로마인이다. 평범한 로마인보다 월등히 체구가 컸고 일반적인 로마군의 무장은 아니지만 어쨌든 저놈은 로마군이 확실했다.

리누스 역시 테세우스의 무용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니기에 상당한 경계심을 가지고 그를 바라봤지만 테세우스의 고함에 지난 치욕스러운 순간이 한꺼번에 떠오른 리누스는 잠깐의 정적을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불같이 타오르는 분노로 깨부쉈다. 너희가 엎드려야 할 이름이라고? 헛소리하지 마라! 저 광오한 로마놈을 반드시 찢어 죽이고 말리라.

“뭐라? 로마놈 주제에 감히! 네놈의 사지를 찢어 죽여도 그딴 소리를 할 수 있나 보자! 뭣들 하는 거냐? 로마에 대한 모든 원한을 잊기라도 한 것이냐? 네놈들의 원한은 고작 한 놈 따위에게 주춤거릴 정도로 하잘 것 없는 것들이었나? 가서 놈을 죽여라! 분노와 원한을 로마놈 한 명에게도 증명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겁쟁이 따위는 나 리누스가 목을 쳐버릴 것이다!”

리누스가 서늘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군을 바라본 뒤 다시 외쳤다.

“죽여라! 놈이 얼마나 뛰어난 무예를 가졌든 고작 한 놈이다!”

리누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나운 표정을 지은 반란군들이 일제히 고함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아!”

“놈을 죽여라!”

“놈도 사람인 이상 지쳤을 것이다!”

“놈을 죽여! 형제들의 복수를 하자!”

“놈의 피와 살을 씹고 더 강한 전사로 거듭날 것이다!”

“오만한 새끼! 너희가 엎드려야 할 이름이라고? 네놈의 혓바닥을 뽑아서 잘근잘근 씹어주마!”

“우아아아아아아!”

테세우스의 위용에 주춤거리던 저들의 사기가 리누스의 말 한 마디에 완전히 반전되었다. 이제 저들은 목숨을 내놓고 달려들 것이다. 테세우스와 리누스의 말은 반란의 어떤 정체성을 거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끝없는 학대 끝에 더 이상 노예로 살 바에 죽음을 택하리라는 심정으로 반란에 동참했다. 당연히 로마인에 대한 분노는 골수에 사무쳐 있었다.

그런데 다시 엎드리라고? 다시 노예가 되기라도 하란 말인가?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그럴 수 없다. 감히 그딴 소리를 자신들 앞에서 버젓이 내뱉은 저자의 살점을 뜯어내고 놈의 피를 바닥에 흩뿌리지 않는다면 이 분노와 원한이 거짓이라 고백하는 것과 동일하다.

놈에게 죽임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놈의 피를 이곳에 흩뿌리고 말리라. 증오의 원천을 건드린 테세우스와 리누스의 말에 저들은 불같이 분노하며 테세우스에게 달려들었다. 저들의 표정은 마치 피에 굶주린 악귀처럼 변해있었다.

테세우스는 왜 저들을 도발했단 말인가? 혹 혈기에 휩싸여 실수한 것이란 말인가? 냉정할 정도로 계산적인 그가 이러한 흐름을 예상하지 못했단 말인가? 어떤 이유든지 간에 지금의 상황이 테세우스에게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무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짓쳐 드는 반란군을 바라봤다.

‘동기야 어떠하든 어차피 너희의 반란은 성공할 수 없고 이러한 반란이라면 성공해서도 아니 된다.’

노예 없는 세상을 만들자! 그리하여 약자가 억압당하지 않는, 강자가 약자를 압제하지 않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자! 어떤 숭고한 기치를 내세우고 반란을 일으킨 게 아니지 않은가?

이런 거지 같은 세상을 뒤엎어버리겠다. 내게 고통을 주고 상처를 주고 나를 억압한 이 로마를 모조리 불태워버리겠다. 그와 같은 복수심이 이들의 원동력이 아닌가?

분노와 복수심은 가질 수 있다. 누구든 저들과 같은 일을 당한다면 끝없는 분노와 슬픔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반란에 성공하여 강자가 된 저들이 한 행위가 무엇인가? 살육, 약탈, 강간, 파괴 등등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잔혹한 일을 복수라는 명목 아래 거리낌 없이 행했다. 일시적이라고? 과연 그럴까? 간혹 개중에는 보다 숭고한 가치를 추구하는 자들도 있을지 모르나 저들은 그것을 이룰 능력도 의지도 그것을 용납할 집단도 아니었고 심지어 그런 것을 받아들일 시대도 아니었다.

‘저들 스스로도 어떤 기준이 없으니 극심한 혼란만 자아낼 뿐이다. 그러니 모조리 토해내고 토해내라. 그리고 깨달아라. 너희의 반란이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테세우스는 고함을 지르며 짓쳐 드는 반란군을 향해 일갈했다.

“기억해라! 나 테세우스가 너희의 절망이 될 것이고 너희의 두려움이 될 것이다. 오늘 너희를 철저히 도륙함으로 너희 뼛속 깊이 그것을 새겨주겠다.”

‘어차피 너희는 비탄과 혼돈을 낳고 죽을 뿐이니······. 그럴 바엔 이 자리에서 죽어라!’

그런 뒤 테세우스는 눈을 번뜩이며 말 위에서 뛰어내림과 동시에 극을 크게 휘둘렀다. 테세우스 뒤편으로는 어차피 시체들이 즐비할 뿐이니 그가 뛰어내린 방향은 수많은 반란군이 짓쳐 들고 있는 전방이었다.

“크아아아악!”

“아아악!”

테세우스의 극은 요사스럽게 움직이며 반란군의 수급을 허공에 비산하게 만들었다. 피와 비명이 음울하게 울부짖으며 극의 궤적을 뒤따랐음은 당연한 소리였다.

기병이 이점을 가지는 건 오직 달리는 말 위에 있을 때나 그런 것이다. 테세우스의 말은 지쳐서 더 이상 달리기 어려운 상태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혼전을 치르기엔 마상보다 육상이 훨씬 더 안전했다. 무엇보다 말 위에서는 자신의 모든 힘을 온전히 싣기 어려웠다. 체중을 실어서 너무 강하게 휘두른다면 그 힘과 무게를 말이 이기지 못할 테니 말이다.

“미친놈! 놈이 말을 버렸다!”

“말을 잡아!”

“말은 내버려 둬! 놈만 죽이면 된다!”

“멍청한 놈! 도망갈 길을 스스로 차단하다니!”

“죽어라!”

“어디 네놈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나 보자!”

테세우스는 저들의 저주 섞인 욕설에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적당한 속도로 땅을 박차고 달리며 연신 극과 검을 휘둘렀다.

“으아아아악! 내 팔! 커거걱!”

테세우스의 극에 팔이 달아난 반란군이 고통에 울부짖다가 울부짖는 입에 극이 틀어박혀 그대로 절명했다. 테세우스는 극을 그대로 위로 쳐올려 놈의 머리를 반으로 쪼개버렸고 왼손의 장검으로 가까이 다가온 반란군의 배를 갈라 뱃가죽과 함께 잘린 창자를 바닥에 쏟아내게 만들었다.

“커어어억!”

반란군의 비명과 단말마가 테세우스 주변으로 끊이지 않고 울려 퍼졌다.

“이놈!!”

덩치가 큰 전사가 테세우스를 향해 도끼를 집어 던졌다. 리누스 주변에 있던 사이메라는 전사였다. 이곳 시칠리아에도 소규모 검투장이 존재했는데 사이메는 그곳에서 검투사로 있던 사내였다.

훙훙훙훙!

테세우스는 극을 사선으로 휘둘러 반경 안에 있던 반란군들의 상체를 한꺼번에 절단내며 날아오는 도끼의 방향을 극으로 틀어서 주변에 있던 반란군의 가슴에 틀어박히게 만들었다.

날아오는 화살도 빠짐없이 처리할 수 있는 테세우스에게 날아오는 도끼 따위가 대수겠는가? 심지어 이들 반란군 가운데는 궁병 자체가 존재하지도 않았고 집단 전술이랄 것도 없었다. 로마군과 다르게 갈리아인의 전술과 전략은 남다른 체구와 힘, 뛰어난 전투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개개인의 무용에 의존하는 경향이 매우 강했다. 이러한 전술은 당연히 혼전의 양상이 짙을수록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누가 테세우스 앞에 무용(武勇)을 자랑할 수 있으랴? 항우와 리처드가 동시에 짓쳐 들어도 테세우스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는 판국에 말이다. 다시 말해 갈리아인과 같은 부족집단의 전술은 오히려 테세우스를 위한 전술이나 다름없었다.

“이노오오오오옴!”

사이메는 자신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아군을 베어가는 테세우스의 행동에 분노한 표정으로 두 자루의 장검을 뽑아 들고 소리를 지르며 테세우스에게 달려들었다.

사이메의 두 장검은 테세우스의 머리와 가슴을 노리게 빠르게 쇄도했다.

또다시 여러 명의 반란군을 베어낸 테세우스는 서늘한 눈빛으로 몸을 가볍게 틀면서 왼손의 장검을 옆구리 사이 등 뒤 방향으로 찔러넣었다.

차르르릉

푸우우우욱!

쇠가 긁히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거친 파육음이 울려 퍼졌다.

“커허허헉!”

사이메는 가슴에 박힌 테세우스의 장검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봤으나 테세우스는 그러거나 말거나 왼손의 장검을 그의 가슴에서 뽑음과 동시에 창대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그를 후려쳐 멀리 날려버렸다. 그러면서도 극의 날은 반경에 있던 반란군의 육체를 잔인하게 유린했다.

우두두둑!

후려치는 어찌나 그 힘이 강했는지 얻어맞은 그의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 큰 덩치가 끈 떨어진 연처럼 날아올라 바닥에 처박혔다. 더는 숨을 쉬지 않는 것이 절명한 것이 분명했다.

테세우스는 검과 극으로만 적을 상대하지 않았다. 그의 온몸이 이미 무기였다. 발로 차거나 주먹으로 치거나 어깨로 치는 등등 모든 부위를 이용해서 적을 타격했고 타격당한 적들은 어떤 부위에 어떻게 얻어맞았든지 절명하거나 전투불능 상태가 되어버렸다.

단단한 나무기둥을 맨손과 맨몸으로 때려 부수던 광경을 기억한다면 별로 기이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그는 다마스쿠스로 이뤄진 강철 갑옷을 온몸에 걸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테세우스는 그야말로 쉴 새 없이 반란군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마.. 말도 안 돼!”

“저... 저.. 저자는 지치지도 않는단 말인가?”

그토록 짧은 사이에 뛰어난 전사였던 사이메는 물론이거니와 백 명도 넘는 아군이 살해당했다. 고작 한 사람의 손에 의해서 말이다.

다시금 두려움이 피어오를 때 표정을 일그러뜨린 리누스가 소리쳤다.

“물러서서 창을 집어던져!”

이미 명령을 내려두었던 모양인지 테세우스가 극을 휘둘러 바로 회수하기 어려운 시점에 온 사방에서 투창이 시작되었다.

후우우웅

후우웅!

테세우스는 하늘에서 날아드는 무수히 많은 투창을 힐끗 바라본 뒤 귀찮다는 듯 극을 휘둘러 그 모든 투창을 걷어냈다.

모두가 경악에 찬 그 순간, 리누스는 이를 악물고 자신을 따르는 전사들과 함께 테세우스에게 짓쳐 들었다. 더 두고 봤다가는 저자에 대한 공포심에 명령이 먹히지 않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음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이 괴물 같은 놈! 죽어라!”

“죽어라!”

창을 든 전사들이 먼저 테세우스의 다리와 배 가슴 등을 향해 일제히 창을 내질렀다.

후후훙!

후웅!

그러나 그게 테세우스에게 무슨 위협이 될 수 있을까? 테세우스는 다시 극을 휘둘러 저들의 창대를 베어 창두와 분리시켜버렸다.

처저적!

처적!

그러자 이번에는 방패를 지닌 전사들이 사방에서 테세우스를 향해 밀고 들어오고 시작했다. 공간을 좁혀서 그를 어떻게든 사로잡으려는 심산으로 보였는데 아마도 로마군의 병법을 참고한 것같았다.

하지만 방패를 들고 짓쳐 드는 전사들이 정예 로마군이라고 해도 테세우스에게는 의미없는 짓에 불과했다.

테세우스는 무심한 눈으로 다시 극을 휘둘러 방패를 들고 짓쳐 드는 전사들을 방패째로 베어냈다.

“크아아악!”

“아아악!”

저자는 대체 어디에 존재하던 괴물이란 말인가? 방패째로 사람을 베어내? 그것도 한두 명도 아니라 여러 명을 단번에? 리누스는 두려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지만 어떻게든 놈을 죽여야만 한다고 마음을 다잡고 다음 공격을 감행했다.

“그물! 그물을 던져!”

그와 동시에 혹시나 호수에서 사용할 수 있을까 싶어 챙겨왔던 낚시용 그물이 사방에서 던져졌다. 철 그물로 끊어내는 테세우스에게 낚시용 그물이 대수랴?

하지만 이번만큼은 테세우스의 행동을 예측했던 리누스가 벼락같이 소리쳤다. 그간의 행동을 미루어 짐작해서 테세우스가 낚시그물을 금세 찢어버릴 것이라 예상한 것이다.

“죽여! 달려들어! 놈을 붙잡고 찔러!”

“우아아아아아!”

“우아아아!”

낚시그물에 뒤덮이든지 말든지 반란군은 테세우스를 덮치고 또 덮쳤다. 그물과 사람이 엉켜서 상당히 기괴한 형태가 되었다.

“자.. 잡았다!”

“놈을 잡았다!”

그 모습에 희색이 만연한 반란군들이 기쁨에 겨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리누스 역시 굳은 표정을 풀면서 입을 열었다.

“놈의 피와 살점이 오늘 우리의 양식이 될 것이다. 놈의 힘줄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끊어..”

리누스는 말을 하다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을 바라봤다.

“으아아아아악!”

“크허허헉!”

테세우스를 덮치고 있던 반란군 모두가 육편으로 변하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불과했다. 테세우스는 그에 그치지 않고 곧장 리누스가 있던 방향으로 쇄도했다. 피로 얼룩진 거무튀튀한 갑옷을 바라본 반란군은 두려움에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치며 테세우스로부터 분분히 물러섰다.

“이.. 이놈이! 나는 위대한 아르베르니의 리누스다!”

리누스 역시 잠시 뒤로 물러섰으니 이를 악물고 자신의 방패와 검을 내세우고 테세우스에게 달려들었다.

“죽어라! 이 괴물 같은 놈!”

테세우스는 매서운 눈빛으로 극을 허공에 휘둘렀다.

촤아아아악!

그것이 리누스의 마지막이 되었다.

반으로 쪼개져 죽임을 당한 리누스를 서늘한 눈으로 잠깐 바라보던 테세우스는 경악과 두려움에 찬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반란군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그가 움직일 때마다 반란군들은 주춤거리며 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가 수백이 넘는 반란군을 베었지만 여전히 상당수의 반란군이 생존해 있었다. 합심해서 달려든다면 테세우스를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기에 충분한 숫자였다.

하지만 감히 누구도 테세우스에게 달려 들지 못했다. 테세우스가 다시 걸음을 빨리하여 자신들에게 짓쳐 들자 오히려 저들은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병장기까지 버리고 도망치기 급급했다.

“우아아아아악!”

“괴... 괴물.”

“사... 사신이다.”

“이... 이길 수 없어. 이길 수 없다!”

“우아아아악!”

테세우스는 도망치는 자들은 내버려 두고 상대하려는 자들을 모조리 도륙해버리니 이내 곧 그 앞에 남아있는 반란군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잔혹하게 절단된 시신과 더불어 짙은 혈향만이 맴도는 호숫가를 바라보던 테세우스는 길게 한숨을 내쉰 뒤 북쪽을 향해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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