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
210. 한 편의 연극.
210.
재판관들이 매서운 눈빛으로 발작하려는 데메트리우스를 노려보자 그의 변호사들이 급히 데메트리우스를 만류했다. 그대로 두면 법정 모독죄와 같은 패널티를 부여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존경하는 재판관님! 이의를 제기합니다!”
“변론하라!”
재판관의 허락이 떨어지자 데메트리우스의 변호사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라는 변호사가 입을 열었다. 그는 옵티마테스의 일원이자 뛰어난 로마의 웅변가였다. 옵티마테스는 보수적인 원로원 계급의 새로운 명칭으로 로마 정계의 과두파(寡頭派, 통치자 및 소수 집단이 정치·경제적 권력과 이익을 독점) 집단이었다.
이런 옵티마테스의 일원인 호르텐시우스는 자신의 뛰어난 웅변 실력을 권력자들을 옹호하고 저들의 권익을 보장하는 것에 사용했고 그 결과 호르텐시우스는 상당한 부와 성공을 얻을 수 있었다.
호르텐시우스는 데메트리우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거물이라 할 수 있었기에 데메트리우스의 변호인단이 그의 발작을 빠르게 저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상당 부분이 호르텐시우스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실 크라수스와 카이킬리아 가문이 발을 빼는 것을 보고 호르텐시우스 역시 발을 빼고자 했었다. 술라 치세 아래서도 승승장구했던 호르텐시우스였기에 데메트리우스와도 면식이 없던 것은 아니나 데메트리우스 때문이 아니라 바로 저들과의 관계 때문에 이번 재판에 합류했기 때문이었다.
하나 위기감을 느낀 데메트리우스가 그에게 막대한 보상을 약속했기에 호르텐시우스는 데메트리우스를 떠나지 않고 그의 변호를 담당하고 있었다.
“모름지기 변론이라는 것은 명확한 증거를 기준으로 주장해야 하는 것인데 키케로, 저자는 확인되지 않은 증언만으로 피고인을 모함하고 있습니다.”
호르텐시우스는 재판을 지켜보는 재판관과 배심원 그리고 청중을 고루 살펴보며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소송을 제기하여 재판을 청구한 자는 원고인, 소송을 당한 자는 피고인이기에 테세우스가 원고 데메트리우스 피고인이었다.
“재판관님도 아시다시피 이 사건은 증거랄 것이 없으며 따라서 본 피고인이 테세우스를 겁박한 사실 자체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가 검투장에서 검투사로 싸운 일 또한 테세우스, 본인의 선택에 의한 것이지 피고인이 그를 압박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피고인은 표류하던 원고인을 구하고 원고인이 원하는 대로 검투장에 그를 데려다주었을 뿐입니다. 피고가 원고의 앞날까지 책임져 줄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본 피고는 원고의 선택을 존중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존경하는 시민 여러분! 이 일이 어찌 고소할 일이겠습니까? 원고는 백 아우레우스를 훔친 사실을 무마하기 위해 도리어 피고측을 모함하고 있을 뿐입니다!”
호르텐시우스의 말에 눈썹을 꿈틀거린 키케로가 말했다.
“이의를 제기합니다.”
“존경하는 재판관님! 제 변론은 아직 끝나지 않습니다.”
두 변호사를 번갈아 보던 재판관은 호르텐시우스에게 말했다.
“피고 측은 변론을 계속하라.”
고개를 가볍게 숙여 재판관에 감사를 표한 호르텐시우스는 키케로를 슬쩍 비웃은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존경하는 시민 여러분! 원고의 정확한 신분은 알 길이 없으나 그가 검투사 계약을 맺을 당시, 노예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원고측이 내세운 증인들의 증언만으로도 파악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자유민으로서 자신의 계약 여부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자가 검투사 계약을 맺은 연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통념적으로 자유민이 검투사로 활약하는 경우는 대다수 생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원고라고 달랐겠습니까?”
“이의 있습니다! 피고측은 추측만으로 변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재판관은 이번에도 피고측에 손을 들어줬다.
“기각한다! 피고측은 변론을 계속하라!”
오연한 눈빛으로 주변을 훑어보던 호르텐시우스는 다시 말을 이었다.
“먼저 본 피고인이 매정하게 원고를 거리 밖으로 내몰았다는 게 분통하여 피고인을 고소한 것이라면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라 언급하고 싶습니다. 원고는 피고의 도움을 받아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검투소 훈련소에 입소할 수 있었습니다. 원고가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이 호르텐시우스도 인정하는 사실이나 이쯤에서 원고가 피고의 목숨을 구했을뿐더러 충분한 도움을 베푼 너그러운 로마의 시민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물론 검투사는 소년이 감당하기엔 위험한 일입니다만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피고가 원고의 앞날까지 책임져줄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그 선택이 선택권을 가진 온전한 자유민의 선택이었다면 말입니다.”
키케로는 눈매를 좁히며 호르텐시우스를 바라봤다. 키케로의 그런 시선을 즐기기라도 하듯이 지긋이 미소를 짓던 호르텐시우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정황을 감안할 때 설혹 본 피고가 원고와 내기를 했다손 치더라도 백 아우레우스는 너무 과한 액수입니다. 피고의 궁핍한 상황을 고려하면 십분의 일인 십 아우레우스도 분에 넘치는 금액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원고는 피고와 내기를 했고 정당하게 취한 금액이라 우기고 있습니다. 실상은 피고의 돈을 훔쳐 달아난 도둑에 불과하면서 말입니다!”
호르텐시우스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격정적인 어조로 소리쳤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배심원과 시민 여러분! 원고가 자유민임에도 불구하고 검투사로서 계약을 맺어야만 했던 연유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상기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런 소년에게 백 아우레우스라는 거금이 눈앞에 놓였다면?”
호르텐시우스는 강렬한 눈빛으로 주변을 돌아보다가 다시 말했다.
“피고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한 가지, 설마하니 은혜를 베푼 원고가 자신의 돈을 훔쳐 달아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점일 겁니다. 그런데 이제 와 원고가 도리어 피고를 고소하다니요? 신성한 법정을 모독하는 것은 피고가 아니라 원고이며 누명을 씌운 것 역시 피고가 아니라 원고입니다! 그러니 나 호르텐시우스는 역으로 그의 시민권과 신분을 박탈하고 이 모든 죄를 원고에게 물을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메트리우스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느긋한 표정으로 테세우스 등을 비웃고 있었다. 호르텐시우스를 붙잡느라 많은 재물을 써야 했지만 그야말로 탁월한 판단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도리어 테세우스 저놈을 겁박하다니? 호르텐시우스 이 자가 왜 당금 로마에서 변호사로서 명성이 자자한지 분명히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발언권을 요청합니다!”
키케로의 말에 재판장이 짧게 대답했다.
“허한다!”
그러자 키케로는 형형한 눈빛으로 호르텐시우스를 바라봤다. 과연 달변가였다. 증거가 없고 증언 역시 효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을 매우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었다. 테세우스 측으로 쏠렸던 무게추를 원점을 지나 데메트리우스에게 완전히 쏠리게 만든 셈이었다.
그러나 키케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그렇게 보일 뿐,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이미 결말 맺어진 이 지루한 연극을 끝날 때가 왔다. 화려한 언변으로 길게 늘여 말할 것도 없었다.
“서두에서 변론은 명확한 증거를 토대로 두고 이뤄져야 한다고 했소이까? 정작 그런 말을 한 당사자의 변론에는 추측과 궤변만 난무할 뿐, 사실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군요. 적어도 앞서 행한 제 변론에는 증인들의 증언이 그 증거가 되기라도 했습니다만? 대체 피고측 변호사의 변론 중 추측이나 거짓이 아닌 게 있기는 합니까?”
키케로의 날카로운 말에 호르텐시우스의 화려한 언변에 넘어가 웅성거리던 청중의 소음이 뚝 그쳤다. 호르텐시우스 역시 로스키우스 사건 하나로 반짝 인기를 얻은 애송이 변호사 따위가 자신에게 도전해오자 서늘한 눈빛으로 키케로를 바라봤다.
키케로는 그런 그를 일별한 뒤 재판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피고측이 언급한 대로 이번 사건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제출하겠습니다!”
그 말에 호르텐시우스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으며 데메트리우스를 바라봤다. 데메트리우스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법정 안이라 입을 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단호한 표정에 호르텐시우스는 데메트리우스가 호언장담했던 말이 떠올랐다.
‘증거따위는 없소. 놈을 팽하기로 계략을 짜고 움직였던 내가 애초에 그런 어리석은 증거따위를 남겨뒀을 것 같소?’ 라는 말이 말이다.
호르텐시우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입을 열었다.
“증거라······. 행여 위조 증거를 내세운다면 그 죄는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오!”
키케로는 냉정한 표정으로 그런 호르텐시우스에게 말했다.
“위조인지 아닌지는 법정에서 판단하게 될 터, 당신이 걱정할 바는 아니오.”
이 건방진 애송이 놈이? 그러나 노련한 호르텐시우스는 침묵으로 응수했다. 지금은 감정적으로 나설 때가 아니었다.
“······.”
“허한다! 증거를 제출하라!”
재판관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호라티우스가 잘 싸인 천에 보관된 무언가를 들고 재판관에게 제출했다.
재판관들이 천을 열고 보자 그것은 이리저리 깨진 조각들의 파편이었다.
“이건?”
재판관들이 반문하자 키케로가 말했다.
“보시다시피 점토판입니다. 바로 원고, 테세우스의 검투사 계약서 원본입니다. 조각을 이어보시면 계약서의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좋다! 이것의 내용을 확인하는 동안 잠깐 휴정하겠다!”
휴정이 선언되었으나 누구도 법정을 벗어나는 자들이 없었다. 다만 정숙이 가득하던 법정에 시끌벅적한 소음이 울려 퍼졌을 뿐이다.
잠시 뒤 호르텐시우스가 일그러진 얼굴로 데메트리우스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증거는 없다고 하지 않았소이까?”
“그.. 그럴 리가 없소! 점토판은 테세우스 저 놈이 직접 깨버렸다고 들었단 말이오!”
심지어 당시 테세우스와 계약을 맺은 당사자인 폼페이의 라니스타(검투사 훈련소 주인), 페루사니는 너무 위험하다고 여겨서 사람을 시켜 죽이기까지 했다.
페루사니에게도 없던 그 점토판이 대체 어디서 튀어나왔단 말인가? 아닌 말로 테세우스의 명성이 지금처럼 높기라도 했다면 그나마 이해가 되지만 최근까지도 그는 한낱 금화를 훔친 도둑놈에 불과했다. 그런 도둑놈의 계약서가 대체 무슨 가치가 있다고 지금껏 보관되고 있었단 말인가? 데메트리우스는 전혀 예상치 못한 물건의 출현에 벙찐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아······. 지금! 그 깨진 점토판이 지금 재판관들의 손에 있지 않소? 대체 일을!!”
변호사 신분으로 가서 확인해보니 자신이 보기에도 진본으로 보였다. 이에 호르텐시우스가 분을 참으며 데메트리우스에게 말을 뱉을 때 재판을 재개한다는 재판관의 선언이 떨어졌다.
쾅! 쾅! 쾅!
“정숙! 정숙하라! 재판을 재개하겠다. 제출한 증거는 확인했다. 그러니 원고측 변호사는 변론을 계속하라!”
“존경하는 재판관님. 그리고 배심원 여러분! 확인하신 계약서에 따르면 원고, 테세우스가 검투사로 출전하는 횟수는 세 번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피고측 변호인의 말대로 원고가 생계문제로 검투사 출전을 원했다면 어찌 세 번만 출전하는 것으로 계약을 맺었겠습니까? 또한 계약서에도 적혀 있듯이 원고의 후견인은 다름이 아니라 피고, 데메트리우스입니다.”
호르텐시우스는 언제 당황했냐는 표정으로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점토판에 불과한 계약서일 뿐이니 얼마든지 위조될 수 있으며 설혹 진본이라고 해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내용이오. 어린 소년이 무슨 수로 라니스타와 계약을 맺었겠소? 그러니 후견인이라 기록된 내용은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이며 그게 이 일과 대체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이오?”
키케로는 호르텐시우스의 반론에도 응수하지 않고 재판관에게 말을 꺼냈다. 마치 불필요하다는 태도였다.
“존경하는 재판관님! 두 명의 증인 출두를 요청합니다.”
“이미 모든 증인이 출두한 것이 아니었던가? 어쨌든 허한다.”
그러자 두 사람이 다시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호르텐시우스는 두 사람을 보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데메트리우스는 달랐다.
“아.. 아니! 너.. 너는?”
저놈이 왜 이곳에 증인으로 나타난단 말인가? 대체 이 일과 무슨 연관이 있어서? 데메트리우스는 예상치 못한 인물의 출현에 놀란 마음보다 의아함을 감추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