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
239. 타협은 없다.
239.
경험은 사람을 강하고 지혜롭게 만들기도 하지만 한없이 나약하고 어리석은 존재로도 변화시킨다. 경험은 뭔가를 판가름하기에 매우 유용하고 편리하지만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 저 사람은 내가 그동안 만나봤는데 참 괜찮은 사람이었어. 그러니까 이 사람은 믿을 수 있어.’ 그 사람이 나를 등쳐먹을 줄 누가 알겠는가?
‘아 그동안 거지 같은 일만 계속되었으니 살아 뭐해. 확 죽어버리자.’ 그 뒤에 상상하지 못할 놀랍고 좋은 일이 생길지 누가 알겠는가?
경험은 보편적인 현상에 대한 편리한 도구일 뿐이다.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버리면 새로운 것을 경험하기도 받아들이기도 매우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경험을 아예 무시한다면? 인류가 쌓아온 참으로 편리한 도구를 스스로 걷어 차버리고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서야 아 그래서 이런 말을 했었구나 라고 뒤늦게 깨닫게 될 것이다.
세월이 흘러 경험이 많이 쌓인 자는 자신의 경험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다. 내가 들었는데, 내가 봤는데, 내가 경험하고 살아봤는데······. 인간의 생은 짧고 그 유한한 가운데 겪은 경험이니 그만큼 놀랍고 소중하며 유용한 자산이겠지만 결국 짧은 생 안에 얻은 아주 단편적이고 좁은 경험일 뿐이다. 스스로를 그 좁은 틀 안에 가둬버린다.
연륜이 적어 경험이랄 것이 없는 자들은 이미 삶을 경험한 자들의 말을 무시한다. 어찌 보면 결국 모두가 자신의 경험을 가장 중요시하기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저들은 경험보다 원함을 따라 움직이길 즐겨한다. 운이 좋은 몇몇은 시대를 흔들 새로운 경험을 쟁취해내기도 하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를 버틸만한 시간과 능력과 환경을 지닌 사람은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다.
세상에 지혜로운 자가 많으면 얼마나 많겠고 그 지혜자라고 한들 어찌 모든 부분에서 지혜로울 수 있겠는가?
하나 지혜로운 사람의 보편적인 특성 중 하나는 결코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 인류의 경험과 지식을 수용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신뢰하지도 않는다. 내가 옳고 네가 틀려 라고 외치지 않고 내가 옳은지 항상 자신을 주시한다.
‘내가 옳다고도 내 방식이 옳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저들보다 내가 낫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정당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 시대에는 이 시대에 맞는 방식이 있을 뿐이고 저들 역시 생존하기 위해 살아갈 뿐이다. 잠깐 선행을 베푼다고 해서 그간 쌓아온 살업이 사라질 것이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나의 행동이 오히려 더 큰 비극을 자아낼 수도 있는 일이다.’
테세우스는 잠잠한 눈빛으로 광장에서 몸싸움을 하며 아우성치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귀족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격화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몸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리저리 밀고 당기는 가운데 머리나 팔다리 등에 상처를 입어 피를 흘리는 자도 있었고 그 광경을 즐거워하며 광소를 터트리거나 분노에 찬 음성으로 고함을 지르는 자도 있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웅덩이를 흐리게 만든다고 이들로 인해 포룸 로마눔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나 다름없이 변했다.
‘그저 마음이 이끄는 대로 움직일 뿐이다. 이미 택했으니 달려갈 뿐이고 내 선택이 내 삶을 어디로 이끌지는 나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잠시 그들을 지켜보던 테세우스는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로마의 시민들이여! 저 테세우스는 평민의 권한을 회복하고 로마의 법을 세우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헛소리!”
“그런 자가 크라수스 재산의 절반을 꿀꺽하고 내뱉지도 않는 것이냐?”
“공공이익을 위해 내놓아라!”
“내어놓아라!”
크라수스나 테세우스 자신을 적대하는 자들이 심어놓은 선동꾼들이리라. 테세우스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다시 외쳤다.
“공공을 위해 내어놓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결단에 찬사를 표합니다. 기부한 그의 모든 재산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용될 것입니다. 단 적법한 절차에 따라 재산을 처분 중에 있으니!”
“적법한 절차? 크라수스가 강제로 얻은 그 땅은 우리 아버지의 땅이었소!”
“내 아버지의 땅도!”
“내 할아버지의 땅이기도 했습니다!”
선동꾼으로 보이는 자들이 우후죽순 나서서 소리치자 테세우스는 그들을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적법한 절차란 바로 그런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억울하게 재산을 빼앗긴 자들은 그만한 보상을 받을 것이로되 거짓으로 재산을 청구하는 자는 헛된 시간과 노력을 들게 만든 대가로 재판에 회부할 것이니!”
크라수스는 절반에 가까운 재산을 테세우스에게 건네줬다.
그러나 테세우스가 재산을 함부로 처분하게 되면 크라수스가 얻은 악명을 테세우스가 일정부분 가져가게 된다. 억울하게 얽힌 사연들을 무시하고 재산을 처분한 셈이니 악명을 떨치고 있는 크라수스야 별반 차이가 없겠지만 테세우스로서는 조금 말이 다르다.
법과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는 자가 자신의 관할 하에 들어온 재산조차 제대로 처리할 수 없다면 누가 그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믿을 자는 그래도 믿겠지만 크라수스나 귀족들이 그 일을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크라수스는 문제가 많은 재산들을 모조리 테세우스에게 넘겨줬고 뭐 하나를 팔려고 해도 그것에 얽힌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게다가 크라수스가 공공이익을 위해 테세우스에게 재산을 넘겨줬고 또한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테세우스에게 달려왔으니 테세우스는 손이 열 개라도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 일이 이토록 어려운 이유는 법적으로 다시 재산을 요구할 수 없게끔 크라수스가 관련된 서류나 증거를 모두 지워버렸기 때문에 누가 원래 주인이었는지 또한 누가 억울한 일을 당했는지 등을 가리는 것조차 어려웠기 때문이다.
도리어 거짓으로 자신이 재산이 주인이었다고 하는 자들은 명확한 증거와 서류를 들이밀었으니 이 또한 크라수스의 계략이었다. 표면적으로 테세우스에게 재산을 증여한 셈이지만 파고들면 그게 아니었던 거다.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재산을 돌려받을 수 있게끔 만들 증거나 서류를 건네서 테세우스로부터 재산을 얻을 수 있게끔 판을 짜 두었던 것이다.
과연 크라수스다운 술수라고 봐야 했다.
그뿐이랴? 대대적으로 자신이 트리뷴에게 재산을 넘겼다는 사실을 누차 소문을 퍼트리면서 정의를 내세운다는 트리뷴은 대체 자신의 재산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등 암암리에 테세우스를 음해하고 있었다.
당연히 소문에 휩쓸리기 쉬운 대중이야 선동꾼들의 선동에 휩쓸려 부화뇌동(附和雷同)하고 있었으니 테세우스로서는 세밀하게 그 일을 검토하려고 해도 그럴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급매하고 공공이익을 위해 사용한다면 크라수스는 테세우스가 잘못 재산을 매각한 점을 부각시킬 것이고 그로 인해 테세우스는 이미지에 제법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팔지 않는다면 공공이익을 위해 내어놓았건만 뒤로 재산을 빼돌리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어떤 일도 벌이지 않는다고 대대적으로 소문을 퍼트릴 속셈이었고 말이다.
재산의 절반을 내놓은 대가로 크라수스는 시민들에 대한 자신의 탐욕스러운 이미지를 반전시켰다. 테세우스가 그 재산으로 좋은 일을 한다면 좋은 이미지를 시민에게 남길 것이며 설혹 그가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손해 보는 것은 없다.
다만 재산의 절반이 사라졌을 뿐, 그 재산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사용된 셈이니 크라수스는 그저 통 큰 투자를 했을 뿐이었다.
재산이 천 만원이 전부인 자가 오백 만원을 기부했다면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재산이 1000억이라면? 500억 기부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미미하다. 크라수스의 재산은 현재 돈 단위로 1698억 달러로 추산되니(대략 202조 3167억 원) 재산의 절반을 기부했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솜털만큼도 없을 것이다.
또한 그 절반이라면 100조가 넘는 엄청난 금액이다. 뭐 전부도 아니고 절반 기부한 것으로 무슨 온 로마가 들썩거리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금액의 규모 자체가 일반인의 기준을 까마득하게 넘어선 것이기 그럴 수밖에 없었다.
“법에 의거한 서류와 증거를 내밀어도 재산을 돌려주지 않는 저의가 무엇이란 말이오!”
“맞소! 내 재산을 내게 주시오! 법과 정의를 세운다는 트리뷴이 재물에 눈이 팔리기라도 한 것이오!”
“감히! 트리뷴께!”
“어디서 사기를 늘어놓는 것이란 말이냐!”
“트리뷴이 그동안 평민들을 위해 행한 일들을 알고 하는 소리냐?”
“이 협잡꾼들을 당장 끌어내라!”
“끌어내!”
그러자 이번엔 테세우스를 옹호하는 자들이 소리치며 저들을 끌어내려고 했다. 테세우스가 무슨 말을 뱉을 때마다 이런 일이 로마눔 광장에서 계속 발생하고 있었다.
“놔라! 정당한 법에 호소하려는 것이 잘못이라면 트리뷴의 정의구현은 결국 자신의 영달을 달성하기 위한 아주 훌륭한 표구밖에 더 되겠는가? 어디 내 말이 틀렸는가?”
“맞소! 그를 내버려 두시오!”
“트리뷴은 이 일에 대해 적법한 해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법과 정의에 따라 처리하려 한다면 증거와 서류를 무시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테세우스는 이 모든 일을 예상했다. 크라수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아주 순조롭게 일이 풀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나 그는 크라수스의 제안을 거부했다. 호의로 하는 제안이 아니었고 독이 든 성배나 다름없는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크라수스가 자신에게 호의를 표할 것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그는 그 일을 통해서도 자신을 제어하려고 들었을 것이다. 지금보다 더 악랄하고 정교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갉아먹었을 것이다.
그래서 거부했다.
제안을 거부했다면 기부한다는 재산도 받지 않으면 될 일 아닌가? 이 모든 일을 예상했다면 거부하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 아니겠는가?
테세우스가 크라수스의 의도와 이 모든 상황을 예측했음에도 크라수스의 재산을 받아들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크라수스가 내밀은 재산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크라수스 역시 이것까지 계산하고 자신에게 재산을 건네줬을 것이다. 명분보다 실리를 따지는 테세우스의 성품을 꿰뚫어 본 것이리라. 이건 히스파니아 사건만 주시하고 있었다면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일이니 크게 놀라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말했지만 크라수스로서는 잃을 것이 없다. 테세우스가 자신이 기부한 재산을 가지고 정말 성공적으로 공공이득을 위해 사용한다면 테세우스가 얻는 명성과 더불어 자신의 명성 역시 높아질 것이고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목 안의 가시 같은 테세우스를 물 먹일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수단이 될 것이다.
또한 이번 기회에 사람들은, 특히 귀족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의 금력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 다시금 깨닫게 되리라. 재산 자랑은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다. 그로 인한 영향력은 덤으로 얻게 될 것이고.
그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재산을 올바로 분배하든 하지 못하든 크라수스는 자신의 영향력을 증대시킬 수 있다. 말했지만 그가 손해 본 것은 오직 하나, 재산이 절반으로 줄었다는 점뿐인데 재산이 절반으로 줄어도 그는 여전히 로마 최고의 거부였고 그만한 재산을 구가한 실력 역시 어디로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지를 쇄신시켰으니 그로 인한 시너지효과로 더욱 많은 재산을 얻을 수도 있겠지. 그가 어떤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재산을 불릴지는 딱히 놀라울 일도 아니었다.
이것까지 읽었기에 테세우스는 크라수스의 질주에 제동을 걸어야 했다.
‘어찌 알고 과거 토지나 저택과 연루된 재산들을 모두 내게 넘겼는지 모르겠지만······. 이 일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테세우스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실 회의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다. 크라수스의 기부 규모가 워낙 대단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과정은 생각하지 않는다. 결과만 볼 뿐이지. 그가 어떤 잘못을 했던 간에 그것을 덮고도 남을 인상을 사람들에게 남겼다면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그것만 대두될 뿐이다.
“그만!”
테세우스가 짧고 단호하게 외쳐 그 모든 분란과 혼란을 잠시나마 종식 시켰다.
‘두 번째 이유이자 내가 크라수스의 재산을 받아들인 진정한 이유.’
크라수스가 이것까지 예상했다면 그의 인물됨이 어찌되었던 간에 그는 정말 놀라운 식견을 가진 자라고 평할 수밖에 없었다.
“말했듯이 재산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처리될 것이오. 하나 오늘 내가 광장에서 연설을 행하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러니 그 부분은 잠시 넘어가도록 하지요!”
“가장 중요한 부분을 넘어간다니!”
“지금 자신의 비리를 인정하는 것이오!”
“허!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려고!”
그를 비방하는 자들의 목소리가 다시금 시끌벅적하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