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237화 (237/298)

# 237

237. 타협은 없다.

237. 타협은 없다.

‘지독하리만치 불공평한 세상이다······.’

온갖 고난과 고통,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는 자들이 그렇지 않은 자들보다 어리석거나 악하기에 그런 것이라면 심정적으로나마 납득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태어나자마자 중한 병에 고통당하는 아이는 온전한 신체로 온갖 죄를 저지르는 악인보다 죄가 중해서 고통당하는가? 미처 뱃속에서 태어나지도 못하고 스러진 미약한 생명은 세상을 활보하는 사람들보다 가치 없는 생명이라 세상의 빛조차 보지 못하고 스러짐을 당하는 것인가?

많은 것들을 누리는 자들이 정녕 누릴만한 어떤 자격을 갖추었기에 그 모든 것들을 누리는 것이란 말인가? 똑같이 태어나도 누구는 사랑이 넘치는 안락한 가정과 안정된 사회에서, 누구는 사랑을 받기는커녕 학대를 받으며 자라난다.

하나 세상은 동일한 잣대를 들이밀며 그들을 가른다. 너는 좋은 아이, 너는 나쁜 아이. 뭐 틀린 말은 아니다. 태어나 받은 것이 다르고 배운 것이 다르니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성품이나 자질이 좋다면 그건 그것대로 기적일 것이다.

공평? 그건 어디 연회장에 나갈 때 걸치는 장신구쯤 되던가? 부모가 자신의 자녀들을 대할 때조차 공평하지 않은 것이 세상인데 공평? 그건 어디 백억 광년쯤 존재하는 미지의 별에나 존재하는 단어인가?

테세우스는 배 아래 꾀죄죄한 몰골로 결박된 아이들을 바라봤다.

노예로 팔릴 아이들이다. 저들 가운데는 납치된 아이도 있을 것이고 부모가 직접 판 아이도 있을 것이고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스스로 잡힌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기구한 저들의 사연이야 수도 없이 많을 테지만 그 결말이 비극이라는 점만은 동일할 것이다. 비쩍 마른 몰골로 포박당한 삶이 희극은 아니지 않겠는가?

테세우스는 저들을 바라보며 어떤 말도 뱉을 수 없었다. 아니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비일비재한 일이다. 이날 이후로도 비슷한 형태로 혹 더 악한 형태로 수천 년간 지속되는 일이다. 거센 풍랑을 막고자 손을 이리저리 흔들어봐야 거센 풍랑의 바람 한 점 역시 변하게 할 수 없다. 여기서 이들을 구하느니 마느니가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러니 구태여 눈살을 찌푸릴 것도 없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 퀴퀴한 배 밑바닥의 광경따윈 뇌리 저편으로 사라지고 화려한 로마의 정경이 펼쳐질 것이다. 정 마음이 불편하다면 이들을 구해주고 선한 일을 했다며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면 될 일이다.

너무 소극적인 대처가 아니냐고? 그럼 어찌하랴? 비극이 만연한 세상에서 모든 비극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날뛰기라도 하란 말인가? 대체 무엇이 바뀌는가? 스스로의 삶만 피폐해질 뿐이고 사실상 바뀌는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어찌할까요?”

선원으로 보이는 자가 테세우스의 눈치를 살피며 질문을 던졌다. 테세우스는 아이들에게 눈을 거두며 천천히 말했다.

“풀어주고 배불리 먹이고 쉬게 해라.”

“그.. 그 후에는 어찌.”

그 질문에 테세우스는 선원을 지그시 바라봤다.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테세우스의 서늘한 눈을 마주한 선원은 흠칫 놀라며 몸을 떨었다.

“아.. 알겠습니다. 뭐해! 풀어줘!”

선원이 외치자 그와 함께 겁을 잔뜩 집어먹은 이들이 부랴부랴 움직이기 시작했다. 테세우스는 그런 저들을 내버려 두고 갑판 위로 올라갔다.

끼이익 끼이익.

나무계단이 그의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으나 부서지는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배의 외관만큼이나 계단 역시 세월의 흐름을 버티지 못하고 낡기는 했으나 그 정도로 낡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갑판 위로 올라서자 그곳에는 나디르가 자리하고 있었다.

“노예상을 겸하고 있는 상인이었습니다.”

노예와 무역을 겸하는 상인이 어디 한둘이던가? 아주 흔하디흔한 상인 중 한 명에 불과하다는 소리였다.

“다만 가레노스 그자가 다른 자들과 다른 부분은······. 음.”

나디르는 보고를 이어가다가 뭔가 꺼림칙한 표정으로 말을 잠시 멈췄다. 그 모습에 테세우스가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살펴보니 전부 아이더군.”

“······. 예.”

노예로 쓰기에 아이는 성인보다 훨씬 무가치하다. 그런데 배 밑바닥에는 전부 아이밖에 없었다.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별로 듣고 싶지 않군. 거래대상자가 크라수스는 아닐 테고 누구지?”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가레노스는 크라수스의 뒤를 파다가 드러난 자다. 그러니 가레노스가 무엇을 하려고 했든지 간에 크라수스와 거래하는 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니 나디르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가레노스가 선물이라더군.”

“선물? 그 크라수스가 말입니까?”

테세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디르에게 말했다.

“어젯밤 나를 찾아와서 제안을 하더군. 자기 재산 절반을 받고 무혐의 처리를 해달라는 것이 제안의 골자였지.”

“제안을 수락 하셨군요.”

“거부했다.”

“예?”

“그런데도 내게 재산의 절반을 맡긴다더군.”

“제안을 거부했는데도 재산의 절반을 테세우스 님께 말입니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정치적인 술수가 다분하게 배어있는 것이겠지만 그것까지 거부할 생각은 없다. 어차피 그리 공표하고 다닐 테니 그럴 바에는 얻을 것은 얻는 것이 효율적일 테고.”

“으음. 세인들의 시선과 여론을 무기로 삼을 심산으로 봐야 합니까?”

“드러난 부분만 본다면 일단은. 어쨌든 그래서 거래대상자가 누구지?”

“그게······. 음. 세네토르 하드리아누스입니다. 확실치 않아서 말씀드리기 저어되는 이름이었는데 크라수스가 그가 직접 선물이라고 언급했다면······.”

“하드리아누스?”

“헛소리 말라며 가레노스 그자를 죽기 직전까지 족쳤는데······. 후우. 이게 사실이라면 이는 함정이 확실합니다.”

세네토르 하드리아누스는 여섯 거두 중 하나로 세네토르 칼두스와 함께 중립파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크라수스와 연관된 가레노스가 엉뚱한 이름이나 뱉고 있으니 나디르와 호라티우스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다 못해 크라수스 계보에 속한 의원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심하게 가레노스를 추궁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디르는 크라수스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거나 두려움이 대단해서 끝까지 불지 않는 것이라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했는데 이제 보니 가레노스의 말이 진실이었던 것이다.

“어느새 세네투스의 세력 구도까지 파악했던가?”

“여섯 세네토르의 이름이야 로마에 오기 전부터 듣던 이름이었습니다. 어쨌든 테세우스 님! 이 일과 별개로 하드리아누스를 공격한다면 크라수스 계보에 속한 세네토르들은 물론이거니와 중립파에 속한 의원들에게도 극명한 적의를 사게 될 겁니다. 이건 크라수스의 노림수가 분명합니다.”

“쉬울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만만치 않구나.”

“관련된 자료를 폐기처분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디르의 말에 테세우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일을 그런 식으로 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할 거라면 크라수스의 제안 역시 받아들였겠지.”

“하지만 테세우스 님. 그렇게 되면 크라수스가 세네투스의 여론을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켄소르 브루투스 역시 테세우스 님에게 호의를 가진 사람이 아니니 테세우스 님이 오히려 역풍을 맞아 침몰할 수도 있는 노릇입니다. 이번 한 번만은 눈감고 넘어가셔야 합니다. 상황이 안정된 다음에.”

“이 일이 크라수스와 무관한 일이라면 네 말대로 상황이 진정된 후에 나서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겠지. 하나 바로 처리하지 않는다면 하드리아누스는 꼬리를 자를 것이고 크라수스는 이 일을 어떤 식으로든 사용할 것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그건 내게 어쩌면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할 것이다.”

“하오나 테세우스 님.”

“내게 넘긴다는 토지문서를 비롯한 재산들도 섣불리 팔기도 어려운 미묘한 재산들일 것이다. 그 일이 공표되면 크라수스에게는 차마 요구하지 못한 수많은 자들이 자신의 재산을 돌려달라고 득달같이 내게 달려오게 될 터, 그 가운데는 정당한 요구를 하는 자도 있겠지만 기회를 틈타 한 몫 챙기려는 자들도 있을 것이며 처리하기 애매한 상황도 부지기수겠지. 그렇다고 내 마음대로 그 모든 것을 처분한다면 그것을 빌미삼아 책잡을 계산까지 하고 있을 것이다. 결국 일일이 하나하나 세심하게 살펴봐야겠지.”

“받지 않으시면 되는 문제 아닙니까?”

“받지 않는다면 크라수스는 그 재산을 자신의 영향력을 증대하는 데 사용하겠지. 어떤 식으로든 내게 득이 될 것이 없는 행동이니 차라리 그가 자신의 재산을 내게 줄 때 내가 해결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그나마 나은 선택일 것이다. 그만큼 더 어려운 일을 겪어야 하겠지만 말이야.”

“후우.. 사실 트리뷴도 마지못해 받은 것이 아닙니까? 또한 누가 트리뷴의 노력과 수고를 알아준답니까? 트리뷴에게 도움을 받은 자들도 지나고나면 모두 잊어버릴 겁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 그때뿐입니다. 그게 사람이고 그게 현실입니다. 스스로를 챙기셔야 합니다. 어쨌든 테세우스 님께서는 오늘 많은 생명을 구하셨습니다. 그것으로 끝내면 될 일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무가치하고 비효율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한 사람의 눈물이라도 씻어내는 일이라면 가치가 없는 일은 아니겠지. 그래도 내게는 최후의 보루가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이 뒤틀리면 그때는 전부 베어버리면 될 일이다.”

테세우스는 그렇게 말한 뒤 싸늘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물러설 것이라 생각할 때 전진하고 전진할 것이라 생각할 때 물러선다. 그러니 관련된 증거를 확실하게 확보해라. 길을 정한 이상 타협은 없다.”

나디르는 말없이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토페트에서 목숨까지 도외시하고 도적들을 베어넘긴 어린 소년의 실루엣이 그와 겹쳐졌다. 이런 사람이었다. 한없이 냉철하다가도 한없이 열정적인. 그가 결정을 내렸으니 자신을 따를 뿐이다. 그 끝이 죽음이든 혹 무엇이든 적어도 후회는 없으리라.

“결단을 내리셨다면 따를 뿐입니다.”

테세우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로마항 앞으로 거세게 흐르는 티베리스 강을 바라봤다. 도도하게 흐르는 저 강물도 세월이 지나면 마를 때가 있음인데 인간의 탐욕은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기세를 더해갈 뿐이다.

뒤는 생각하지 않는다. 불 같은 마음이 이미 일어났으니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태울 뿐이다.

*

“비단 제가 위험하기 때문에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이 크라수스는 시작일 뿐입니다. 그는 위험한 사람입니다. 가히 사자와 같은 기세를 가진 사람이니 내버려 둔다면 로마 전체를 삼키고도 남을 자입니다.”

크라수스는 하드리아누스와 칼두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딱히 제 편에 서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 테세우스 그자가 득세하면 득세할수록 파트리키의 권한은 축소되고 축소되어 종국엔 그 흔적마저 사라지게 될 겁니다. 세네투스에도 플레브스의 성난 외침만이 존재하게 되겠지요. 그걸 원하시는 바는 아니지 않습니까?”

“내게 무엇을 원하는 것이오?”

하드리아누스가 굳은 안색으로 크라수스에게 말했다.

“원하는 것이라니요? 이거 오해하고 계시는 군요.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하셨을 수도 있겠군요. 트리뷴 테세우스가 하드리아누스 님의 뒤를 미친 듯이 파헤치고 있다는 소식 말입니다.”

“뭐라? 그자가 감히!”

“저는 원하는 것이 없지만 테세우스 그자는 하드리아누스 님께 원하는 것이 아주 많은 모양입니다.”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던 칼두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분간이나마 당신과 뜻을 함께할 것이오. 듣기로 달마티아 정벌이 멀지 않았다고 하더군.”

폼페이우스가 귀환하면 그의 계보에 속한 자들의 입김이 그만큼 강해진다. 무엇보다 폼페이우스의 과감한 요청을 막으려면 크라수스 계보에 속한 자들과 손을 잡을 필요가 있었다. 아울러 크라수스의 말따라 트리뷴의 방종을 더는 두고 보기 어려워졌다. 감히 세네투스를 건드리려 들다니.

간과할 수 없는 것이 그와 줄이 맞닿아 있는 자가 켄소르 브루투스였기 때문이다. 테세우스는 물론 브루투스 역시 켄소르로서 뛰어난 공을 세우고자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상황, 먹잇감을 던져줘서 저들을 살찌운다면 그 후의 일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게다가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하드리아누스를 보니 뭔가 크게 책잡힐 일을 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내키지는 않지만 지금은 크라수스와 뜻을 같이해야 할 시점이라 여겨졌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앞으로의 일은 앞으로 논의하면 될 일이지요.”

크라수스는 뱀처럼 간교한 눈빛으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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