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255화 (255/298)

# 255

255. 스파르타쿠스.

255. 스파르타쿠스.

쓰으윽!

검투사로 보이는 사내가 피로 흠뻑 젖은 글라디우스를 목이 잘린 시체의 토가 위에 문질러 검신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바티아투스, 그가 검을 제법 다룬다고 해도 검투사 중에서도 탁월한 실력을 보유한 스파르타쿠스 앞에 비빌 수준이 아니었다. 심지어 복부에 검상을 입은 상황이 아니었던가?

바티아투스는 황소처럼 달려드는 스파르타쿠스에게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검을 휘둘렀지만 고작 단 한수만에 목이 달아나고 말았다.

“스파르타쿠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스파르타쿠스는 양손에 나눠 쥔 글라디우스 두 자루를 늘어뜨린 채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사내를 바라봤다.

그는 붉은 머리칼에 파란 눈, 날렵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는데 몸에 여기저기 새겨진 상흔은 그가 치러온 전투와 삶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방증하고 있었다. 특히 오른쪽 가슴에 있는 상처는 비교적 최근에 입은 상처로 보였는데 매우 흉물스러웠다.

“오이노마우스.”

스파르타쿠스를 호명한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오이노마우스였다. 오이노마우스는 둥근 방패와 장검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당연히 그의 검과 방패에도 피와 살점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스파르타쿠스는 갈색빛이 도는 머리칼과 큰 키, 균형 잡힌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그는 주로 무르밀로(물고기 모양의 투구를 쓴 검투사)로 출전하곤 했다. 육중한 체구와는 다르게 매우 날렵했고 두 자루의 검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는데 카푸아의 신예 챔피언이기도 했다.

다만 구 챔피언인 오이노마우스에게 챔피언의 자리를 빼앗아 온 것은 아니었다. 그가 검투사로서 첫발을 뗄 당시에 오이노마우스는 검투사의 악몽이라 불리는 디오클레스와의 결전에서 간신히 목숨만 건지고 사경을 헤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이노마우스 오른쪽 가슴에 남은 흉물스러운 흉터는 바로 그때의 결전으로 입은 상처였다. 살아난 것이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치명적인 상처였다.

스파르타쿠스는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의 동료들, 곧 검투사들을 바라봤다. 트라키아의 마에디 부족의 귀족 출신이자 로마의 아우실리아(보조군, 속주병)로 근무했던 스파르타쿠스는 로마군의 집요함과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탈주가 아니라 반란이니 로마는 반드시 토벌군을 편성해 우리를 추격할 것이다.”

“우리는 머잖아 죽게 되겠군. 뭐 그것도 나쁘지 않다. 노예가 아닌 자유민으로 죽을 수 있을 테니까.”

스파르타쿠스는 자신에게 말을 꺼낸 검투사를 바라봤다. 스파르타쿠스의 체구 역시 결코 작은 체구가 아니었는데 이 검은 곱슬머리 검투사의 체구는 스파르타쿠스보다도 거대했다.

“크릭서스.”

오이노마우스와 마찬가지로 이 갈리아 출신의 검투사는 매우 용맹했다. 자신이 카푸아의 챔피언에 오르긴 했지만 이 사내와 치열한 전투 끝에 간신히 그 자리를 쟁취했다. 이번엔 자신이 운이 좋았다. 다시 싸운다고 해도 승패를 가르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검투사였고 그 역시 전대 챔피언이었다. 그 이전의 챔피언은 오이노마우스, 가니쿠스가 있었다.

스파르타쿠스는 크릭서스의 이름을 언급한 뒤 73명 정도되는 동료 검투사들을 둘러보며 한자 한자 씹어먹듯 말을 뱉었다.

“우리는 죽지 않는다. 죽는 건 로마인이 될 것이다.”

로마의 무서움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분노는 그 두려움을 월등히 뛰어넘는다. 반드시 복수하고 말리라. 불꽃처럼 타오르는 스파르타쿠스의 눈을 마주한 크릭서스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그건 더 듣기 좋은 소리군.”

“스파르타쿠스. 분노는 확실히 좋은 무기지만 그 무기가 우리의 생명을 보존해주지는 않는다. 우리가 아무리 용맹하더라도 100명도 채 되지 않는 숫자에 불과해. 다행히 겨울은 지나갔지만 숲속에 몸을 피신한들 야지에서 생존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거다.”

기반을 잡기도 전에 무리 중 태반이 사살되고 말 것이다. 씁쓸한 결말이 당장 눈앞에 펼쳐진 것처럼 선명했지만 오이노마우스는 굳이 뒷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숲속? 야지? 아니. 우리는 도망치지 않는다.”

오이노마우스와 크릭서스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스파르타쿠스가 입을 열었다.

“맞다. 나는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 로마인이라면 그게 누구든 죽여버리고 싶은 분노가 나를 사로잡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생각없이 일을 벌인 것이 아니다. 로마군의 무서움은 너희들 중 내가 제일 잘 파악하고 있을 거다. 오이노마우스, 네 말대로 분노만으로 로마를 상대하기엔 로마는 너무 거대하다.”

오이노마우스는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가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의 표정엔 한 줄기 의아함이 서려 있었다.

“미리 생각해 놓은 대안이라도 있는 건가?”

“그런 건 없다. 그런 준비를 하게끔 내버려 둘 정도로 허술한 위인이 아니지 않았나?”

스파르타쿠스는 목이 잘려 바닥에 굴러다니는 바티아투스를 힐끗 바라봤다.

바티아투스는 폭군이었다. 성과를 내지 못하면 잔혹하게 검투사를 죽이고 학대하는 무도하고 공포스러운 폭군 말이다. 카푸아에는 수많은 검투사 훈련소가 있지만 이곳 바티아투스의 검투소에서 카푸아의 챔피언이 무려 세 명이나 배출되었다. 그게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바티아투스는 검투사들의 피와 살을 날카로운 칼날에 갈아서 자신의 명예와 명성을 높이던 자였다. 당연히 그런 바티아투스 아래에서는 다른 준비를 할 만한 여력이나 기회라고는 존재하지 않았고 만약 그런 시도를 했다면 일찌감치 발각되어 바티아투스의 병사들에게 잔혹한 고문 끝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오이노마우스는 스파르타쿠스에게 질문을 던지면서도 의아한 감정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

“베수비우스가 폭발했다는 소식은 너희들도 암암리에 들었을 것이다.”

그 말에 오이노마우스와 크릭서스 그리고 스파르타쿠스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검투사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을 듣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눈이 있는데 검은재가 하늘을 뒤덮는 것을 검투사들이라고 못봤을 리 없지 않은가?

“정확히 어떻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폼페이가 사라졌다더군.”

크릭서스가 말을 꺼내자 스파르타쿠스가 입을 열었다.

“아마도 맞을 거다. 그런 중대한 소문이 잘못된 소문이었다면 말을 퍼트리는 자들을 엄벌에 처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크릭서스의 반문에 스파르타쿠스가 다시 말했다.

“네아폴리스는 물론이고 카푸아 주변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들 대부분이 폼페이 근방으로 이동해 정신이 없을 거다. 우리는 카푸아 훈련소를 습격하여 동료 검투사들을 구출한다.”

이에 오이노마우스가 고개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겠지만 화산이 폭발한지 벌써 두 달이 넘은 시점이다. 병력의 공백이 지금까지 이어졌을 리도 없고 공백이 있다고 하더라도 너무 위험하다. 무기나 물자 모든 부분에서 부족해.”

현재는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 후 두 달이 넘은 시점, 곧 BC 75년 4월 중순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게 전부라면 그렇겠지.”

“음?”

“얼마전 소식을 들었다. 시칠리아에서 노예반란이 일어나 난리도 아니라더군.”

“뭐? 노예반란?”

“그게 무슨 소리야?”

“벌써 한 달도 더 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당연히 노예반란과 같은 소문이라면 통제해왔겠지만 소문이 이곳까지 퍼졌다는 건 반란의 규모가 상당하다는 뜻이 되겠지. 나는 그 소식을 듣는 순간,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하여 오늘 그 거사를 감행한 것이고.”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검투사들은 말문을 잃고 스파르타쿠스를 바라봤다.

“어째서 이제 와 그 이야기를?”

한 검투사가 저도 모르게 말을 뱉자 스파르타쿠스가 냉정하게 대답했다.

“당시에는 별 쓸모없는 이야기였으니까.”

훈련소 전복에 실패하면 어차피 모두 죽은 목숨이었다. 모두가 납득하고 넘어갈 때 오이노마우스는 뭔가 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짐작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하여 스파르타쿠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시칠리아로 합류할 생각인가? 하지만 네가 들은 소문이 사실이라면 병력의 상당수가 항구 주변으로 몰렸을 것 같은데?”

“해안인지 내륙인지 정확히 어찌 알겠는가? 이 상황에서 병력의 이동 경로를 파악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우리는 시칠리아로 가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러자 크릭서스가 흥분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어쩔 생각이지?”

“먼저 검투사 훈련소를 쳐서 동료를 확보하고 그 후에는 양치기들을 비롯한 천대받는 이들을 합류시키며 도시를 약탈한다.”

양치기라고 막대기나 들고 다니는 평온한 소년을 떠올리면 곤란하다. 일단 양 자체가 생각처럼 온순하지 않다. 늑대나 곰을 비롯한 맹수들로부터 양을 지키기 위해선 최소한의 무력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양치기는 매우 고되고 위험한 일이며 헤라클레스, 오이디푸스, 로마 건국자 로물루스와 레무스, 골리앗을 죽인 다윗 등등 전직 양치기들의 면면은 생각보다 훨씬 화려하다. 양치기는 어떤 부분(전령 등으로)에서는 검투사보다도 뛰어난 전략자원이었다. 스파르타쿠스가 괜히 양치기를 언급한 것이 아니었다.

“설마 로마군과 전면전을 펼치겠다고? 우리는 검투사다. 저들이 합류해도 무슨 레기온이 되는 게 아니야. 심지어 검투사로만 병력을 구성하는 것도 아니지 않나?”

“전면전을 펼치진 않는다. 카푸아의 모든 것을 약탈하고 소도시나 마을을 습격하며 로마를 쑥대밭으로 만들 거다. 시칠리아의 노예반란이 엄청나다면 로마는 아마 공황상태에 빠져들어 제대로 대처하지도 못할 거다.”

오이노마우스는 고개를 주억이다가 몇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당금 로마에는 인간도살자로 유명한 ‘폼페이우스’가 프라에토르로 임관하고 있다. 게다가 너희들도 ‘테세우스’라는 이름은 잘 알고 있을 거다.”

“악몽을 죽인 사내?”

“디오클레스 살해자······.”

검투사들이 수군거리자 오이노마우스가 다시 말했다.

“나의 패배를 변호하고자 말을 꺼내는 것이 아니다. 당시 나는 서른 명의 검투사들과 함께 디오클레스와 결전을 치렀고 그 결과는 이미 모두가 알고 있을 거다. 디오클레스 그자는 실로 괴물같은 놈이었다. 그런 괴물 같은 놈을 단신으로 쳐죽인 것은 물론 수많은 검투사를 죽인 자가 바로 테세우스라는 자다. 테세우스를 직접 목격한 검투사들의 증언은 아마 너희들도 한 번쯤은 들어봤겠지.”

다시 검투사들이 웅성거릴 때 스파르타쿠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폼페이우스는 당분간 문제 될 것이 없다. 로마의 탐욕스러운 세네토르들이 그에게 다시 지휘권을 부여할 리가 없어. 무엇보다 로마의 콘술이 버젓이 존재하는데 프라에토르에게 군대 지휘권을 먼저 넘길 리가 없다. 물론 그렇다 해도 위협적이긴 마찬가지겠지만 말이야.”

트라키아 마에디족의 귀족 출신이었던 스파르타쿠스는 로마의 군제뿐만 아니라 로마의 정치체계에 대해서도 제법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테세우스는 어찌 상대할 생각이지?”

“역시 괜한 걱정이다.”

오이노마우스는 표정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나를 무시하는 건 아무래도 좋다. 하나 다시 언급하지만 디오클레스는······.”

“오이노마우스, 너를 무시하지 않는다. 네 조언으로 인해 크릭서스와의 결투에서 승리한 내가 너를 무시한다면 그건 곧 나를 무시하는 행동이 되겠지. 마찬가지로 디오클레스나 테세우스를 과소평가하는 것도 아니다.”

“하면?”

“듣기로 테세우스, 그는 로마의 트리뷴이었다더군. 프라에토르이자 명장이라 일컬어지는 폼페이우스에게도 군권을 넘기길 꺼릴 텐데 트리뷴이었던 자에게 군권을? 더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그건 나중에 고민해도 될 일이다. 하여 먼저 묻겠다. 내가 너희들의 지휘하는 것에 불만이 있는 자가 있다면 지금 당장 말하라!”

그러자 크릭서스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나 크릭서스는 네 지시대로 따를 것이다.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나보다는 네가 적임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나도 따르겠다.”

오이노마우스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든 검투사들이 그의 지휘권을 인정했다. 저들의 대답을 듣고 있던 스파르타쿠스는 고개를 끄덕인 뒤 크게 소리쳤다.

“좋다. 우리의 첫 번째 목표는 가니쿠스가 있는 훈련소다. 마침 이 근방이니 서두르면 동이 트기 전에 습격할 수 있겠군.”

“가니쿠스?”

크릭서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하자 스파르타쿠스가 입을 열었다.

“말했지만 나는 즉흥적으로 이 일을 계획한 것이 아니다. 어쨌거나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서둘러 무기와 방어구를 챙겨라! 저들에게 피의 복수를 할 시간이 왔다!”

“우와아아아아아!!”

“와아아아!”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 시칠리아 노예반란에 이어 카푸아의 바티아투스 훈련소에서도 거센 반란의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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