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
232. 그림자.
232.
카이사르는 고요한 눈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이미 알고 있을 듯하지만 나는 15세에 가장이 되었고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도움으로 16세에 플라멘 디알레스(유피테르의 고위신관)가 되었소. 영광스러운 직분이지만 마리우스의 본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당신이라면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 그러니까 원래대로라면 나는 글라디우스를 잡을 필요도 없었고 잡아서도 안 되는 삶을 살아야만 했소. 그러던 것이 본의 아니게 술라의 추격을 피해 소아시아로 달아나면서 그 굴레가 깨어졌지. 실로 기이한 일이오. 하긴 운명이 인생을 어떻게 바꿔놓을 수 있을지 그 누가 알 수 있겠소?”
카이사르는 테세우스가 선물로 준 글라디우스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검집에 집어넣었다.
스르릉 착!
“테세우스 당신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봤소. 데메트리우스와의 일, 세르토리우스와 히스파니아에서의 일, 그리고 이곳 로마에서의 일까지. 전부는 아니지만 제법 공들여 알아봤으니 표면적으로나마 그대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오.”
그는 말을 잠시 멈추고 테세우스를 유심히 바라봤다.
“내가 들은 소문만 사실이어도 그대는 전무후무한 용장이자 맹장이더군. 심지어 지략까지 겸비한. 믿지 못할 것도 없지. 그대의 용력과 무예는 본 적이 없지만 지략이 넘치는 사람이라는 건 내가 직접 경험한 일이니까.”
“그저 살아남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을 뿐입니다.”
“살아남기 위한 노력이라? 뭐 틀린 말은 아니겠지.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저 로마항의 한낱 노예조차도 살아가기 위해 땀과 피를 매일같이 흘리오. 그러나 저들 모두가 유의미한 성과를 얻는 건 아니지. 그대의 노력 때문인지 아니면 그대가 타고난 용력이 대단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신들의 보살핌으로 그대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소. 그 이유를 아는 것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겠소? 그대가 하는 노력을 내가 한다고 그대만큼의 성과를 얻으란 법이 어디 있으며 내가 그대도 아닌 바에야 이제 와 뛰어난 용력을 얻기란 요원한 일이며 마지막으로 그대를 향한 신들의 호의를 내가 뭐라고 돌릴 수 있겠소? 그러니 내게 중요한 것은 그대가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나의 연약하고 부족한 점을 채워줄 수 있는 조력자라는 사실 한 가지요. 그걸 생각하면 나 역시 신들의 총애를 한 몸에 얻고 있는지도 모르겠소. 당신처럼 강력한 조력자를 내 옆에 붙였으니까.”
“음.”
테세우스가 침음을 뱉자 카이사르가 뭔가를 회상하는 눈으로 입을 열었다.
“소아시아의 겨울은 혹독했소. 뭐 지금 생각해보면 로마와 크게 다를 것도 없다고 여겨지지만 나를 죽이려는 자의 손을 피해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맞이한 겨울은 내 마음까지 시리게 만들었지. 하지만 그 겨울보다도 내 마음을 시리게 한 것은 내가 어쩔 수 없이 보고 들어야만 했던 피의 흔적들이었소.”
테세우스가 침묵을 지킨 채 자신의 말을 경청하자 카이사르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평생을 신관으로 살아야할 것이라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사실 한편으로 크게 안도하고 있었소. 안락한 로마에서 한 평생 안락한 삶을 누리다가 생을 마감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지. 하지만 운명은 내 삶과 전혀 상관이 없을 것같던 전장을 내게 가져다줬소. 전장은 언제나 그렇듯 끔찍하지. 그곳엔 낭만도 추억도 없고 잔혹함과 역겨움만 있을 뿐이니까. 전장을 마주했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이 무엇인지 아오?”
“두려움. 미쳐버릴 것같은 두려움. 그래서 도리어 광기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테세우스의 담담한 대답에 카이사르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장에서 살아남는 대신 전장의 광기가 나를 사로잡은 것인지도 모르겠소. 아니면 찰나의 순간에 생사가 오가는 전장의 치열함이 내 깊숙한 곳에 숨겨놓았던 불꽃을 거세게 타오르게 했던가?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카이사르는 말을 멈추고 테세우스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전장은 많은 것을 내게서 앗아갔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내게 안겨줬소. 그 중 하나가 싸울 때와 싸우지 말아야 할 때, 적으로 삼아야 할 자와 삼지 말하야 할 자를 구분하는 능력이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크라수스와는 지금 싸워야 할 때가 아니고 마찬가지로 그를 지금 적으로 삼아야 할 자도 아니오.”
“그것이 요청할 일이라면······.”
테세우스가 말을 꺼냈으나 카이사르는 그의 말을 자르며 다시 말했다.
“소아시아에서 끔찍한 것들을 많이 보고 들었소. 그 중 하나가 사람을 고문하는 방식이었소. 저들은 적군을 고문하기 위해 아주 잔혹한 짓을 벌이곤 했는데 이 고문에는 아주 간단한 준비물 세 가지가 필요하오. 금속으로 된 적당한 크기의 그릇과 불, 그리고 살아있는 쥐.”
테세우스는 표정을 굳히며 카이사르를 바라봤다.
“상체를 탈의시키고 희생자의 배에 살아있는 쥐를 그릇으로 막아 도망칠 수 없게 만든 뒤 불을 피워 그릇의 윗부분을 서서히 달아오르게 만드오. 그러면 어떤 일이 발생할 것 같소?”
살아있는 쥐는 불을 피해 어떻게든 살고자 희생자의 뱃가죽을 갉아서 그 내장 속으로 파고든다. 결국 그 고문을 당한 자는 끔찍한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
“한낱 쥐도 살아남고자 사람을 뜯어먹소이다. 심지어 당신이 궁지로 몰고자 하는 자는 술라 사후 로마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하다 일컬어지는 크라수스요.”
“전장 이야기를 하셨으니 저도 전장의 일을 말하겠습니다. 일단 적으로 만났다면 죽이지 않으면 죽는 것이 전장의 법도입니다. 마찬가지로 기회가 왔을 때 알량한 자비심따위로 적의 숨통을 끊어놓지 않는다면 그것은 언제고 반드시 화근이 되어 돌아오는 법입니다.”
항우가 유방을 죽일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그 중에는 항우가 자신의 자비심과 넓은 도량을 보여주고자 유방을 놓아준 일도 있었다. 그리고 결국 그 항우는 유방에게 죽임을 당했다.
“크라수스를 너무 얕보는군. 만약 내가 크라수스라면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을 것이오. 자존심과 체면이 중요하다고는 하나 그 모든 것들도 생존한 이후에나 중요한 것들이지. 그러니 그를 궁지로 몰아간다면 당신에게도 이로울 것이 없소.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보는 것이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 될 것이오. 당연히 내게도.”
“아마도 그렇겠지요. 그러나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먼저 시작한 전쟁도 아니었으니 제가 그치고자 해서 그칠 수 있는 전쟁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적당하게 타협을 할 시점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운명이라고 하셨습니까? 그 운명이 저를 피할 수 없는 전쟁으로 이끌었습니다. 크라수스의 일도 같은 맥락이라고 봐야겠지요.”
“기어코 말살시켜야겠다?”
테세우스가 고개를 주억이자 카이사르는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움직이지 않을 때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잠잠하다가 움직일 때는 거센 폭풍처럼 몰아친다라······. 하하하하.”
한 차례 크게 웃음을 터트린 카이사르는 웃음을 지우고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내 감이 틀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군.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보다 테세우스 당신이 더 무겁게 느껴지다니······. 이건 누가봐도 이상한 일이 아닌가? 어쩌면 내가 미친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흥미롭군.”
“······.”
테세우스가 침묵을 지키자 카이사르가 말을 이었다.
“내가 요청할 일은 한 가지. 그대를 부하로 삼을 수 있다면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품에 안고 싶지만 그건 지금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뒤로 미루겠소.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요청을 하겠소. 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에게 끊을 수 없는 우정을 요청하오.”
“음?”
테세우스는 생각해보지 못한 제안에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카이사르를 바라봤다. 카이사르는 테세우스가 건넨 글라디우스를 슬쩍 바라본 뒤 미소를 지은 채로 입을 열었다.
“이 검의 가치가 세인들에게 알려지면 부르는 것이 값일 것이오. 검을 자르는 검이라니······. 무장이라면 누구나 탐하는 검일 테지. 하나 이 검과 훈련된 센튜리(백인대, 켄튜리) 둘 중 하나를 내게 택하라 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센튜리를 택할 것이오. 뛰어난 무기보다 뛰어난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내게 이득이고 사람의 호의를 얻는 것이 재물을 얻는 것보다 뛰어나니 나는 당신의 마음을 얻고 싶소. 이를 테면 어떤 거래관계보다도 우선하는 친우관계를 말이오.”
“저와 거리를 두는 것이 이로운 선택이실 겁니다. 카이사르 님께서는 저와 마주한 상황이 다릅니다.”
“내가 성에 안 찬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겠소?”
테세우스는 카이사르의 말에 꺼내려던 말을 삼키고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선택을 후회하는 것 역시 사람의 특권이다. 사람이 어찌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나? 하나 그 또한 운명이리니 후회한 일이 복이 될지 기뻐한 일이 화가 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테세우스. 나와 함께 하겠나?”
“하하하하!”
이번에는 테세우스가 크케 웃음을 터트렸다. 카이사르. 카이사르 과연 인물이었다. 지닌 바 배포나 상황판단력, 흐름과 기세를 읽는 통찰력 등이 비상식적일 정도로 뛰어났다.
크라수스는 물론 폼페이우스와 상대하겠다는 건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명성과 재력이 합쳐지는 결과를 낳을 테니 이는 술라가 재림한 것과 다름없는 어쩌면 더 강한 파급력을 자아낼 것이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그 모든 흐름을 읽고도 자신과 함께 하겠다는 거다. 어떤 거래관계가 아니라 생사를 자신과 나누겠다는 소리이니 테세우스라고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으랴? 거래관계였을 때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으면 되었다. 그 관계를 넘어서겠다는 건 기쁠 때 함께 웃고 슬플 때 함께 울겠다는 소리다. 그러니 그 일로 인해 같이 멸망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내 호의를 얻겠다고 했던가?’
단순히 어떤 감정적이고 모호한 감만으로 판단을 내린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행적을 자세하게 파고든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히스파니아 등지에서 일어나 일을 토대로 나와 함께하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에 대해 수없이 고심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와 함께하겠다고 결정을 내렸다는 것은······.’
저들보다 자신을 크고 무겁게 봤다는 소리고 그건 곧 자신을 신뢰한다는 뜻이었다. 테세우스는 한 차례 크게 숨을 들이쉰 다음 카이사르를 바라봤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 이름을 걸고 그 요청을 받아들이겠다.”
카이사르는 다시 대소하며 외쳤다.
“하하하하! 좋다! 좋아! 이런 날 술이 빠질 수 있겠는가?”
그 말에 테세우스가 다소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음. 보다시피 이곳은 대장간이라······.”
“나를 어찌 보고 그런 말을 꺼내는 것인가? 연회는 이미 마련되었다. 연회장으로 이동할 일만 남았지. 다만 그 꾀죄죄한 복장은 어떻게든 처리해야겠군.”
“연회를 마련해 두었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어찌할 생각이었나?”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큰 위기를 넘긴 것으로 자축하면 될 일이지. 아니 그런가?”
테세우스는 납득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나저나 폰티펙스 막시무스(최고위 제사장) 준비는 어찌되고 있나?”
“그걸 어찌?”
잠시 당황하던 카이사르는 이내 곧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본색을 드러내는군.”
“더는 감출 필요가 없으니까.”
“감출 필요가 없다라? 하하하하. 그거 참으로 듣기 좋은 소리고 듬직한 소리로군. 암 그렇게 해야지. 내가 가진 특수한 상황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머저리같은 짓이 아니겠는가?”
테세우스가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카이사르가 그에게 대뜸 말했다.
“그나저나 어서 옷부터 갈아입지 그러나? 아니면 망치로 모루를 쳐서 포도주를 샘 솟게 만들던가?”
카이사르의 핀잔에 테세우스는 그저 머쓱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