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
220. 붉은 눈밭.
220.
아비투스는 피가래가 들끓는 것을 느끼며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대체 어디서 화살이? 허벅지와 종아리 그리고 어깨에도 화살을 얻어맞은 아비투스는 일진(日辰)이 정말 사나운 날이라 생각했다.
아니 달리 생각하면 두 번 죽다 살아난 셈이니 일진이 좋다고 해야 하나?
무수한 화살비에 휩쓸리고도 상처 하나 입지 않는 괴물같은 작자에게 화살을 날리고도 살아남았고 화살에 맞아 차디찬 바닥에 누워 피를 흘리고 있지만 어쨌든 목숨은 부지했다.
그러나 이대로 죽어버리면 일진의 좋고 나쁨이 다 무슨 소용이랴? 아비투스는 궁수였기에 잘 알았다. 방금 떨어진 화살들은 시작일 뿐이다. 따라서 아비투스는 고통에 온몸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지만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날카로운 눈으로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엄폐물. 엄폐물이 필요하다. 두 다리가 병신이 된 상황이니 어딘가로 뛰어서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두 다리가 멀쩡하다고 해도 이미 쏟아지기 시작한 화살비를 피할 여유가 없다.
다행히 주변에 시체가 여러 구 널브러져 있었다.
아비투스는 있는 힘을 다해 시체 밑으로 파고들며 시체를 자신의 몸 위에 덮었다. 얼마나 효과적으로 화살을 막아줄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시체마냥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이리라.
그리고 절절하게 느꼈다. 자신이 오늘 정말 운이 좋았다는 것을. 아울러 테세우스의 말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가서 고기를 구워 먹으며 오늘 내가 숨 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곱씹어 보라 했던 테세우스의 말이 뼈저리게 마음에 와닿았다.
쏟아지는 화살비에 목숨을 부지한 일보다 테세우스와 적대하고 살아남은 일이 더욱 기적같은 일이었다. 저토록 무시무시한 사내의 손에서 살아남았으니 말이다. 그래. 오늘은 지독하게 운수 좋은 날이니 뒤어어 쏟아지는 화살비에도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어차피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리 염원하는 것뿐이었다.
*
“왜 웃나?”
테세우스는 들 것에 실려온 사내가 중상을 입고도 쿡쿡거리며 웃음을 터트리자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그럴 수밖에요. 죽을 자리를 몇 번이나 벗어났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죽을 자리를 벗어났다라······. 그야말로 섣부른 판단 아닌가?”
테세우스는 그의 몸에 박힌 부러진 화살들을 바라보며 운을 뗐다. 아비투스는 화살로 인한 상처뿐만 아니라 테세우스가 당장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쿨럭! 깊게 생각하지는 않으렵니다. 지금은 살아있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오늘 테세우스를 습격했다가 살아남은 자는 자신이 유일했다. 물론 중상을 입었으니 자신 역시 이대로 회복하지 못한 채 죽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나중 문제였다. 그러니 일단은 살아남았다는 사실 하나만 생각하고 싶었다. 육체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데 마음마저 죽어버린다면 그건 정말 가망없는 일이 될 테니까.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습격한 자들에 대해 아는 바가 있나?”
“없습니다. 누워서 대답함을 불쾌하게 생각하진 말아주십..”
테세우스는 아비투스의 말이 모두 끝나기도 전에 끊으며 말했다.
“죽을 지도 모르는 자에게 딱히 예의를 요구하고 싶진 않군. 그런 건 지금 중요한 부분도 아니고 아무튼 군인인가?”
아비투스는 누워있는 채로 미간을 좁히다가 고개를 미미하게 흔들었다.
“아닙니다.”
“군인이 아니라고?”
“예. 저는 시민이 아닙니다. 무기를 쥐기 시작했을 땐 자유민도 아니었죠.”
“흠. 노예였다는 말이군. 네게 자유를 대신 사주는 대신 음지의 일을 맡겼다 라고 보면 되나?”
“원래는 그랬습니다만······.”
“무슨 뜻이지?”
“로마에서 일어난 내전 때 마리우스파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전 주인이 말인가?”
“예. 두 번째 주인이자 저를 자유민이 되게 한 주인 말입니다.”
“죽은 자의 이름은 굳이 알 필요가 없을 테고······. 그 말인즉 완전한 자유민이라는 소리인데······. 왜 이런 일을 맡았지?”
“테세우스 님과 비슷한 이유입니다.”
“나와 비슷한 이유라?”
테세우스는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이내 곧 고개를 끄덕이며 아비투스에게 말했다.
“시민권이로군.”
“예. 시민권을 얻는 기준이 명확하지는 않으나 저와 같은 자에게는 평생을 살아도 닿을 수 없는 기준일 테니 말입니다. 물론 해방노예라 할 수 있는 제가 얻는 시민권은 반쪽짜리 시민권이겠지만 어차피 시민권을 얻어도 정계에 나설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이름이 뭐지?”
“아비투스. 아비투스라고 합니다.”
“좋아. 자네의 신변이야 이쯤에서 넘어가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한 가지 짚고 갈 부분이 있다. 아비투스. 내 질문을 거부할 생각인가?”
아비투스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시민권이 아무리 귀해도 목숨보다 귀하지는 않습니다.”
아비투스가 굳이 목숨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를 눈치채지 못할 테세우스가 아니었다.
“살려달라?”
“염치없는 부탁이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뛰어난 의사를 붙여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 역시 말입니다. 또한 부탁을 들어주시지 않아도 제가 아는 모든 부분에 대해 충실히 답변드리겠습니다. 쿨럭!”
“거래가 아니다?”
“제가 무식하기는 하나 그렇다고 주제를 모르는 자는 아닙니다.”
테세우스는 아비투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병사들에게 말했다.
“의사를 불러 치료해줘라.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말이야.”
그 모습에 아비투스가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제게 아무것도 질문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네 신변을 들은 것으로 충분하다. 네가 군인이었다면 또 모를까 그것도 아니라면 사실 네게 더 질문할 것도 없다. 다만······. 저들이 전한 말이 있나?”
누가 보냈는지 질문하는 것 역시 의미없는 일이다. 지시한 자를 찾는 일도 요원한 일일뿐더러 찾는다고 해도 이들과의 연관된 증거가 없는 이상 추궁할 수도 없을 테니······.
잠시 머뭇거리던 아비투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을 죽이라는 말 외에는 특별한 지시는 받지 못했습니다.”
“역시 그렇군.”
“믿으.. 시는 겁니까?”
“네게 뭘 전하라고 말했다면 아니 네가 뭘 안다고 대답했다면 그게 더 의심스러운 대답이었을 거다.”
저들은 그저 경고를 한 것이다. 그 와중에 테세우스가 죽으면 더 좋은 것이고. 어떤 면에서 저들에겐 사소한 일에 불과할 테니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었다.
시민도 아니고 자유민이라······. 그것도 해방노예인? 우여곡절 끝에 법정까지 이 일을 가져간다고 해도 어떻게 증인으로 내세우기 어려운 신분이 아닌가?
누가 보냈는지 추궁하지 않은 건 괜한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저들로서는 이 자에게 자신의 정적들의 이름으로 일을 시켰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물처럼 요동치기 쉬운 것이라 괜한 소리를 듣는다면 간담이 철로 이뤄진 사람이라도 미미하게나마 흔들리는 법이다.
그러니 저자의 입을 통해 괜한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었다. 저자가 사실이라 여기는 그것조차 거짓일 수 있으니······. 가장 먼저 아비투스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본 것은 그래서였다.
아비투스 이 자는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사람에 불과했다. 그런 자에게 뭘 더 바라겠는가?
테세우스는 그 말을 끝으로 아비투스를 물리곤 센튜리온에게 말했다.
“얼추 정리가 된 것 같군. 특이점이 나온 것이 있나?”
“송구하지만 없습니다.”
테세우스는 안색을 굳히며 생각에 잠겼다.
‘실로 그림자같은 놈들이다.’
*
잠깐의 외유를 마치고 돌아온 테세우스는 부르불리우스의 집에서 그와 키케로를 만나고 있었다.
부르불리우스의 시종이 가져온 따뜻한 물을 마시던 테세우스는 물잔을 내려놓고 그들에게 말했다.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뜻에 따라 호민관 위에 나서겠지만 그게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여길 수는 없을 겁니다.”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오?”
테세우스는 부르불리우스의 집에 들어선지 몇 분 되지도 않아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글쎄요. 그게 무슨 뜻인지는 두분께서 더 잘 아시겠지요. 그저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테세우스는 그 말을 마치고 두꺼운 털가죽으로 된 후드를 쓰고 밖으로 나섰다. 밖으로 나서자 호라티우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은 야밤이었고 여전히 눈이 드문드문 흩날리고 있었다. 싸늘한 겨울밤의 정취를 그대로 품고 있는 모습이었다.
함께 걸음을 옮기던 호라티우스가 뜨거운 입김을 내뿜으며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제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느낌이 별로 좋지는 않습니다.”
“감각 하나는 알아줘야겠군. 맞아. 좋지 않은 상황이지. 부르불리우스와 키케로는 나를 경계하고 있어. 그러니 저들이 자의로 트리뷴의 권한을 회복시키는 일은 없을 거다.”
호라티우스는 ‘자의’라는 표현에 집중했다.
“뭔가 방책이 있으신 겁니까?”
“글쎄다. 트리뷴은 트리뷴의 무기를 사용하면 될 일이지.”
“트리뷴의 무기라······. 대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권한이 말소된 트리뷴에게 대체 무슨 무기가 남아있단 말인가? 호라티우스는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저들이 트리뷴의 권한을 말소시켜도 트리뷴이라는 직위를 말소시키지 않는 이상, 없이 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으흠. 그게 대체 뭡니까?”
“신성불가침.”
“신성불가침? 그게 왜?”
그렇게 반문하던 호라티우스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로마에서 선거나 표결은 결코 고상하게 이뤄지지 않는다. 합의되지 않은 제안이라면 선거나 표결을 막기 위해 파벌간에 몸싸움이 벌어지는 것은 다반사다.
안 그래도 무지막지한 힘을 가진 테세우스가 신성불가침권(간단히 호민관의 신체를 해할 수 없음)까지 얻었다. 직접적인 거부권이 없다지만 그라면 혼자서도 충분히 선거를 방해할 수 있을 거다. 저들은 미처 모르겠지만 테세우스는 언제나 상식을 파괴하던 사람이다.
“그런 눈으로 볼 것 없다. 트리뷴이 신성불가침권을 사용하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지 않나? 중범죄자를 옹호하는 건 금지되어 있지만 법을 옹호하기 위해 움직인다면 저들이 또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지는군.”
호라티우스는 테세우스의 노림수를 어렴풋이나마 읽을 수 있었다. 테세우스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저들이 큰 실수를 범하기를. 다시 말해 신성불가침권을 침범하기를 유도하는 것이리라. 미끼를 물지 않는다면 않는 대로 그의 뜻대로 흘러갈 테니······. 저들은 테세우스가 히스파니아로 돌아가게끔 내버려 두는 것이 옳았다.
하긴 그랬다면 히스파니아의 로마 영향력이 어찌될 지 알 수 없었을 테니 저들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호라티우스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언제부터 이런 것을 고민했단 말인가? 적이 나타나면 적을 베고 어떻게 아군을 보호할 것인가를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선거일이 내일부터던가?”
“그렇습니다. 호위는 염려 마십시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글라디우스와 로리카 하마타를 착용하지는 않았지만 백전노장들로 이뤄진 든든한 700여 명의 호위대가 교대하며 시민들 품에서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테세우스의 안팎으로 주시할 것이다. 그러니 그 어떤 암살시도도 시작되기도 전에 무마될 것이다.
그뿐이랴? 테세우스를 향한 평민들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다. 호라티우스는 사뭇 궁금해졌다. 그 인기를 등에 업은 테세우스가 트리뷴 직을 제대로 수행하기라도 한다면? 법으로 트리뷴의 권한을 제재한 그것이 과연 얼마나 효력이 있을까? 무력으로 테세우스를 압박한다?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저 테세우스를? 심지어 그는 이제 신성불가침권까지 얻게 된다. 무슨 수로 그를 상대할까? 호라티우스는 심히 궁금해졌다.
그와 별개로 테세우스는 근심에 찬 표정을 지으며 로마의 밤거리를 거닐었다.
‘히스파니아로 빠른 시일 내에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 당장은 아니더라도 반드시 자금줄이 마르기 시작할 것이다. 대안이 필요하다.’
히스파니아로 돌아갈 수 있다면 자금줄이 말라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많은 재물을 요할 일이 그다지 있을 것 같지도 않았으니······. 하나 로마의 탐욕스럽거나 가련한 이들을 상대하려면 상당한 재물이 필요하다. 때에 따라서는 일개인의 부를 벗어난 어쩌면 국가 규모의 재물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미 일개인의 부를 벗어난 상황이라 할 수 있지만 자신이 이룩한 모든 건 신기루의 허상과 같다.
후 불면 모두 사라질 것들에 불과한 허상 말이다. 단순히 어떤 비유가 아니라 현실이 그러했다. 따라서 테세우스는 마음속 깊은 근심을 지워내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