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209화 (209/298)

# 209

209. 한 편의 연극.

209.

평민들을 위한 축제, 루디 플레비가 떠들썩하게 끝난 어느 날 아침, 드디어 그날이 밝았다.

로마에서는 크고 작은 수많은 재판이 열린다. 법에는 무지하고 언변만 화려한 카우시디키(엉터리 변호사)들이 법정 앞에서 의뢰인을 낚고자 기웃거리는 사실만 봐도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법정에 나서서 재판과 상관없는 내용을 유려하게 연설한들 대체 그게 재판 결과에 무슨 영향을 미친단 말인가?

하나 법에 무지하고 돈에 쪼들리는 무지한 의뢰인들은 카우시디키들의 화려한 언변에 속아 저들에게 재판을 맡기는 경우가 허다했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패소했다. 법정에서 로마의 가십거리나 늘어놓는 변론 따위로 어찌 승소할 수 있을까? 그건 재판에 문외한인 의뢰인이 들어도 이건 정말 개소리구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재판이 시작되거나 마친 후였다. 판결이 난 재판을 뒤집는 일은 훨씬 더 많은 재물과 시간을 요하는 일이니 애초에 재물과 시간에 쪼들리던 이들이 감당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주연 키케로, 조연 테세우스, 악역 데메트리우스 그리고 법정을 장식할 수많은 엑스트라들, 등장인물은 이만하면 되었다.’

테세우스는 자신의 눈을 마주한 키케로를 향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가짜 변호사가 판을 친다지만 키케로는 술라의 그늘아래 놓인 크리소고누스를 단신으로 격파한 위인이었다. 유능한 변호인단이 데메트리우스를 변호할 것이니 자신의 변호와 웅변이 무슨 소용이겠냐고 자신을 낮춰 말했으나 과연 유능한 변호인단이 크리소고누스 때에는 없었을까?

데메트리우스가 술라의 해방노예라면 크리소고누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지금은 술라도 사망했고 그의 뒷배가 되어주던 크라수스와 카이킬리아 가문도 손을 뗀 상황, 데메트리우스도 상당히 부유했기에 변호인단 자체가 와해되지는 않았지만 키케로가 맞닥뜨릴 변호인단은 크리소고누스 때보다도 변변찮았다.

로마의 유능한 변호사로 이름이 높은 바로 그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테세우스를 변호하기 위해 로마의 법정 위에 섰다.

바실리카(법정, 상업거래소, 집회장 등으로 사용된 건물) 안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빼곡이 자리하여 오늘의 재판 결과를 주시했다. 이번 해에도 수많은 재판이 열렸지만 결단코 오늘만큼 로마시민의 많은 관심을 받는 재판은 없었다.

집정관은 한 달씩 번갈아가며 실무를 책임지고 실무를 책임지지 않는 집정관에겐 상대 집정관의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게 했다.

따라서 이번 달의 실무를 책임진 집정관은 데시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아니라 마메르코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였다. 다만 실무를 책임진 집정관은 레피두스였지만 오늘 재판을 주재하기로 예정된 자는 브루투스였다.

한데 웬걸? 브루투스는 눈에 보이지 않았고 마메르코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법정에 자리하고 있었다.

크라수스도 카이킬리아 가문도 이 사건에 대해 손을 뗀 지 오래였다. 유니아 가문의 브루투스라고 무슨 영화가 있다고 이 사건을 주재하겠는가? 자신을 움직이게 만든 당사자들이 발을 뺀 마당에.

고로 자연히 오늘 재판의 주재는 이번 달의 실무 집정관인 레피두스에게 돌아왔다. 굳이 콘술(집정관)이 재판을 주재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프라에토르(법무관) 등에게 맡겨도 되는 일이었으니까. 로마의 콘술이 맡은 업무는 결코 적지 않았고 당연히 모든 재판을 주재할 수도, 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레피두스는 기꺼이 이번 재판을 주재하기로 나섰다.

이유는 간단했다. 본디 그는 테세우스에게 악감정을 지닌 인물도 아니었을뿐더러 율리아 가문과 내년 집정관 선거에 나설 부르불리우스가 손잡았다는 소식은 그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집정관 위에 오른 레피두스가 후임 집정관의 당선에 대해 신경쓰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술라에 의해 폐지된 켄소르(censor, 감찰관)라든지 콘술러(consular, 전임집정관)나 프로콘술(집정관대행), 프라에토르(법무관)와 프로프라에토르(법무관대행)가 임관할 수 있는 거버너(총독)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켄소르(감찰관)는 딕타토르(독재관)와 더불어 로마 최고위 정무관에 속하며 아욱토리타스(권위)와 디그니타스(존엄)를 갖춘 전임집정관들만 입후보할 수 있었다. 감찰관에 선출된다는 것은 정치경력을 완벽하게 인정받는다는 뜻으로 로마 최고 권력자 중 하나가 된다는 소리였다.

켄투리아회를 통해 두 명의 감찰관이 동시에 선출되었으며 임기는 5년이었으나 대개 당선 후 18개월 동안만 활동했다.

이들은 원로원과 에퀴테스 계급 및 로마가 공마를 제공하는 고위 에퀴테스 계급 1천 800명의 자격을 감독, 관리했으며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 본국과 속주 전역의 로마 시민들의 총인구조사를 실행했다. 자산조사, 세금징수, 각종 공공사업의 각종 발주계약 또한 감찰관들의 소관이었다.

다시 말해 로마의 공직 시스템 자체는 권력자가 권력자를 감시 및 견제하는 구도로 어느 일개인에게 권력이 쏠리는 독재체제를 막기에 충분했다.

하나 이 감찰관직을 술라가 폐지함으로 원로원이나 기사 계급을 비롯한 공직자들의 자격을 감독하거나 관리할 자가 사라졌다. 감찰관이 있을 때는 그나마 형식적으로나마 제어되던 욕망들이 무분별하게 발산되고 있다는 소리와도 동일했다.

다만 감찰관은 임페리움(공인된 지휘권)이 존재하지 않기에 영향력 자체가 막강한 것은 아니나 정무관의 의무와 자격을 심사한다는 측면에서 권력자들에게 매우 불편한 관직이었음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훗날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집정관 위에 오른 뒤 감찰관 직위를 잠시 부활시키나 그마저도 내전에 돌입하면서 선출되지 않았고 BC 22년 경 아우구스투스가 두 명의 감찰관을 세운 것을 마지막으로 사라진다.

그러니 술라가 폐지시켰다지만 이미 부패할대로 부패한 로마가 감찰관직을 달갑게 받아들일 리가 없다. 누구도 감찰관의 부활을 달가워하지 않으니 현재 레피두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총독위라고 할 수 있었다.

레피두스는 동맹시 전투 중 메텔루스 피우스 아래에서 큰 공을 세운 장군답게 집정관으로서 많은 수의 군대를 효과적으로 지휘하는 공을 세우긴 했지만 총독 위에 오를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실제로도 그는 총독 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생긴 것이다. 로마의 가장 오래된 가문인 율리아 가문과 내년 집정관 위에 오를 부르불리우스의 호의를 산다면 이는 결코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이 아닐 테니 말이다.

크라수스와 카이킬리아 가문이 먼저 발을 뺀 이상, 전과 달리 테세우스의 편을 드는 일이 저들에게 적대행위로 비춰질 수도 없을 터, 적어도 직접적인 적대행위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따라서 레피두스는 가벼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멘시스 노벰베르 위긴티,(11월 20일) 공판을 시작하라!”

당연히 개회를 선언하는 레피두스의 표정에는 테세우스를 향한 호의가 가득했다.

그런 레피두스의 모습을 확인한 키케로는 무심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있는 테세우스를 다시금 힐끔 쳐다봤다.

이건 이미 끝난 재판이다. 자신이 아니라 누가 변론하더라도 패소할 리가 없다.

데메트리우스가 확보한 증인들을 모두 매수했으며 재판을 주재하는 콘술의 마음까지도 얻었다. 시민들의 호의 또한 데메트리우스가 아니라 테세우스에게 향하고 있었고 가장 중요한 권력의 무게추가 테세우스에게 기울었다. 심지어 정의도 테세우스에게 있지 않은가?

아닌 말로 오늘 자신이 법정에서 카우시디키들처럼 가십거리나 줄줄 늘어놓는다고 해도 배심원들은 만장일치로 테세우스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증인들에게도 재물을 아끼지 않았던 테세우스가 배심원들의 마음인들 사지 않았을까?

이건 정말이지 한 편의 연극에 불과하다. 테세우스의 승소로 이미 결말 맺어진 한 편의 연극 말이다. 테세우스는 무대와 배우, 각본까지 모두 마련해놓고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라는 사람을 주연으로 세웠을 뿐이다.

아마 자신을 주연을 내세운 것조차도 다른 각본에 의한 장치일 가능성이 높았다.

키케로는 그것을 알았지만 그의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권력자와 시민의 눈이 한 곳에 쏠린 화려하고 거대한 무대의 주연이 다름이 아니라 키케로 자신이었으니까.

닭살이 오돌도돌하게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혹 살을 에일 것 같은 추위 때문에? 결코 아니다. 오늘 법정 안은 사람들의 열기와 흥분으로 인해 추위 따위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후끈했다.

이는 레피두스의 태도를 보고 테세우스에 대해 다시금 전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자는 대체 어디까지 가늠하고 있었단 말인가?

키케로는 그제야 크라수스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테세우스를 후원했던 크라수스가 로마시민의 인기를 등에 업은 테세우스를 자신의 세력 확장을 위해 더 활용하지 않고 매몰차게 태도를 바꿔 술라의 해방노예 따위를 지지한 연유를 말이다.

너무 뛰어나다. 지난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보여준 무력은 말할 것도 없고 심계 역시 소름이 끼칠 정도로 대단하다. 만약 그가 지금보다 더 높은 명성과 인기, 그리고 더 많은 권력과 지위를 손에 넣는다면?

키케로에게 재판에서 어찌 승소할 것에 대한 것은 이미 뒷전이었다.

공화정은 더 이상 공화정으로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너무 위험한 존재다. 그에게 그토록 쉽게 시민권과 신분을 허락해선 안 되는 일이었다. 그의 능력으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없는 유일한 문제를 이 부패하고 어리석은 로마는 개먹이를 던져주듯 아무렇지 않게 던져줬다.

로마인이 아니라면 전 로마가 단합하여 그를 상대하면 될 일이지만······. 그는 이미 로마인이다. 로마에 들어선 지 불과 몇 개월도 채 되지 않아서 로마의 모든 시민들이 그의 이름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란 말인가?

그를 패소시킬 수 있다면? 하나 자신도 이미 결론내린 일 아닌가? 이미 자신은 테세우스와 운명공동체로 묶인 상황이며 오늘 법정에서 가십거리나 떠들어도 테세우스가 승소할 것이다. 그러니 그래 봐야 자신의 얼굴에만 똥칠을 할 뿐이다.

영광스러운 자리다. 거짓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고 진실을 대변하고자 이 자리에 서 있다. 또한 승소한다면 명성과 출세길이 활짝 열리는 셈이기도 하다. 로스키우스 사건 때와 달리 모든 것이 자신을 향해 활짝 웃고 있지만 정작 키케로는 웃음을 지을 수 없었다.

키케로는 모든 상념을 뒤로 하고 준비한 변론을 시작했다.

“존경하는 시민 여러분!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먼저 이 사건을 증언할 증인 출석을 요청합니다! 모든 증인들을 말입니다.”

한 명씩 차례로 출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증인이라는 말에 재판관들이 서로를 마주보다가 키케로에게 대답했다.

“그것이 원하는 바라면 그렇게 하라!”

데메트리우스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코웃음을 쳤다. 모든 증인의 출석을 요청해? 증인이라 부를 만한 사람은 이미 자신이 매수한지 오래인데 그 무슨? 키케로 저자는 증인출석을 요구할 게 아니라 감언이설이라도 길게 늘어 놓았어야 했다. 따라서 데메트리우스는 오만한 표정으로 키케로를 노려봤다.

이윽고 테세우스 측이 확보한 증인들이 한꺼번에 법정에 출두하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데메트리우스는 점점 눈을 크게 뜨다가 이윽고 소리를 질렀다.

“아니! 저자들이 왜?”

쾅! 쾅! 쾅!

“신성한 법정에서 조용히 하라! 다시 소란을 피울 시에는 법정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합당한 죄를 물을 것이다!”

재판관의 서늘한 선언에 데메트리우스는 부들거리는 주먹과 함께 억지로 자리에 앉았다. 함께한 변호인단이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면 그는 이성을 잃고 더욱 광분했을 것이다.

그랬다. 데메트리우스는 재판이 열리는 그 순간까지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이 확보한 증인들이 이미 테세우스에게 매수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는 테세우스가 저들을 매수하되 재판이 벌어지는 그 순간까지 데메트리우스에게 협조하는 모습을 취하라 명했기 때문이었다.

데메트리우스는 분노한 눈빛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지만 테세우스는 데메트리우스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는 키케로 역시 마찬가지였다.

키케로는 법정에 출두한 증인들에게 그날의 일에 대해 진술할 것을 요청했다. 증인들의 증언이 줄줄이 이어지자 데메트리우스의 표정은 흙빛이 되다못해 검게 변했고 청중들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싸늘한 경멸만 존재할 뿐이었다.

아직도 많은 증인이 남아 있었지만 키케로는 그들의 증언을 끊고 청중을 바라보며 말했다.

“더 들을 것도 없습니다. 데메트리우스 이 자는 바다에서 표류하는 어린 소년을 겁박해 검투사로 싸우게 했을뿐더러 정당한 내기로 인한 백 아우레우스(금화)마저 어린 소년이 도적질 했다고 거짓 신고하여 그의 목숨을 잃게 만들 뻔했소! 이 자의 죄는 일일이 거론하기도 입 아프지만 이 일만 해도 이 자의 죄가 얼마나 중한지는 시민들께서도 아실 것이오! 인간의 도의를 져버렸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신성한 계약을 위반하였고 아울러 로마의 공권력마저도 유린하는 중죄를 저질렀소! 이 어찌 존엄한 시민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소이까? 하여 존경하는 재판관과 시민 여러분! 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루키우스 데메트리우스 세쿤두스 이 자의 시민권을 즉시 박탈하고 로마를 멸시한 죄를 물을 것을 요청하는 바이오!”

데메트리우스는 서슬 퍼런 키케로의 외침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뭐.. 뭣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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