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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무신의 기억-218화 (218/298)

# 218

218. 붉은 눈밭.

218. 붉은 눈밭.

앙상한 나뭇가지에 눈꽃이 사뿐하게 내려앉은 모습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이는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이곳저곳에 흩뿌려진 피와 시체만 아니라면······.

낙원은 멀리 있지 않다.

하나 악한 본성을 가진 인간은 결국 스스로가 모든 것을 일그러뜨릴 뿐이다. 눈앞에 이리저리 짓밟혀 질척해진 붉은 눈밭처럼······.

테세우스는 미간을 좁히며 양손의 검을 휘둘렀다.

“크허허헉!”

“으아악!”

적의 비명과 함께 뜨거운 붉은 피가 테세우스의 얼굴을 뒤덮었다.

또다시 피. 또다시 붉은 피가 일상을 얼룩지게 만든다. 저들이 먼저 적의와 살의를 품은 일은 붉게 물든 얼룩을 지워주지 못한다. 비릿한 혈향은 영혼과 마음에 그 흔적을 새긴다. 아무리 손을 씻고 목욕을 해도 새겨진 기억과 경험은 지워낼 수 없다.

피의 무게란 그런 것이다. 아는 자에게는 한없이 무겁고 모르는 자에게는 깃털보다도 가벼운······. 확실한 건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점이다.

테세우스는 바위처럼 무겁고 단단한 마음으로 저들을 베어넘겼다.

‘그러나 나를 죽이려는 자들은 죽일 뿐이다.’

테세우스는 그저 이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누군가를 짓밟고 죽여야만 살아남는 이 상황 자체가 말이다.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동정하기 때문에? 그럴 리가? 테세우스는 그 정도로 감상적이고 이타적인 사람이 아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로 그러했다.

이제 새하얀 설원을 보더라도 설원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위에 흩뿌려진 피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건 슬픈 일이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건······.

수많은 사람들이 욕망을 따라 악한 일도 서슴지 않고 행하나 그 욕망들이 모여 저들이 어울리는 곳을 지옥으로 만든다. 새하얀 눈밭을 붉게 물들이며 끝없는 살의를 발하는 저들과 자신처럼······.

태앵!

테세우스는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볼트를 검을 뒤틀어 검면으로 막아냈다. 테세우스가 들고 있던 검은 본래 도적들의 것이었다. 도적두목도 아니고 일개 도적이 가진 검의 품질이 좋다면 그것도 어울리지 않는 일이리라.

갑옷도 수월하게 뚫는 볼트의 강력함이 볼트촉에 집중된 채로 검면을 타격하자 검은 그 타격점을 기점으로 산산이 깨어졌다.

차아앙!

그러나 테세우스는 눈 하나 깜작하지 않고 깨어진 검을 측면에서 쇄도하는 적에게 집어 던졌다.

훙훙훙! 푸욱!

깨어진 검신과 이어진 검자루는 빠르게 회전하며 날아가 적의 안면에 그대로 틀어박혔다. 새하얀 도화지 위에 붉은 물감으로 또 다른 그림을 그렸음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의 광경은 극히 일부분을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테세우스는 수없이 많은 화살과 볼트를 검으로 쳐내며 적을 베고 또 벴다. 고도로 훈련된 이들까지는 아니나 상당한 훈련을 받은 이들이 분명했다.

이들은 매우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테세우스를 포위했다. 테세우스가 사자라면 이들은 하이에나떼 정도는 된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그 사자는 저들의 이빨이 박히지도 않고 미처 박아넣을 수도 없는 용맹하고 노련한 사자였다.

테세우스는 전면에서 자신을 향해 내지르는 적의 팔을 끊어내고 오른편에서 내지른 팔을 잡아다가다 왼편에서 쇄도한 자에게 찔러넣었다.

푸우욱!

검을 찌른 자나 찔린 자나 모두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지만 아무래도 검에 찔린 자의 눈빛이 더욱 강렬했다. 죽어가는 이가 마지막으로 발한 눈빛이었으니까.

졸지에 아군을 죽인 자는 당혹함을 감추지 못한 모습이 역력했지만 테세우스는 그에게 실책을 곱씹을 시간따위는 주지 않았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의 목을 검으로 쳐버렸으니 말이다.

서걱!

결국 그는 당황한 표정 그대로 허공에 떠올랐다. 당연하게도 머리통만 말이다. 휙휙 도는 광경에 머리가 잘렸음을 자각하며 더욱 당황하겠지만 그 시간조차 길지는 않을 것이다. 미처 자책할 시간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테세우스는 들고 있던 검이 뼈와 살을 가르는 충격과 화살과 볼트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또 다시 깨어나가자 다시 집어 던져 눈앞의 적을 죽이고 널브러진 검을 주워 들었다.

이들이 가진 검은 적어도 도적의 것들보다는 좋은 것이리라.

테세우스는 몸을 회전시키며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공격을 모조리 차단한 뒤 등 뒤에서 공격하는 자를 사선으로 완전히 갈라버렸다.

확실히 도적들의 것보다는 좋았다.

촤아아아악!

예의 붉은 피와 함께 사선으로 잘린 자의 시체가 바닥에 나뒹굴었지만 누구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다.

테세우스는 다시 걸음을 옮기며 소리쳤다.

“뭐하는 놈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무리의 대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의 주인께서 네가 죽기를 원하신다.”

“네 주인이 누구길래?”

테세우스는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또 다른 적을 격살하며 질문했다.

그러나 사내는 더 말하지 않고 두 자루의 곡도를 들고 테세우스에게 빠르게 쇄도했다. 체구나 신장은 테세우스에 비해 크지 않았지만 결코 작은 체구의 사내는 아니었다. 사실 테세우스보다 큰 사내가 얼마나 되겠는가? 어쨌든 움직임에서 느껴지는 힘과 속력이 상당했다.

고도로 단련된 암살자였다. 테세우스는 그의 움직임만으로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내는 결코 무모하지 않았다. 부하들의 고기 방패로 사용하면서 테세우스를 공격해왔다.

테세우스가 자신의 부하를 베어내자 그 틈을 노려 허벅지나 옆구리를 날카로운 검으로 찔러왔다. 테세우스가 놀라운 반사신경과 무예로 치명적인 일격을 아무렇지 않게 무마시키면 사내는 미련없이 몸을 빼며 다시금 테세우스 주변을 맴돌며 기회를 엿봤다.

부하들이 죽든 말든 테세우스만 죽이면 된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대화를 나누기 전부터 그는 테세우스와 교전을 치르고 있었지만 매우 신중한 태도를 고수하며 테세우스라고 해도 피할 수 없을 정도의 거의 완벽한 기회를 정확히 포착해 공격해왔다.

그것만으로 사내가 매우 뛰어난 무예의 소유자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정확하게 그 순간을 포착하고 공격해온다는 것은 그것을 수행할만한 역량을 가진 자라는 것을 방증했으니 말이다.

테세우스는 자신의 힘을 온전히 전달해줄 무기의 부재를 느꼈다. 그게 아니었다면 저자가 쥐새끼처럼 자신을 습격하는 일따위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한 명 한 명을 격살할 것이 아니라 대번에 서너 명, 그 이상까지도 모조리 베어버렸을 테니까.

검은 그 사정거리가 제한적이었고 무엇보다 그러한 일격을 무턱대고 수행하다가는 무기가 먼저 부러지고 마는 사태에 처하고 말 것이다. 적들에게 강한 일격을 선사하는 대신 무기를 잃어버린다면?

이들이 도적 수준만 되어도 신경 쓸 필요도 없는 부분이겠지만 이들의 실력은 무기를 바꾸는 시간까지 충분히 고려해서 싸워야 할 정도로 노련한 전사들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테세우스가 가진 힘과 별개로 그의 육체 역시 창에 찔리면 살갖이 터져나가고 칼에 베이면 창자가 쏟아질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천옷을 걸치고 있는 건 아니고 가죽갑옷을 걸치긴 했지만 사냥을 위해서 이동하는 자가 중무장을 하지는 않고 따라서 의심을 살 수 있는 노릇이니 방한 등을 위해 착용한 가벼운 무장에 불과했다.

이들의 공격은 능히 가죽갑옷을 뚫고 자신에게 상해를 입히기에 충분했다. 그러니 테세우스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디서 이런 자들이 나타났단 말인가? 상대해보니 로마인들의 무술과는 상이한 부분이 있었다. 이건 다시 말해 호민관에 오르길 반대하는 무리가 보낸 자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만약 그랬다면 도적과 함께 나타난 자를 저들이 굳이 죽이려고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 그런 비효율적인 짓을 한단 말인가?

포위망은 점점 더 좁혀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들은 테세우스를 죽이고자 철저히 준비라도 했는지 쇠그물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상당히 넓은 범위로 집어던진 것이기에 도로 잡아 던지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겹겹이 집어던졌기에 테세우스는 결국 쇠그물 안에 갇힐 수밖에 없었다.

“당겨!”

쇠그물 끝을 여러 방향에서 수십 명씩 달라붙어 잡아당겼고 그 와중에도 쇠그물이 계속해서 겹겹이 위에 쌓였다. 놀랍게도 무리를 지휘하는 대장 스스로마저도 테세우스를 유인하기 위한 미끼였던 것이다.

하나 테세우스는 그런 상황에서도 움직였다. 테세우스를 포획한 쇠그물이 출렁일 때마다 백 명도 넘는 이들이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실로 엄청난 힘이었다.

“으아아아아아!”

테세우스는 심지어 양손으로 쇠그물을 찢어버리는 괴력까지 선보였다. 그 모습에 대경한 저들 뒤편에서 우두머리 사내가 소리쳤다.

“쏴! 그리고 찔러!”

쇠그물로 움직임을 봉쇄하고 창과 화살 등으로 원거리에서 적을 요격한다. 테세우스를 상대하기 위한 최적화된 방법에 가까웠다. 가까이 다가서지 않으면 그의 손에 잡혀 죽을 일도 없고 화살과 창이야 그가 죽을 때까지 쏘고 찌르면 될 일이니 실로 탁월한 공략법이었다.

운신이 완전히 제약된 것은 아니지만 이대로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예상했던 적이라면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닌 말로 보아디케아만 있었더라도 이 지경에 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에게 포위되더라도 창의 길이만큼의 거리를 확보했을 테니 말이다.

딱히 방심한 것도 아니다. 쇠그물만 아니라면 능히 저들을 쳐죽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만일을 대비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하나 그 대비책을 사용하기도 전에 죽임을 당할 판이었다. 죽임을 당한다라?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테세우스는 쇠그물을 양손으로 잡아채고 좌우로 흔들다가 이내 좌편으로 강하게 휘감듯이 잡아당겼다.

“으아아아아!!!!”

테세우스가 괴성을 지르며 모든 힘을 양팔에 집중한 그때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일이 발생했다.

“어.. 어어?”

“으어어어어!”

백여 명도 넘는 자들이 쇠그물을 잡고 있음에도 그들 전부가 테세우스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좌편으로 휩쓸려 버린 것이다.

“이게 무슨?”

모든 일을 진두지휘하던 우두머리도 이것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테세우스는 더욱 빠르게 몸을 회전시켰다. 지탱하던 지지목이 모조리 뽑힌 상황이니 그의 움직임을 막아설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팅 티티팅 티팅

겹겹이 쌓인 쇠그물이 회전하자 그 자체로 훌륭한 갑주가 되었다. 결국 저들이 내지른 창과 화살은 테세우스의 몸에 제대로 닿지 못하고 쇠그물에 막혀 스러졌다.

화살과 달리 창은 테세우스의 몸 깊숙한 곳까지 도달했지만 테세우스는 그 찰나에도 몸을 움직여 창을 피하고 창대를 완전히 부숴버렸다.

테세우스는 쇠그물을 휘휘 감아 쓰러진 적들을 향해 집어 던져버렸다. 그 무게가 상당했기에 쇠그물 뭉치에 깔린 이들은 그대로 압사당했다. 심지어 테세우스는 그런 무게를 지탱하고 휘감아서 적을 제압한 것이다.

가죽갑옷 표면에 얕게나마 덕지덕지 박힌 부러진 화살을 손을 훝어서 털어낸 뒤 테세우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한 놈도 살려두지 않겠다.”

테세우스의 목소리는 결코 크지 않았지만 맹수의 흉포한 울음소리보다 우렁차고 두렵게 느껴졌다.

두두두두.

때를 맞춰 땅이 미약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테세우스를 공격한 적의 우두머리는 더욱 당황한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테세우스는 냉랭한 표정으로 저들을 훝어보며 말했다.

“네놈들 존재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만약을 대비하지 않은 건 아니지.”

이윽고 말을 탄 이들이 저들 주위를 빼곡하게 포위했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 털가죽을 걸치긴 했지만 기본 무장이 레기온의 그것과 닮아있음은 누구든 파악할 수 있었다.

“테세우스 님!”

저들은 바로 테세우스를 따라 로마까지 온 히스파니아 등지의 병사들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테세우스는 이들을 버리지 않았다. 본디 로마인 병사들은 로마로 귀환하게 두되 이들은 히스파니아에서 자신을 추종하여 로마까지 온 이들이다. 테세우스가 이들을 잊어버렸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아울러 시민권을 얻지 못하고 신분을 인정받지 못했을 때를 대비하지 않았을 테세우스가 아니었다.

다만 일이 순조롭게 풀려서 그 대비책을 사용할 일이 없었을 뿐이다. 지금 나타난 이들은 그 대비책의 일부였다.

테세우스는 일이 잘못될 때를 대비해 이들에게 서신을 보내 약속된 장소로 오라 명했다. 물론 이들의 존재를 로마의 정치인들이 알면 곤란해지니 일이 틀어지거나 완료된 시점에 나타나도록 말이다. 그것이 약속된 장소에 저들이 늦게 모습을 드러낸 이유였다.

그런 후 테세우스는 서신이 아니라 직접 병사들을 만나 교류를 가지고 향후의 일을 논할 참이었다. 그런데 변수가 발생한 것이다. 바로 눈앞의 적들 말이다.

“보아디케아!”

테세우스는 긴말하지 않고 저들에게 맡겨두었던 보아디케아를 찾았다. 건장한 병사 한 명이 다소 버거운 표정으로 보아디케아를 테세우스에게 가져왔고 테세우스는 말없이 그것을 한손으로 받아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테세우스로 향한 그때 테세우스가 나지막하게 명령했다.

“모조리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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