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
225. 돌아온 사냥철.
225.
짧은 털을 휘날리는 사자는 경기장을 종횡무진하며 죄수들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크허허헝!”
“크아악!”
“으아아악!”
경기장에서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은 유흥을 돋우는 흥겨운 음악과 같았는데 지금 들려오는 비명은 지옥의 악마가 부르짖는 괴성처럼 들려왔다.
데메트리우스는 희생당한 죄수를 앞에 두고 이리저리 도망쳐 다녔지만 그것도 이제는 한계였다. 입을 붉게 물들인 사자가 육중한 체구를 깃털처럼 날려 데메트리우스 앞에 섰기 때문이다.
“사.. 살려줘. 누구든 나를!”
사자라니! 차라리 사람하고 싸움을 붙여줘! 대체 어떻게 이런 맹수와 싸우라는 거냐?
아이러니하게도 데메트리우스가 다수의 인물과 함께 사자와 싸워서 살아남을 확률이 숙련된 검투사와 1대1로 싸워서 살아남을 확률보다 높았다. 순식간에 끝나는 경기는 관객들에게 어떤 흥도 돋을 수 없기 때문에 다수의 죄수들과 함께 사자와 싸우게끔 만든 것이다.
그러나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두려울 수 없었다. 사자의 이빨에 물리면 살점이 찢겨나가고 발에 얻어맞아도 성한 곳이 없을 테니 어찌 두렵지 않으랴?
그 사자가 사나운 울음과 함께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뜨겁고 역겨운 노린내가 훅 하니 밀려들어왔다.
멘시스 페부루아리우스 퀸데킴(2월 15일)에 열리는 루페르칼리아 축제의 여흥거리따위로 삶을 마치게 될 줄은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술라의 노예시절 자신의 다짐이 무색하게 자신은 또 다시 피식자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이건 아니야!”
데메트리우스는 두려움을 그치고 삶에 대한 열망을 불태웠다. 소년에 불과했던 테세우스 혼자서도 죽인 사자다. 그에 비해 자신은 성인이고 무기도 그보다 좋았고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었다.
“이렇게 죽지 않아!”
데메트리우스는 젖먹던 힘까지 끌어내 있는 힘껏 창을 사자에게 찔러넣었다.
푸우욱!
“크허허허헝!”
웬걸? 데메트리우스가 찌른 창은 사자의 다리에 박혀들었다. 정확하게는 데메트리우스를 후려치던 사자의 앞발에 말이다.
사자는 고통에 울부짖으며 다른 앞발을 휘둘러 데메트리우스가 움켜쥔 창대를 강하게 후려쳤다. 데메트리우스는 기겁하며 창을 놓았지만 이미 그 충격에 손목이 끊어질 것같은 고통을 느꼈다. 허겁지겁 물러나며 자신이 쥐었던 창을 보니 이미 반쯤 반파되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찌.. 찔러!”
“찔러!”
푸욱! 푸우욱!
데메트리우스의 공격이 성공하고 사자가 주춤거리자 용기있는 죄수들이 사자의 엉덩이와 옆구리에 창을 틀어박았다.
“크아아아아앙!”
사자는 크게 울부짖으며 휙 돌아서며 성한 앞발을 휘둘러 죄수 중 한명의 머리통을 그대로 빠개버렸다. 앞발에 얻어맞은 죄수는 이렇다 할 단말마도 터트리지 못하고 혀를 빼물고 그 즉시 절명했다.
눈알이 튀어나와 대롱거리는 끔찍한 모습을 목격한 데메트리우스는 더욱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표정이 한결 나았다. 조금 전의 공격으로 사자가 입은 상처가 결코 얕지 않다는 걸 데메트리우스도 알았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버티면 조금만 더 버티면 이 지옥같은 곳을 벗어날 수 있다.
데메트리우스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안전한 곳을 찾으려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가 흉포한 살의를 두 눈에 가득 담은 사자와 눈이 마주쳤다.
암사자는 이 지경에 이를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게 만든 원흉을 결코 잊지 않았다. 지금 입은 모든 상처는 한입에 삼켜버려도 시원찮을 저 인간 때문이었다.
사자는 몸을 움츠려 도약력을 비축한 다음 그대로 허공을 찢듯이 날아올랐다. 데메트리우스가 아닌 자들에게는 행운이자 즐거움이었으나 데메트리우스에게는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생에 대한 열망으로 어떻게든 피하고자 몸을 뒤틀었으나 자신의 사냥감을 코앞에서 놓칠 암사자가 아니었다.
싸움기술이나 힘 등은 수사자가 단연 탁월하나 사냥감을 포착하고 사냥하는 사냥기술은 암사자가 더 탁월했다. 사자무리의 특성상 수사자는 무리를 보호하고 암사자는 무리의 식량을 조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데메트리우스의 생을 향한 처절한 모든 노력은 덧없는 행동에 불과했다. 암사자는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 상처를 입힌 원흉을 쉬이 죽일 생각이 없었다.
“크와아아아앙!”
콰드드득!
“크아아악! 아아악! 사.. 살려줘!”
사자는 먼저 데메트리우스의 다리를 물어뜯더니 이내 곧 완전히 몸에서 뜯어냈다. 그러는 와중 데메트리우스가 다른 죄수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저들은 더 이상 사자와 싸울 이유가 없었다. 사자가 분풀이 중이라는 건 저들도 모두 알고 있었고 더 싸울 필요없이 시간만 끌면 많은 피를 흘린 사자가 제풀에 쓰러져 죽을 것이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와아아아아아아!”
“죽여! 죽여!!”
관중들이 아우성치며 데메트리우스의 비극을 즐거워했다. 그 일을 당하는 당사자는 비참하고 미칠 것같은 두려움에 휩싸였지만 누구도 그의 죽음을 동정하지 않았고 불쌍히 여기지도 않았다.
사자는 다시 다른 다리를 잘근잘근 씹어서 뜯어냈다.
“크아아악!”
데메트리우스는 그 고통에 까무러칠 것 같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고통 때문에 정신을 잃을 수도 없었다. 양손을 퍼덕이며 어떻게든 사자를 밀치려고 해봤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랴. 도리어 그것이 사자를 더욱 자극하게 만들어 이번에는 그의 양팔을 물어서 뜯어버렸다.
“아아아아아악!”
“와아아아아아!”
데메트리우스의 비명이 커지면 커질수록 관중의 환호는 더욱 짙어졌다.
“저주받을지어다! 로마여! 저주받을지어다! 이 개새끼들아!”
그러나 공허한 소리에 불과했다.
팔다리를 뜯어낸 사자는 그의 배에 이빨을 틀어박고 데메트리우스의 뜨끈한 내장을 씹었다. 마지막 만찬을 즐기기라도 하듯 느긋하게 말이다.
으적으적 으득으득.
섬뜩한 소음이 연신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데메트리우스는 질긴 자신의 목숨을 원망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 모든 끔찍한 것을 고스란히 겪어야만 했으니까.
“저.. 주. 저주..”
데메트리우스는 악의서린 말과 표정을 지은 채로 기나긴 마지막 숨과 함께 절명했다. 잔혹한 죽음이었다. 산채로 사자에게 뜯어 먹히다가 죽는 죽음이라니······.
하나 데메트리우스가 그간 저지른 악행에 비하면 얌전한 죽음에 지나지 않았다. 데메트리우스는 생전에 저지른 자신의 행동 그대로 당하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여겨야 할 것이다. 그러니 그런 자가 내뱉는 저주가 대체 무슨 효력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
사비누스는 화려하게 장식된 마우레타니아 왕궁으로 들어섰다. 테세우스와 대화를 나눈 후 한달 가량 흐른 시점이기에 마우레타니아에는 벌써 전에 도착했었다. 그럼에도 그가 바로 마스타네소스 왕을 만나지 않은 것은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정세와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서였지만 엄밀히 말해 테세우스의 안배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마우레타니아의 고귀한 왕을 배알하나이다.”
내뱉은 말과는 달리 사비누스가 가벼운 예로 왕을 대하자 주변에 있던 장군과 신하들이 발끈하며 나섰다.
“예가 어디라고 그같은 무례를 범하는 것이냐?”
“전하! 놈을 당장 죽이게끔 허락해주십시오.”
저들의 위협에도 사비누스는 눈 하나 깜작하지 않았다.
마스타네소스는 그런 사비누스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로마가 따로 사절을 보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로마에서 공식적으로 사람을 보낸 것도 아닌데 무슨 연유로 찾아온 것이냐고 넌지시 압박하는 것이리라. 제대로 답변하지 못한다면 왕에 대한 무례를 물어서 능히 사비누스를 죽일 수 있었다. 그것이 어떤 흉이나 책 잡힐 일이 되지 못할 터, 목숨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간당거리는 상황임에도 사비누스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전하를 찾아온 이유는 전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제가 전하를 배알하는 일 자체가 없었겠지요.”
로마시민이라고는 하나 일개 시민이 왕을 보고자 한 것이라면 어찌 왕을 배알할 수 있었겠냐고 반문하는 말이었다.
마스타네소스는 사비누스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짧게 말했다.
“용건을 말하라!”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 님께서는 왕께서 왕의 권한을 되찾은 것과 왕국을 수복한 일에 대해 찬사를 표하셨습니다.”
“흥! 그게 무슨 참람한 말이란 말이냐? 왕께서 누군가에게 찬사를 당할 만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이더냐?”
“옳습니다. 당장 저자를 끌어다가 죽이십시오.”
마스타네소스의 신하들이 왕에게 잘보이고자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사비누스를 죽일 것을 주청했다.
하나 한 사람만은 달랐다. 테세우스와 함께 싸웠던 자이자 그가 아스칼리스의 장군 익타다르와 그 부관 파드와를 죽인 것을 아는 이크람이 그 당사자였다.
이크람은 사비누스를 힐끗 바라본 뒤 마스타네소스에게 말했다.
“왕이시여. 왕에게 언제든 죽일 권한이 있음은 저자도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말할 것인지에 대해 들어보는 것이 우선이 아니겠습니까?”
이크람은 마스타네소스가 매우 신뢰하는 장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매우 불리한 전황에 숨통을 트이게 만들고 정국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는 기회를 준 인물이 이크람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 모든 변화는 테세우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을 이크람은 잘 알고 있었기에 이곳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신중한 태도를 고수한 것이었다.
마스타네소스도 동일한 생각이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사비누스에게 말했다.
“말하라!”
“테세우스 님께서는 왕의 권한을 침해할 생각이 전혀 없으십니다. 앞으로도 왕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하십니다.”
“일개 로마시민이!”
다시 한 신하가 말을 끊고 들어오자 사비누스는 서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역시 그의 말을 끊었다.
“트리뷴에 오른 이를 일개 로마시민이라 칭할 수는 없겠지요. 무엇보다 저는 지금 당신의 왕과 대화 중입니다. 한 번은 왕에 대한 충정으로 비춰질 수 있겠지만 그게 계속된다면? 글쎄요. 판단은 여러분께 맡기겠습니다.”
그 말에 사색이 된 신하가 마스타네소스 앞에 엎드리며 입을 열었다. 최근 왕권강화를 위해 철혈통치를 행하는 마스타네소스에게 조금이라도 밑보인다면 그 즉시 죽임을 당할 테니 당연한 태도였다.
“전하! 저는 결코 그런 의도로 나선 것이 아니오라!”
“그만하고 물러서라! 대체 나의 체면을 어디까지 떨어뜨릴 작정인가?”
마스타네소스가 역정을 내며 소리치자 사색이 된 신하는 급히 물러났다. 그 모습을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마스타네소스가 동일한 눈빛으로 사비누스를 바라봤다.
“나와 우호를 맺고 싶다는 자가 나를 모욕하고자 사람을 보낸 것인가?”
“전하. 트리뷴께서는 팅기스의 일을 예전과 동일하게 두기를 원하십니다.”
그 말에 마스타네소스가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정녕 나를 모욕하기 위해 사람을 보낸 것이란 말이더냐?”
이는 테세우스가 왕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따라서 이크람은 마스타네소스가 왜 화를 내는지는 이해했지만 혈기대로 눈앞의 사비누스를 죽이기라도 하면 자신이 만난 테세우스는 결코 가만히 있을 위인이 아니었다.
“전하. 그는 저희의 아군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생각하시고 잠시 그에게 기회를 주시지요. 모든 말을 듣고 난 후에 저자를 징치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테세우스는 매우 영리한 자였다. 그가 팅기스의 야스미라와 협력관계에 있는 것을 모르지 않으나 현 상황이 예전과 같은 관계를 일방적으로 요구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말을 꺼냈다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소리였다. 그러니 사비누스를 죽일 땐 죽이더라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 먼저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음. 장군이 그리 청한다면 좋다. 기회를 줄 테니 어디 더 말해봐라!”
사비누스는 마스타네소스와 이크람을 바라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트리뷴께서는 왕의 이름으로 팅기스에 대한 야스미라 왕녀의 권한을 인정해주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뭣이라?”
마스타네소스가 황당함과 분노가 뒤섞인 얼굴로 반문하자 그의 신하들 역시 득달같이 소리쳤다.
“팅기스는 마우레타니아의 것이다!”
“전하! 왕을 우습게 보는 무도한 저자를 당장 끌어내 죽여 왕의 위엄과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기강을 만방에 보여주시지요.”
“당장 죽이셔야 합니다!”
가장 열렬하게 나서는 이는 아까 사색이 되었던 신하였음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쯤되면 마우레타니아의 모든 이들이 사비누스를 죽이고자 하는 상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사달을 만든 사비누스는 그럼에도 무덤덤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