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256화 (256/298)

# 256

256. 스파르타쿠스.

256.

겨우내 찬 기운이 사라진 포근한 바람이 살며시 다가와 뺨을 간지럽혔다.

하지만 포근한 바람을 맞이한 사내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으로 저 멀리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푸르르륵 푸륵.

말의 투레질 소리에 테세우스는 목 부위를 두어 번 두들긴 후 말머리를 돌렸다.

검게 물결치는 금속이 그의 온몸을 뒤덮고 있었는데 바로 다마스쿠스로 만든 판금 갑옷이었다. 이 시대의 무장이라기엔 상당히 이질적인 모습이었지만 갑옷 외부 곳곳에 맹수의 털과 가죽이 뒤덮여 있었고 갑옷 자체가 중세풍을 따른 것이 아니라 로마풍의 느낌을 살렸기에 생각보다 이질적이진 않았다.

그의 등 뒤에는 두 자루의 장검이 X자로 교차되어 착용되어 있었고 카이트 실드가 두 자루의 검 위를 다시 덮고 있었다. 왼쪽 허리춤에는 중검이 착용되어 있었고 팔 보호구와 다리 보호구를 비롯한 갑옷 곳곳에 비도로 보이는 검들이 착용되어 있었는데 얼추 보이는 숫자만 18자루는 넘어 보이는 것 같았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활과 화살 역시 말에 매달아 두어 언제든 사용할 수 있게끔 만들었고 마지막으로 그의 오른손에는 방천화극과 할버드를 결합한 형태의 무시무시한 극이 쥐어져 있었다. 참고로 로마풍의 깃을 단 투구 역시 말의 한편에 매달려 있었다.

무슨 전투가 있을 것을 예감했기에 자신이 만든 모든 무구를 이곳 시칠리아까지 챙겨온 것은 아니었다. 단지 로마에서 시칠리아로 떠나올 때 로마를 떠나 다른 곳에 정착할 마음을 품었기에 그간 만든 무구를 모두 챙겨온 것에 지나지 않았다.

어쨌든 그 때문에 테세우스는 자신이 준비할 수 있는 모든 무구로 완전무장을 갖추었다. 다만 완전무장을 갖춘 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그는 홀로 이동 중에 있었다.

외부로 나선 테세우스와 달리 호라티우스 등과 1,300명의 병사들은 파노로모스 근방에 건설한 주둔지에서 철통경계를 서고 있었다.

시칠리아의 상황은 나날이 심각해졌기에 홀로 길을 나서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지만 완전무장을 한 테세우스에게 달려든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살행위가 될 테니 테세우스를 아는 호라티우스 등은 전혀 염려하지 않았다.

물론 그를 알지 못하는 아우렐리우스 오필리우스나 라에리우스는 그를 만류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도 염려하지 않는 분위기와 테세우스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압도당해 결국 어떤 말도 뱉지 않았고 말이다.

수많은 정예병과 맨몸으로 대적해도 상처 하나 입지 않았던 테세우스니만큼 고작 노예를 상대로 완전무장을 취하는 것은 과한 태도라고 볼 수 있겠지만 테세우스는 언제나 그렇듯 과할 정도로 대비해왔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번의 방심이 생명을 위태롭게 만든다면 과하게 대비해도 그건 결코 과한 것이 아니리라. 바로 그런 마음에서였다.

테세우스가 홀로 길을 나선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전장을 파악하고 저들의 전력을 미리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병사들을 부리지 않고 직접 나선 이유는 아직 본국이나 시칠리아 측에서 정식으로 구원 요청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나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반란군 측이 너무 강성해지면 더욱 많은 피를 흩뿌려야 할 테니 그 흐름을 직접 파악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시칠리아 주둔군은 로마 본국으로 향하는 길목을 차단하기 위해 대부분 메사나(메시나) 근방으로 이동했을 터, 이런 상황에서 소문으로는 정확한 정보를 파악할 수도 없을뿐더러 지형과 상황을 확인하고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 직접 확인하는 것만큼 효율적이고 확실한 것도 없었다. 그만큼 위험한 일이지만 그 일을 감당할 역량이야 충분하다 못해 넘쳐났으니 그의 선택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쨌거나 결정을 내린 테세우스가 길을 나선 시점이 바로 어제 밤이었다. 거의 6시간 가량 밤새 말을 달려 도시들을 확인하니 상황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심각했다. 노예들이 그간 쌓이고 쌓인 마음껏 분출하고 있었으니 강간은 예삿일이었고 도처에 살육과 약탈이 즐비했다.

저 멀리 연기가 피어오른 도시는 카타나(카타니아)가 분명했다. 카타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미 지나친 도시 헨나(엔나) 역시 처참하기 이를 데 없이 파괴되었고 카타나 남쪽에 위치한 해안도시이자 뛰어난 수학자이자 기술자인 아르키메데스의 탄생지로 유명한 시라쿠세(시라쿠사) 역시 무사하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이미 카타나가 무너졌다면 시칠리아 동남쪽의 시라쿠세는 물론 더 남쪽의 카마리나와 서남쪽의 겔라 역시 무사하지 못하다고 봐야겠지. 역시 이탈리아 본국으로 넘어가는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메사나 근방만 철저하게 경계하고 있는 셈인건가?’

도시 헨나는 시칠리아 중심에 위치한 도시라 할 수 있다. 이 도시를 기점으로 시칠리아 동북쪽의 이탈리아 본국으로 넘어가는 관문 도시인 메사나를 제외한 동쪽 도시들은 이미 노예반란군에게 모조리 점령당했다고 봐야했고 헨나 서쪽에 위치한 도시들은 아직 안전한 편이지만 흘러가는 상황을 볼 때 이미 서남쪽에 위치한 아그리겐쿰, 세리누스 역시 모두 무너졌다고 봐야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진행속도가 훨씬 빠르다.’

반면 시칠리아와 로마의 대응 속도는 느리기 그지없었다. 이대로라면 머잖아 시칠리아의 모든 도시들이 극심한 혼란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그 가운데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할 테지만 저들은 자신의 안위와 영달만을 염려할 것이다.

‘······. 그래도 개입할 때가 아니다. 공식요청이 없이 군을 움직인다면 훗날에 일어날 일도 일이지만 지휘권을 가질 명분이 없으니 정규군에게 지휘권을 인계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거의 반드시.’

군을 이끌고 승전한다면 전공을 탐내는 자들이 전시상황임을 내세워 사병에 대한 지휘권을 요구할 테고 로마의 반란군으로 규정되지 않기 위해 순순히 지휘권을 넘겨야만 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저들을 다 쳐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일단 이런 상황이 되면 테세우스라고 해도 별 도리가 없었다.

‘움직인다면 작은 성과는 거둘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섣부른 움직임은 내 사람들을 사지로 몰고 말 것이다.’

어리석은 지휘관 아래 놓인 병사들의 운명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다. 극심한 혼란과 전쟁이 일어날 수 있음에도 정치와 주변상황을 염려하느라 손발이 묶인 상황이라니······.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이란 말인가? 차라리 이럴 때면 무력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야만부족 사회가 훨씬 더 효율적이라 여겨졌다.

‘돌아가자. 더는 확인할 필요가 없다.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두는 수밖에.’

테세우스의 주둔지에 몰려온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다. 테세우스의 명성을 기억하고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테세우스는 저들을 거부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였다. 주둔지 외부에 저들을 받아들이고 목책을 더 넓히고 저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방어하게끔 훈련을 시켰다. 그 규모는 지금도 커지고 있었다.

“워 워!”

그렇게 말을 달리려던 테세우스는 말을 멈춰 세우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말발굽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테세우스는 울창한 숲속으로 말을 이끌며 상황을 주시했다. 홀로 전쟁을 치를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이곳저곳에 퍼진 반란군을 죽인들 저들의 반란이 종식되지 않는다. 물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지만 전투는 최대한 피하는 것이 좋았다. 바로 그래서였다.

두두두두두.

‘두 필의 말과 마차? 아니 더 있군.’

땅에서 느껴지는 진동과 소리로 얼추 달려오는 규모를 파악한 테세우스는 그 방향을 지그시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흙먼지를 일으키며 이두마차가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었다.

“이랴! 이랴! 달려라! 어서! 더!!”

급박한 사내의 음성이 아련히 울려 퍼짐과 동시에 욕설이 섞인 고함이 뒤를 이었다.

“이 새끼야! 멈춰!”

“멈춰라! 그러면 네 목만 살포시 베어가주마!”

“마차 안의 여자만 내놓으면 고문은 안 할 테니 멈추는 게 좋을 거다! 이 새끼야!”

두두두두

“너 잡히면 죽여 버릴거다! 살과 뼈를 조금씩 발라버릴 테니 각오해라!”

“흐흐흐흐. 이것도 재미있군. 고귀한 가문의 여자를 겁탈하려니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는구만!”

“나부터다!”

“일단 저 새끼부터 죽이고 보자!”

마차를 모는 마부는 급박함과 절망에 섞인 표정으로 다시 말을 재촉했다.

“어서 달려라! 어서!”

테세우스는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가볍게 혀를 찬 뒤 말에 걸린 활을 들고 시위를 당긴 후 빠르게 화살을 날렸다.

피이이잉! 피잉!

순식간에 세 발의 화살이 허공을 격하고 날아가 뒤따라오던 자들이 머리와 목 가슴에 틀어박혔다.

“커허어억!”

“크하아아악!”

“크헉!”

매서운 화살이 마차를 스쳐 지나가자 마부로 보이는 사내는 놀란 눈으로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봤지만 그렇다고 마차의 속도를 줄이지는 않았다.

“미친! 어떤 새끼냐?”

“저기다! 저기서 날아왔다!”

“감히!”

예상했던 일이다. 노예반란에 어찌 노예만 가담했겠는가? 저들을 이끄는 자들 가운데는 약탈과 살인을 업으로 삼고 즐겨하는 도적들도 대다수 가담했을 것이다. 테세우스는 능숙하게 말을 다루는 솜씨와 더불어 갖춰 입은 무구를 확인하는 순간 저들이 전문 도적단이었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혼란이 극심할수록 도적들과 같은 무뢰배들은 더욱 날뛰는 법이다. 혼란이 더할수록 오직 무력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야만사회가 되어버린다.

테세우스는 숲에서 말을 이끌고 나오며 마주 달려오는 마차의 마부를 바라봤다.

마부는 숲속에서 거대한 체구를 가진 사내가 나오자 매우 두려운 표정을 지었지만 테세우스의 손짓에 자신을 도와주고자 나선 것을 알고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역시 마차의 속도를 줄이는 행동은 일절 하지 않았다.

따라서 마차는 테세우스를 금세 스쳐 지나갔다. 테세우스는 마차가 지나가자 오른손에 든 극을 가볍게 휘두르며 마차를 추격해오는 마적떼를 바라봤다.

“저 새끼 뭐야?”

“네놈이 화살을 날렸냐?”

“죽여!”

십수 명에 달하는 마적떼들은 테세우스의 모습에 잠깐 긴장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혼자뿐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테세우스를 비웃으며 그에게 짓쳐들었다.

두두두두. 두두두.

테세우스는 극을 늘어뜨린 채 저들이 다가올 때까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흥! 뭐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앞을 가로막은 대가는 목숨으로 치러야 할 것이다!”

“죽어라!”

테세우스는 두 세명의 마적이 타고 있는 말과 함께 극의 사정거리에 들어온 순간, 눈을 번뜩이며 오른손의 극을 횡으로 휘둘렀다.

부우우우웅!

촤아아아아악!

두두두두두.

극이 허공을 가르는 파공음과 파육음, 그리고 말이 질주하는 소리만 테세우스를 스치고 지나갔다. 테세우스의 극의 사정거리 안에 놓여 있던 마적들은 모조리 양분되어 단말마도 지르지 못하고 이곳저곳에 처박혔다. 저들이 타고 있던 말은 크게 놀랐는지 눈을 찢어질 것처럼 크게 뜨고 테세우스 주변으로 뿔뿔히 흩어졌다.

“워.. 워!”

“뭐.. 뭐야?”

뒤따르던 마적들이 급히 말을 멈춰 세우며 테세우스를 경계하고자 했지만 테세우스의 신출귀몰한 극의 움직임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죽이지 않을 것이라면 모르되 죽일 것이라면 자비를 보이지 않는다. 테세우스는 무정한 눈빛으로 속도를 줄이며 달려오는 마적들을 향해 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부우우웅! 부우웅!

그의 극이 움직일 때마다 허공에 혈선이 그려지며 마적들의 절단된 신체가 춤을 추듯 날아다녔다.

“크하하학!”

“크허헉!”

“사... 살려! 크허헉!”

그의 한 수라도 막아내는 마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마적들은 테세우스의 손에 순식간에 도륙당했고 마적들이 존재하던 자리엔 저들의 피와 살점이 잔혹하게 흩뿌려져 있었다.

테세우스는 극에 남은 저들의 피를 바닥에 흩뿌려 털어낸 뒤 마차가 달려간 방향을 힐끗 바라봤다. 누가 마차에 타고 있는지 저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다만 눈앞에서 잔혹하고 무도한 일이 벌어지는 꼴을 지켜볼 수 없었을 뿐이다.

아닌 게 아니라 헨나를 지나올 때도 잔혹한 짓거리를 하던 자들이 눈에 보이면 그 즉시 참살해버렸다. 당연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어이없지만 당연하게도 그 숫자가 얼마나 되든지 그건 테세우스에게 고려할 바가 되지 못했다.

테세우스는 바닥에 흩뿌려진 피와 저 멀리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있는 건가······.’

테세우스는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가 곧 털어버리고 다시 말을 달렸다. 불가항력에 가까운 일을 고심해봐야 머리만 아플 뿐이다. 그래 그럴 뿐이다. 다만 향긋하고 포근해야 할 봄바람이 어찌나 이리도 비릿하고 날카로운 칼바람처럼 느껴지는지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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