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
216. 호민관의 무기.
216.
공화정 말기의 로마는 44개에 달하는 정무관을 선출했다. 5년 임기의 켄소르(감찰관)를 제외한 모든 정무관은 매년 마다 선출되었으며 선출되지 않는 정무관은 딕다토르(독재관)와 마기스테르 에퀴툼(딕다토르의 부관직)뿐이었다.
선거운동은 선거를 담당하는 정무관의 발표 뒤에 시작되었으며 BC98년의 집정관 렉스 카이킬리아 디디아는 이 선거기간을 17일에서 25일로 설정했다.
선거는 포럼에서 이뤄지는 것이 태반이었으나 로마에서는 정치집회를 허용하지 않았기에 유권자를 확보하기 위해 연회를 열거나 무료 관람권을 나눠줬다.
따라서 부유하지 않은 자는 부유한 자의 후원을 받거나 많은 빚을 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듯 금전적인 관계 얽힌 정무관은 아무리 큰 뜻이나 포부가 있어도 파트로누스(보호자)와 클리엔스(피호민)관계인 클리엔테스로 묶인 이상 제 뜻을 온전히 펼칠 수 없었다. 클리엔테스 관계가 법적으로 인정받는 관계는 아니었으나 강력한 명예와 원칙을 기반으로 이뤄진 것이니 이를 무시한다는 건 로마 사회에서 매장당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다시 말해 부유한 자를 위한, 부유한 자에 의한, 부유한 자의 정부가 바로 로마 공화정의 실태였다. 어떤 관직도 가지고 있지 않은 시민에 불과한 크라수스의 입김이 정계에 그토록 강한 것도 그가 후원한 자들이 정계에 올라 힘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티푼디움(거대 농장)의 출몰로 자영농과 부농의 양극화 현상이 극대화됨에 따라 자영농을 비롯한 중산층이 완전히 몰락하며 빈부의 격차 역시 극에 달했다. 그러니 로마의 정치인들이 로마를 위해! 로마 공화정을 위해! 라며 뭔가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인양 제아무리 부르짖은들 제기득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대다수 시민들의 처우야 어찌 되든 우리의 금 밥통을 위해 다이아몬드 밥통을 가지려는 자를 척결하자! 이 정도 수준밖에는 되지 않았다.
로마 시대의 진정한 개혁가를 꼽으라면 토지개혁을 비롯한 여러 개혁을 실행하려고 했던 그라쿠스 형제 정도나 될까?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다. 그렇게 대대적인 개혁을 한 뒤 호민관의 권한을 이용해 저들이 독재자의 자리에 앉으려고 했을 수도 있는 노릇이니······. 뭐 어쨌든 저들의 개혁은 실패했다.
시대의 흐름은 특출한 한 사람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것이 아무리 옳더라도 뒷받침되는 배경이 없다면 시작점을 던져주고 스러질 뿐이다. 물론 그 작은 변화를 통해 모든 것이 변하기도 하나 분명한 한계점이 있다. 아니면 그 모든 것을 씹어먹을 정도로 탁월한 능력과 운을 지녔거나······.
하나 그조차도 한계가 명확하다.
테세우스의 관점에서 보면 이 시대의 제도나 법, 관습이나 문화 등등 당장 고쳐야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모든 시대의 시행착오를 거치고 그나마 안정기에 도달한 현대에서 살다온 서후의 기억을 가졌으니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테세우스는 딱히 뭘 나서서 바꾸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내가 세상을 바꿔? 나 자신도 못 바꾸는데?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나를 다스리고 가정을 다스리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는 표현으로 많이들 쓰지만 선후가 바뀌었다.
수신과 제가하는 것이 평천하하는 것보다 어렵기에 수신과 제가를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능히 평천하할 수 있다는 뜻으로 봐야 한다.
내가 천하를 얻을 것이다라고 오시하며 다니던 항우가 남긴 건 자신의 이름뿐, 그의 삶은 비극이었다. 리처드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군가를 무수히 죽인 대가로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겼는지는 모르나 그 삶을 들여다본다면? 글쎄. 그게 온전한 삶이었을까? 시기와 질투와 탐욕과 살육과 악의와 악독이 가득한 그 삶이 과연 온전한 삶이었을까? 누가 그런 가운데 평안히 지낼 수 있을까?
권력이라면 저들의 삶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충분히 누려봤다. 그 끝이 어떠하다는 것까지도 목도했다. 그렇다 보니 테세우스는 권력욕이 거의 없었다. 그 대신 보신하고자 하는 욕구가 상당히 강했다.
무예를 단련하고 세력에 가담하고 시민권을 얻고 무구를 얻는 일련의 모든 행동은 ‘보신’이라는 명제 하에 일관되게 행한 것들이다. 그리고 로마에서 테세우스는 원하는 바와 해야할 일들을 모두 정리했다. 그러니 테세우스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그는 소리소문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긁어서 부스럼을 만든다고 했던가? 저들의 확고한 적의를 읽은 테세우스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간 수부라 지구에서 지내며 본 처참하고 처연한 광경들 역시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다그닥! 다그닥!
질주하는 말 위에서 맞바람을 맞으며 생각을 정리하던 테세우스는 번뜩이는 눈빛으로 활시위에 화살을 걸어 번개처럼 당겼다.
퉁! 쉬이이익!
화살은 쏜살같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숲속으로 사라졌다.
퀘에에엑!
이윽고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리더니 무언가 풀썩 쓰러지는 미세한 소음 역시 울려 퍼졌다.
“워워!”
말의 속도를 줄이며 말머리를 돌린 테세우스는 곧장 그곳으로 말을 이끌었다. 그곳에는 거무튀튀한 멧돼지 한 마리가 머리에 급소를 얻어맞고 죽어있었다.
주변을 슬쩍 살펴보던 테세우스는 말에서 내려와 날카로운 단검을 들고 그 자리에서 능숙하게 멧돼지를 도축했다. 지금 가져온 검은 대장간에서 만든 다마스쿠스 쿠크리 단검이 아니라 일반 단검이었다.
로마에서는 무기를 지니는 것 자체가 불법이기에 이번에 만든 무구는 모두 그대로 두고 상점에서 적당한 활과 단검을 구매하여 밖으로 나왔다. 도축용 단검이라 무기로 분류될 만한 것이 아니었기에 문제없었다. 비단 그게 아니더라도 명검의 반열에 오르기에 충분한 무기를 사냥용으로 쓰기엔 아무래도 적합하지 않았다.
활은 전에 썼던 것처럼 파르티아산 궁이었는데 써보니 탄성과 정확도가 제법 좋았다. 다만 명품의 반열에 오를 정도의 활은 아니었고 아울러 구매한 단검 역시 마찬가지였다.
싸구려 무기라고 해도 테세우스의 손에서는 명검이 된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멧돼지의 내장과 가죽은 금세 분리되어 바닥에 버려졌고 테세우스는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챙겨왔던 가죽주머니에 넣었다.
뭔가를 썰고 자르는 어쩌면 무시무시한 소음을 고요한 숲속에 계속해서 흘리던 테세우스는 이윽고 피가 자욱한 손을 바닥의 흙을 비벼서 대충 처리한 뒤 가죽주머니를 흑마 뒤편에 올려 결박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자신 역시 말 위에 오르려는 찰나 테세우스는 번개처럼 손을 움직여 날아오는 화살을 잡아챘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자 도적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걸 잡았어?”
“호오. 운이 좋은 놈인데?”
도적들은 피식 피식 웃으면서 테세우스에게 이죽거렸다. 치안이 비교적 확보된 로마 내에서도 도적이 활개를 치는 판국에 도시 밖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도시 외부는 무법천지 그 자체였고 어떤 신분이건 간에 남녀노소 누구든지 함부로 밖으로 나돌아다니다가는 목숨의 위협은 물론 노예로 팔릴 수도 있는 시기였다. 건장한 성인 남자도 위험했으니 여인과 아이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그런 일들은 응당 숲속 으슥한 곳에서 일어난 테니 어떻게 저들을 추적하거나 잡을 방법도 용이치 않았다. 토벌단을 꾸려서 이 근방을 쓸어버리지 않는 한 근절되기 어려운 존재들이었다.
테세우스는 들고 있던 화살을 내려놓으며 자신을 습격한 도적들을 바라봤다. 도적들의 숫자는 30명은 더 되는 것 같았다.
“가진 것 모두 내놓으면 살려줄 수도 있다.”
이죽거리는 도적의 말에 테세우스는 별말 하지 않고 흑마에 결박한 가죽주머니를 풀러서 저들 앞에 던졌다.
“자! 가져가라! 한 끼 식사로는 충분할 거다.”
뼈와 내장과 가죽을 분리했어도 상당히 무거울 텐데 가죽주머니는 도적들의 발치에 떨어졌다.
투우욱!
발치에 떨어진 가죽주머니와 테세우스를 번갈아보던 도적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 이딴 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소리냐? 이거 정신나간 놈이군. 네놈이 가진 말만 팔아도 이딴 고기는 마차 단위로 실을 수 있을거다.”
테세우스는 도적들의 면면을 차근히 살펴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숨이 아깝거든 잘 생각해라. 아니면 너희들이 키르쿠스 막시무스에 출전한 검투사보다 낫다고 생각이라도 하는 것이냐? 기억해라. 목숨은 하나다.”
“키르쿠스 막시무스? 무슨 개소리냐?”
두목으로 보이는 자가 다시 소리치자 테세우스는 그대로 손으로 잡아챘던 화살을 그대로 활시위에 걸어 당겼다.
피이이잉!
커어어억!
화살은 고함을 지르는 도적두목의 입에 그림처럼 쏜살같이 빨려 들어갔고 붉은 핏물을 자아냈다.
푸우우욱!
두적두목이 고함을 지르다말고 화살에 맞아 죽임을 당하자 차디찬 침묵이 이곳을 맴돌았다.
“너희를 죽이는 일은 내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도적떼이지만 도적떼가 아니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하면 도적도 있지만 도적이 아니라 매수당한 군인도 있다는 소리였다. 테세우스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을 은밀히 미행하는 자가 있었고 뭔가 계략을 꾸미고 있음도 일찌감치 눈치챘다.
이건 휴식을 위한 사냥이 아니라 전투를 대비하기 위한 숨고르기에 가까웠다. 테세우스는 저들의 적의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고자 한 것이다. 막연한 추측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까.
“왜 나를 미행했는지도 또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도 모르지 않아.”
테세우스는 말을 멈춘 다음 다시 말했다.
“그대로 물러서서 나를 미행하지 않는다면 내버려 둔다. 아울러 누가 사주했는지도 묻지 않겠다. 별로 의미없는 일일 테니까.”
로마 하층민보다 못한 이들에게 사주하는 일을 맡은 자의 이름따위 알 필요가 없다. 저들을 통해 뭘 캐내려고 하는 순간 꼬리를 싹 잘라버릴 테니까. 말 그대로 별 의미없는 일이었다.
“뭐라고 씨부리는 거냐?”
심지어 이 무지한 도적놈들은 테세우스가 누군지도 몰랐다. 그러니 테세우스를 습격하는 일에 좋다고 가담했겠지. 여기서 의아한 것은 테세우스가 어떤 사람인지 목격했을 자들 역시 이 일에 가담했다는 점이었다.
사실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로마시민이 그날 테세우스의 모습을 봤지만 외곽을 지키거나 순찰하던 군인들은 경기를 목격한 것이 아니라 전해지는 소식을 들었을 테고 무엇보다 탐욕은 사람을 파멸로 몰아넣는 법이니까.
그런 자들에게 저들이 원하는 것 이상의 보상을 보장해준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과신일 수도 있는 노릇이고. 검투사 놈 따위를 처리한 놈을 전장에서 단련된 군인인 내가 못 죽이겠는가? 라는 마음의 발로였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러나 어떤 연유로 테세우스를 습격하기로 마음을 먹었든 간에 결국 어리석은 놈들인 건 매한가지다. 적을 습격하기 전에 적이 어떤 존재인지조차 정확히 모르고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가져가! 가져가서 고기를 구워 먹으며 오늘 내가 숨 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곱씹어 보도록 해라. 기회가 있을 때.”
테세우스를 모르는 자들도 테세우스가 범상치 않은 자라는 건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비범해 보이는 자가 테세우스였고 무엇보다 위압적인 체격을 가진 사내가 아닌가?
두목을 죽이고도 태연하게 말을 늘어놓는 테세우스의 모습에 기가 질린 도적들이 주춤거리자 죽은 두목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야망에 찬 도적이 소리쳤다.
“이 새끼가!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죽여! 두목을 죽인 놈을 그대로 내버려 둘 거냐? 이 새끼들아! 죽여!! 두목 말 잊었냐? 저 새끼만 죽이면 아우레우스 속에서 헤엄을 칠 수 있다!”
테세우스를 죽여서 고작 도적두목의 자리를 차지한다라······. 그 얼마나 허망하고 허무하며 무모한 야망이란 말인가?
하나 고함을 지르는 도적은 야망에 불타올라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상황만 달라질 뿐, 그게 비단 눈앞의 도적만 그렇겠는가? 바로 자신만 모르는 비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