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3
253. 징조.
253.
배의 모든 부분이 성한 곳이 없었다. 작은 투석기에 무수히 얻어맞기라도 한 것마냥 배의 갑판이나 겉면이 성한 곳이 없었고 돛대를 지탱하는 기둥 역시 검게 타오른 흔적이 가득했다. 이윽고 배가 정박하자 배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멍한 눈빛으로 서둘러 하선하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행인 중 한 사람이 저들을 붙잡고 질문을 던졌다.
“대체 무슨 일이요? 무슨 일을 겪었길래 배가 이 모양이 된 것이오?”
말을 건넨 행인은 바다 일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기에 배의 모습만 봐도 어떤 일을 겪었는지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일단 해적 등에게 습격을 당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해적에게 습격을 당했다면 승객들 가운데 창상(創傷)을 입은 자들이 많아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머리나 팔다리에 붕대를 감은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날카로운 무기에 베이거나 찔린 상처는 결코 아니었다.
더욱이 배의 상태를 보면 해적선을 떨칠 정도로 빠르게 항해하지 못했을 터, 반드시 따라잡혔을 테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아서 파노로모스 항구를 밟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배의 상태는 마치 엄청난 전쟁을 치르고 온 것처럼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것이란 말인가? 일어난 일을 짐작하기 어려웠던 그가 질문을 던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저주. 저주 받았소. 저주가 임했단 말이오.”
그러자 그에게 잡힌 사람이 덜덜 떨며 외치더니 이내 곧 그의 손을 뿌리치고 서둘러 제 갈길을 갔다.
“저주? 그게 무슨?”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할 때 다른 행인들이 하선하는 승객에게 다시 질문했다.
“무슨 일이오? 무슨 일인데 이렇게 된 것이오? 우리도 알아야 할 것 아니오?”
“부.. 불카누스가! 불카누스가······.”
‘불카누스?’
테세우스도 그 자리에 있었기에 저들의 말을 들었는데 불카누스라는 단어에서 매우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테세우스는 길을 막는 행인들을 밀치며 승객들에게로 다가갔다.
“내 이름은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 작년에 트리뷴이었던 사람이자 현 로마의 세네토르요.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세하게 설명할 것을 요청하오.”
“테세우스?”
“오? 저 사람이?”
“저 사람이 테세우스였어?”
“어쩐지 기골이 장대한 것이 범상치 않아 보이더니······.”
“테세우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를 패퇴시킨 히스파니아의 반란군?”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저 사내는 로마의 트리뷴이었던 자라고!”
“검투사의 악몽이라 불리는 디오클레스를 단신으로 죽인 남자가 바로 저 사람이라고?”
“트리뷴 테세우스! 플레브스의 진정한 수호자!”
“오오오. 테세우스.”
저마다 테세우스를 기억하는 내용은 조금씩 달랐지만 이곳 시칠리아에서도 테세우스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불과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로마 시민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미흡하게나마 각인시킨 테세우스였다. 그러니 크라수스를 비롯한 세네투스가 그를 경계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호라티우스는 사람들이 테세우스를 알아보자 뿌듯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그래. 이것이 맞는 거다. 저 북쪽에서 피어오른 미약한 연기처럼 스러질 것이 아니라 로마 곳곳에 그 이름을 새겨넣을 사람이란 말이다.
호라티우스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의문 섞인 표정으로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검은 연기? 저건 어디서 생겨난 연기란 말인가? 어디서 불이 났다고 생각하기엔 검은 연기가 나타난 방향은 망망대해가 펼쳐진 바다였다.
바다 위에 불이 났다면 대규모 해전이라도 벌어졌다는 뜻인데 어디서도 그런 소식은 들은 적이 없었다. 따라서 호라티우스는 의아한 눈으로 테세우스에게 다가서는 군인을 바라봤다.
그러자 군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침중한 표정으로 테세우스에게 군례를 표한 뒤 입을 열었다.
“폼페이의 경계를 맡고 있던 레기오의 프리무스 필루스, 아우렐리우스 오필리우스라고 합니다.”
프리무스 필루스는 수석 백부장을 이르는 말이었다. 폼페이 외부 경계를 도맡고 있는 군단의 수석 백부장이 시칠리아까지 올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심지어 함께 온 자들은 병사들도 아니었다. 테세우스는 불길한 마음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후두두둑.
하지만 그 순간 자신의 얼굴을 스치고 떨어지는 검은재를 발견하고는 입을 벙긋거릴 뿐, 어떤 말도 뱉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할 길이 없지만 제가 본 것을 말씀드리자면 베수비우스 산이 검은 연기와 함께 불카누스의 불을 토해냈고 그로 인해 폼페이의 하늘이 검은재와 돌덩이로 뒤덮이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저희는 제 때 빠져올 수 있었지만 다른 배나 사람들은 어찌되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수석 백부장이 베수비우스(베수비오) 화산이 아니라 산이라고 언급함은 이 당시 로마인들은 베수비우스 화산이 화산인 줄도 몰랐을뿐더러 화산폭발을 이르는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베수비우스 화산이 폭발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베수비우스 화산이 폭발했다고? 어째서? 폼페이가 언제 화산재에 뒤덮였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카이사르가 활동하던 시절에 폭발하지는 않은 걸로 아는데 그게 왜 지금 폭발해?’
테세우스의 짐작대로 베수비우스 화산은 서기 79년 8월 24일, 공교롭게도 불카누스 축제일에 맞춰서 폭발했고 불과 18시간 만에 폼페이를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니 역사대로라면 폭발이 일어나기까지 아직 140년 가량이나 더 남은 일이었다. 지금은 BC 75년 멘시스 페부루아리우스(2월)였으니 말이다.
잠시 멍한 눈으로 하늘에 떨어지는 검은 재를 바라보던 테세우스는 수석 백부장 오필리우스에게 말했다.
“그.. 그 일이 언제 발생한 것인가?”
“이틀 정도 되었을 겁니다. 폼페이를 떠난지 만 이틀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폼페이와 이곳 시칠리아의 파노로모스(팔레르노)의 거리는 얼추 300km 정도 된다. 3단 갤리선의 이동속도는 4~5노트 정도, 전투시에는 7~8노트 정도의 속력을 낸다. 형편없이 망가진 트라이림으로는 제 속도도 내지 못했을 테니 이곳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은 수석 백부장 오필리우스의 말대로 이틀 정도 걸렸을 것이다.
또한 화산재는 하루만에 300km 그 이상까지 날아갈 수 있었다. 그러니 이곳을 뒤덮기 시작한 검은재는 바로 베수비우스 화산에서 날아온 화산재가 분명할 것이다. 물론 테세우스가 화산재가 어디까지 날아가는지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베수비우스 화산이 폭발한 마당에 검은재의 원천을 짐작하는 게 뭐 어려운 일이겠는가?
‘역사가 바뀌었다. 나로 인해 역사가 뒤틀렸기 때문인가?’
테세우스는 답답함을 느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테세우스를 향해 오필리우스가 다시 말했다.
“상황이 매우 급박하여 급히 탈출하기는 했지만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테세우스는 냉정을 되찾으며 그에게 질문했다.
“왜 이곳까지 오게 된 건가? 시칠리아보다 가까운 지역도 많았을 텐데 말이야.”
“그건 제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테세우스가 눈을 돌려 그를 바라보자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사내가 서 있었다.
“본 함의 트라이에라코스, 라에리우스라고 합니다.”
트라이에라코스는 함장을 이르는 말로 백부장과 함장의 관계는 상황과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랐지만 대개 협력하며 배를 이끌었다. 간단히 백부장은 전투부대를 지휘하고 함장은 수병이나 노잡이를 지휘하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이들 외에도 베네피카리우스라는 행정보급관과 몇몇의 행정관들이 승선하여 함께 근무했다.
물론 이 함선에는 프리무스 필루스가 탑승하고 있었으니 대부분의 지휘권은 오필리우스가 획득하고 있었을 것이다. 보아하니 지휘권 문제를 거론할 만큼 여유로웠던 상황은 아닌 듯하지만 말이다.
“머리는?”
라에리우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폼페이 탈출 때 날아온 돌멩이에 머리를 얻어맞았습니다. 정신을 놓기 전 폼페이로부터 멀리 떠나도록 부하들에게 지시해두었다가 눈을 뜨니 이 근방이었습니다.”
테세우스 역시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기에 침음을 흘릴 뿐이었다.
“음······.”
테세우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피난민들을 바라보며 당면한 일부터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호라티우스.”
“예.”
“파노로모스 관청에 사람을 보내 이일을 알리고 저들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해라. 필요하다면 내 이름을 거론해도 좋다.”
“알겠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난리란 말인가? 못해도 수천 명이 이번 폭발로 인해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폼페이에 있을 때 베수비우스 화산이 폭발할까 노심초사하던 일이 떠올랐다. 그런데 정말로 폭발이 일어날 줄이야.
테세우스는 심각한 눈으로 검은재가 날아드는 서북쪽 방향을 바라봤다.
*
“저수지의 물이 바닥이 보일 정도로 메말랐던데 확인해 봤나?”
폼페이의 두움비르(자치 집정관)가 입을 열었다.
“아쿠아리우스(수도기사)는 뭐라고 하던가?”
“그게 원인불명이라고 합니다.”
“원인불명? 저수지의 물이 바닥을 드러냈어! 원인을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나?”
“그게······. 아쿠아리우스라고 알 수 없는 게 당연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당연해? 지금 그걸 말이라고! 저수지의 물이 메말랐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몰라서 하는 소리인가?”
“물론 압니다. 하지만 저수지뿐만 아니라 이상한 일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저수지가 메마르기 전에는 물고기가 단체로 폐사하는 일도 발생했습니다. 그 물고기를 먹은 사람들 역시 독을 마신 것처럼 위험한 지경에 이르기도 했고 말입니다. 시민들은 저주가 내렸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 신전에 가서······.”
“헛소리! 신전에 가서 제사를 지내면 그러면 메마른 저수지의 물이 다시 채워지나? 북쪽의 갈리아족이 쳐들어올 때 신전에서 제사를 지내면 갈리아족이 물러가냐 이 말이다. 원인을 찾고 그 원인을 해결하라고 그 자리에 앉혀 놓은 거 아닌가?”
“소.. 송구합니다.”
“당장 원인을 찾아! 물고기가 왜 폐사했고 왜 저수지의 물이 사라지는지 찾으란 말이다. 이대로 여름을 맞이하면 폭동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 될거야. 그리되면 나는 가장 먼저 이 일과 관련된 자들을 시민들의 손에 넘길 거다.”
“아······. 알겠습니다. 반드시 처리······.”
드드드드득.
“어어어엇!”
“이게 무슨!”
그때 땅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갑자기 일어난 지진으로 인해 건물의 일부가 무너지기까지 했으니 균형을 잡지 못하고 넘어지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폼페이의 두움비르가 그렇게 외칠 때 거대한 폭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쿠르르르릉!
“으허허허헉!”
“으허허헉!”
“이.. 이게 무슨 소리야!”
“두.. 두움비르 플로루스 님 저.. 저기! 베.. 베수비우스 산이!”
두움비르 플로루스는 급히 베수비우스 산을 바라봤다. 산의 꼭대기에서 허연 연기가 맹렬하게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까아아아악!”
“으아아아악!”
이미 곳곳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과 공포에 섞인 고함이 울려 퍼졌다. 갑작스런 지진과 이상 사태에 플로루스는 전례없는 위기감을 느꼈다.
“저.. 저게 대체?”
“프.. 플로루스 님!”
버쩍 얼은 상태로 베수비우스 산을 바라보던 플로루스는 급히 공무원들에게 말했다.
“서둘러 배를 알아봐라! 서둘러라!”
“예?”
“폼페이를 떠날 준비를 하란 말이다!”
“아.. 알겠습니다. 시.. 시민들에게는 뭐.. 뭐라 전할까요?”
“도망치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그래! 아니면 네가 폼페이에 남아서 그것을 알려주던가?”
“아...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면 시키는 대로 움직여!”
“아.. 알겠습니다!”
플로루스의 외침에 공무원은 급히 관저를 뛰쳐 나갔다.
“제길. 이게 다 무슨.”
폼페이가 망하지 않으면 자신이 망하는 날이다. 그러나 목숨을 담보삼아 눈앞에 펼쳐진 전무후무한 위험에 맞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일단 몸을 피신하는 것이 상책이다.”
*
마그마는 심층에서 위로 올라올수록 그 압력이 크게 감소하지만 마그마의 물리적 성질과 그 흐름에 따라 큰 영향을 미친다. 또한 당연하게도 마그마가 지표면에 가까워질수록 지표면은 크게 팽챙하게 된다.
팽창된 그것은 결국 지표면의 껍질을 깨고 분출되게 되어 있다.
정오를 넘어선 시각, 화산 꼭대기의 말랑한 지표면이 갈라지며 마그마가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콰아아아아아앙!!
백열 가스와 경석 등이 상승기류를 타고 무려 28km까지 치솟아 올랐다.
다량의 마그마가 급속하게 분출되자 더는 상승기류를 유지할 수 없었고 이에 열운과 테프라를 발생시키기 시작했다.
열운은 마그마가 분출할 때 크고 작은 용암편이 소용돌이치듯 화산 가스를 내뿜으며 산허리를 흘러내리는 현상을 말했고 테프라는 공중에 날아오르는 퇴적된 화산재를 말했다. 화산 폭발로 인한 위협이 어찌 이것뿐이겠냐만은 이러한 테프라에 얻어맞으면 당연히 즉사할 수도 있었다.
화산 폭발 후 고작 18시간, 만 하루도 되지 않는 사이에 휘황찬란하고 아름다운 관광지로 이름 높던 폼페이는 화산재로 인해 그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영원히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온갖 쾌락이 넘쳐나던 폼페이는 깊고 깊은 절망과 죽음 가운데 자리한 암울한 침묵만 남아 잿더미가 된, 아니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도시의 터 위로 맴돌고 있었다.
자연재해 앞에 인간의 산물은 이토록 무력했다. 수백 년 동안 쌓아 올린 유산과 산물이 고작 단 하루, 그 하루도 채우지 못하고 무너졌으니 말이다.
--- 폼페이 화산 폭발 참고 ---
https://www.youtube.com/watch?v=dY_3ggKg0Bc
확인해보시면 무서움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