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
213. 지혜로운 자.
213.
사실 테세우스는 로마에 더 머무를 이유가 없다.
로마와 단순히 화친하는 수준을 떠나 시민권과 신분을 보장받고 로마인이 된 마당에 흉흉한 자들이 도사리고 있는 이곳 로마보다야 히스파니아로 돌아가는 것이 심신양면으로 이로운 일이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재판이 끝난 당일, 모든 짐을 꾸려서 히스파니아로 돌아갔을 것이다. 아닌 말로 음침하고 추잡한 계괴가 판을 치는 로마에 남아있느니 그 편이 더 안락한 삶을 누리게 할 테니 말이다.
하나 그럴 수 없었다.
이는 간단히 히스파니아에 대한 테세우스의 영향력이 여전히 강력하다는 것과 로마에 입성하기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적을 만들었다는 점을 그 이유로 꼽을 수 있겠다.
히스파니아에 대한 영향력이 강력하면 테세우스에게 이로운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히스파니아에 대한 주권을 차례차례 확립해가야 하는 로마로서는 테세우스의 존재가 계륵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테세우스가 히스파니아로 돌아간다면 이는 테세우스를 적대하는 자들에게 적절한 빌미를 제공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아니 반드시 그럴 것이다. 히스파니아에 도착한 후에도 그렇겠지만 일단 히스파니아에 도착하기 전부터 대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게 될지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히스파니아 전체에 대한 영향력은 로마인 중 누구도 테세우스를 넘볼 자가 없다.
그러나 그 말이 히스파니아에 거주하는 로마인들에게도 그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소리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히스파니아에 거주하는 로마인들은 테세우스에 대해 두려움과 적대감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지역 유지일수록 말이다.
로마 내에서는 테세우스가 히스파니아에서 반란을 주도한다고 말하고 히스파니아 내에선 테세우스가 기득권을 앗아갈 것처럼 부추긴다면 히스파니아에서 테세우스의 입지는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은 형국에 처하고 말 것이다. 그러는 와중 테세우스를 따르는 자들과 충돌이 일어나기라도 하면······.
딱히 갈등이나 충돌이 없어도 능히 그 모든 것을 계획하고도 남을 자들이다. 출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니까.
대장간에 근 한 달간 틀어박힌 건 물론 다마스쿠스 제조법을 찾아내기 위해서였지만 그보다도 근본적인 이유는 저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였다.
단시일 내에 많은 성과를 거둔 것 자체는 해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뿌리가 튼튼해지고 줄기가 단단해기 전에 너무 많은 적을 만들었다. 이대로 뜨거운 태양과 거센 바람에 노출되면 말라 비틀어지거나 뿌리째 뽑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물론 설혹 그럴지라도 테세우스가 그렇게 순순히 당해줄 것 같진 않지만······.
어쨌든 테세우스는 이렇게 시간을 소비할 참이었다. 저들에게는 어영부영하는 허비하는 시간처럼 보일 테지만 자신에게는 알찬 그런 시간을 말이다.
내년에 곧 있을 콘술 선거를 시작으로 달마티아 정벌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폼페이우스가 돌아오고 크라수스와의 각축전이 벌어지면 로마의 정세는 그야말로 잔잔한 호수 아래 요동치는 격류처럼 흘러가기 시작할 것이다.
자신의 명성 또한 뜨거운 열기 아래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저 눈송이처럼 스러질 것이니 그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퇴장하면 된다. 로마를 들썩일 정도로 격렬한 유명세를 얻고도 그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고 칩거에 들어간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히스파니아든 그리스든 혹 어디를 가든 무슨 행동을 하든 세인들에게 과거의 지나간 사람으로 여겨지기 위해서, 기회를 얻고도 사용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자로 보이기 위해서 칩거를 택했다.
다시 말하지만 저들에겐 어리석은 행동처럼 보일지 모르나 테세우스에게는 알찬 시간이었다. 다마스쿠스 제조법을 얻었다는 사실은 그 어떤 무구보다 믿을 수 있는 무구를 언제든 갖출 수 있다는 소리와 진배없었고 이 또한 미래를 위한 착실한 준비였다.
그러나 그 알찬 시간도 오늘을 기점으로 끝이 났다.
“트리뷴. 트리뷴이라······.”
테세우스는 골이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두피가 그사이 추위로 차갑게 식은 손에 의해 서늘함까지 품었다. 두피를 타고 전해지는 서늘함에 정신이 보다 명료해진 테세우스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사비누스를 힐끔 바라본 뒤 다시 카피톨리누스 언덕 근방을 바라봤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아름다운 곳이지. 게다가 앞으로도 끝없이 번영하고 번창할 도시이기도 하고. 다만 히스파니아도 좋은 곳이지만 로마는 그에 비할 수 없이 좋은 곳이라는 말을 꺼내기 위한 것이라면 그쯤하는 것이 좋겠군.”
“으음. 무슨 말을 못하겠군요.”
사비누스는 가볍게 고개를 젓다가 테세우스에게 대뜸 물었다.
“하시고자 하는 작업은 성공하신 겁니까?”
테세우스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사비누스에게 대답했다.
“파이살이 있다면 더 수월했겠지만 별 수 없지. 이런 독사굴에 불러들였다가 괜히 비명횡사하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
“고깝게 듣진 않으셨으면 합니다. 다만 너무 팽팽하게 당겨진 줄은 결국 끊어지기 마련입니다. 당금 로마에서 테세우스 님을 도모하려는 자는 없을 겁니다. 있어도 감히 그럴 수 없는 상황 아닙니까?”
신분, 시민권, 과거의 원한 모두 해결된 상황이니 잠시 긴장을 늦추고 쉼을 가져도 될 일이 아니냐라고 반문하는 말이었다. 테세우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을 테지.”
“대답이 과거형으로 들립니다만? 제가 잘못 들은 겁니까?”
“아니 제대로 들었다.”
“으흠.”
사비누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무슨 생각이 들어 슬며시 입을 열었다.
“설마 어제 그 서신?”
“저들이 내게 트리뷴 선거에 나설 것을 제안했을 때 이미 상황은 달라졌다.”
“그 일이 저들의 극심한 견제를 불러올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어째서 말입니까? 테세우스 님이 나서고자 한 것도 아니고 저들이 요청한 일 아닙니까?”
“여기서 이야기를 나눌 건 아닌 것 같고 안으로 들어오지.”
테세우스는 그렇게 말한 뒤 대장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눈앞의 대장간은 당연히 테세우스가 직접 건축한 건 아니고 로마에서 가장 쓸만한 대장간을 돈을 주고 얻었다.
사비누스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조금 더 커진 건가? 내 착각인가?”
더 커졌든 아니든 어쨌든 자신보다 월등히 컸으니 그 차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만은 뒷모습에서 뭔가 테세우스가 더 커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단순히 그의 체구가 커져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테세우스라는 존재가 그만큼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해서 그런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말이다.
대장간 안은 지금까지도 작업이 한창이었기에 후끈할 정도의 열기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사비누스는 그 후끈함에 몸이 노곤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테세우스가 따뜻한 차를 건네주자 사비누스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 호로록 마셨다.
“이대로 한숨 푹 자고 싶군요. 그나저나······.”
그렇게 말을 꺼내던 사비누스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널브러진 글라디우스 한 자루를 집어들은 뒤 검신을 손등으로 가볍게 두들겼다.
퉁! 퉁! 퉁!
“이런 명검을 왜 이 모양으로 만들었습니까?”
사비누스도 장군이다. 유능한 장수말이다. 장수가 좋은 무기인지 아닌지도 구분하지 못할까? 그는 보는 순간 지금껏 보지 못한 매우 뛰어난 검인 것을 눈치챘다. 생각보다 훨씬 가볍고 튼튼했다. 회오리치는 기묘한 물결문양은 품격마저 느끼게 만들었다.
그런 명검이 이가 나가고 반쯤 깨어져 있었다. 눈을 돌려 주변을 살피니 만들어진 검이 죄다 그런 몰골이었다.
“이게 무슨? 어디 쇳덩이에다가 내려치기라도 한 겁니까?”
“바로 봤군.”
모루에다 내리쳐서 아작을 낸 셈이니 아주 정확하게 본 셈이다.
“예?”
“실패작이야.”
사비누스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본래 질문하려던 것도 잊어버리고 반문했다.
“이게 실패작이라고요?”
“완성되면 일단 한 자루씩 줄 생각이었으니 그건 그때 가서 품평하도록 하고 그래서 의문은 풀린 건가?”
“아······.”
사비누스는 멍한 표정으로 들고 있던 검을 바라보다가 바닥에 내려놓은 뒤 고개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테세우스 님은 절 매번 놀라게 만드는군요. 이런 검은 본 적도 없습니다. 뭐 어쨌든 미리 감사드립니다.”
테세우스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사비누스에게 말했다.
“전장을 떠났어도 전사는 전사로군.”
“글쎄요. 비단 전사가 아니더라도 이런 검은 누구라도 소장하고 싶을 겁니다.”
“뭐······.”
다마스쿠스의 문양은 아름다우니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게다가 이 시대 어떤 검보다 가볍고 튼튼해 마주한 검을 깨부수기라도 한다면? 당연히 그 가치는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질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기물을 봤더니 원래 의도를 잊어버렸군요.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제가 보기엔 지금 상황이 전혀 나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째서 비관하고 계신 겁니까?”
“술라의 레게스 코르넬리아(코르넬리우스 법)를 알고 있나?”
“자세히는 모르지만 트리뷴에게 극도로 불리한 법을 제정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테세우스는 사비누스에게 말했다.
“술라가 집권 초기에 제정한 법은 두 가지로 하나는 불안정한 로마의 재정을 바로 잡기 위해 채무자가 이자를 부담할 때 쌍방이 합의한 이율로 오직 원금에 대해서만 단리 계산하여 부담하도록 규정한 것과 스폰시오(공탁금: 배심원단이 아니라 한 사람이 판결을 내리는 민사 소송의 경우 담당법무관이 심리를 개시하기 전에 양측 모두 예치해야 금액)를 지불하지 못해 사건 심사를 받지 못하는 경우를 방지하고자 채무 관련 소송에 한해 예치 의무를 면제하는 법, 크게 이렇게 두 가지다. 사실 이것만 보면 술라가 제대로 통치한 것 같지만 알다시피 실상은 그렇지 않았지.”
테세우스는 잠시 말을 멈춘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이어진 토지법에서는 자신의 병사들에게 땅을 나눠주는 것을 골자로 했고 세네토르(원로원)의 권한을 증대시키기 위해 300명의 세네투스(의원)를 증원했으며 호르텐시우스 법을 폐지시킴으로 원로원 결의 없이는 트리부스회나 플레브스회에 모두 그 무엇도 다룰 수 없게 했다. 아울러 법안 관련 행위나 표결을 전면적으로 금지함에 따라 모든 표결은 켄튜리온회를 통해 이뤄지게끔 만들었다. 사실상 트리뷴은 허수아비에 불과하며 심지어 전직 트리뷴은 다른 어떤 관직에도 나갈 수 없게 만들었지.”
“으음. 제가 잘못 이해한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문제가 됩니까? 제가 알기로 테세우스 님은 다른 관직에 별 흥미가 없으신 것으로 압니다만······. 허수아비 노릇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테세우스 님의 의도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일이 아닙니까?”
“틀린 말은 아니야. 다만 그 전에 트리뷴의 특수성에 대해 짚어 보자면 트리뷴은 트리부스회에서 선출된 것이 아니기에 실질적인 권한도 없고 임페리움 역시 없다. 그럼에도 술라가 이렇게까지 트리뷴의 권한을 제한한 이유는 트리뷴의 신분이 신성불가침이며 국가의 모든 조치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으음. 트리뷴의 특수성이야 어쨌든 술라에 의해 그 권한이 모두 사라진 상황이 아닙니까?”
“바로 그래서 문제라는 거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내가 트리뷴직에 오를 것을 반대하는 측도 내 편이 아니고 트리뷴직에 오를 것을 요청한 측도 내 편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서신은 부르불리우스 편으로 전해진 겁니다. 그들이 왜?”
“술라가 딕타토르 시절 이 같은 법을 개정했지만 초창기에 제정한 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로마법을 송두리째 무시한 불법이다. 불법이니 언제든 개정될 수 있다. 그럴만한 의지를 지닌 사람들이 모인다면 언제든 개정될 수 있는 법이라는 소리다. 더욱이 나는 평민들의 지지를 많이 받고 있는 상황이다. 트리뷴직에 오르고자 행한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상황이 그러하지.”
테세우스의 말에서 슬슬 윤곽이 잡힌 사비누스는 미간을 좁히며 침음을 뱉었다.
“으흠.”
“그렇다고 트리뷴에게 무슨 힘이 있던가? 없다. 누차 언급했다시피 현 상황에선 유명무실 그 자체다. 그렇다고 저들이 나를 도울까? 그럴 리가 없다. 트리뷴이 되는 것도 험난하겠지만 그보다는 트리뷴에 오른 후에 더욱 험난한 길이 펼쳐질 거다. 아마도 그것을 통해 나의 정체를 로마인들에게 드러내고자 하는 속셈이겠지. 마치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려는 나의 멱살을 잡고 수면 밖으로 내동댕이친 상황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만 그렇다면 트리뷴을 애초에 거부하면 될 일 아닙니까?”
“거부라······. 그러기엔 로마에서 만든 적이 너무 강대하지. 결국 저들의 트리뷴 제안은 요청이 아니라 통보다.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일방적인 통보. 그것을 받아들이든 아니든 사회적으로 나를 매장하겠다는 통보나 다름없다.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나를 죽이려고 들 것이다. 내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저들에게 완전히 항복하거나 트리뷴을 받아들이고 트리뷴으로 살아내던가. 둘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