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207화 (207/298)

# 207

207.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

207.

“이이익!”

와장창창창!

데메트리우스는 탁상 위에 놓인 화려한 장식품들을 손으로 모조리 쓸어버렸다.

“테세우스! 테세우스!! 이놈이 감히!”

데메트리우스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감히 감히!!!”

분노가 극도로 치밀어올라 말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그의 노예들은 두려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채 차마 데메트리우스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잘못 걸리면 매질을 당해 죽든 곰치 연못에 빠뜨리든 어떻게든 죽이고도 남을 사내가 데메트리우스였으니 말이다.

옷 안으로 파고드는 차가운 한기조차 데메트리우스의 분노를 식힐 수 없었다. 그런 그를 무표정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자가 있었다. 바로 크라수스의 노멘클라토르, 아퀼라였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크라수스의 말을 전한 아퀼라는 정중하게 예를 표한 뒤 작별을 고했다.

“이대로! 내가 이대로 끝날 것 같은가? 재판에서 이기면! 재판에서만 이기면!!”

“잘 알고 계시는군요. 크리수스 님께서 마지막으로 당부한 말 역시 같은 말이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재판에서 이겨야만 할 것입니다. 그게 남은 유일한 방책입니다.”

멘시스 세스틸리스(8월)만 해도 이런 지경에 처하게 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로마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데메트리우스가 승리할 것이라고 여겼지 테세우스가 재판에서 승소할 확률은 극히 미약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불과 세 달 뒤, 재판이 열리는 달인 멘시스 노벰베르(11월)에 이른 지금은 이야기가 조금, 아니 많이 달라졌다.

데메트리우스는 잔뜩 일그러뜨린 표정으로 자신을 떠나가는 아퀼라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이대로.. 내가 이대로 끝날 것 같으냐? 으드득!”

*

“이제 곧 재판입니다. 석달 전만 해도 일이 이렇게까지 호전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말을 꺼내던 키케로는 묘한 눈빛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그러면서 지난 석달 동안 흡사 폭풍처럼 몰아친 테세우스의 계책과 수완을 떠올려봤다.

크리소고누스와 얽힌 로스키우스 사건을 해결함으로 명성을 높인 키케로는 당시 크리소고누스의 부패함을 다시금 거론하며 데메트리우스와 엮어갔다. 당시 크리소고누스가 얼마나 탐욕스럽고 부패한 사람이었는지와 크리소고누스와 데메트리우스 모두 술라의 해방노예였다는 걸 부각시키는 것으로 충분했다.

이 일은 테세우스가 누명을 썼을 거라 추측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추측을 뒷받침해주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되기에 충분했다. 재판의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여론이 테세우스 편으로 완전히 돌아섰다는 이야기다.

하나 단순히 그뿐이라면 어찌 여론이 완전히 테세우스 편으로 돌아섰겠는가?

세인들에게 정의가 어디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권이 어디 있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정의를 주장하는 일이 자신의 이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손해를 봐야 한다면 그때도 정의를 주장할 자들이 대관절 얼마나 되겠는가?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말은 많으나 정작 자신의 것을 손해 보고 희생해야 한다고 하면 말과 행동이 싹 바뀌는 것이 현실이다.

다소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데메트리우스는 로마의 유력가들이 함께하는 막강한 로마의 유지였고 테세우스는 히스파니아에서 온 촌놈일 뿐이었다. 누구의 편을 드는 것이 더 이익인지는 너무나 극명하게 비교되었고 비단 누구의 편을 들지 않더라도 가만히 있는 것이 현명한 태도라 여기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하나 지난 석달 동안 테세우스는 그 상황 자체를 완전히 반전시켰다.

메텔루스 가문의 적의는 율리아 가문의 호의로 막았다. 카이사르의 서신은 율리아 가문을 테세우스 편으로 돌아서게 만들기에 충분했지만 테세우스는 단순하게 그들의 도움만을 요구하지 않았다.

단순히 도움만을 요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하책이라 할 수 있었다. 더 나은 방법은 저들에게 도움을 요구하되 저들의 이득까지 보장해 줄 수 있는 방법이었다. 도움만을 요구한다면 저들에게 손해와 희생을 요구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율리아 가문은 당연히 카이사르의 서신에 따라 테세우스의 편을 들 수밖에 없지만 그리하면 분명 손해 보는 일들이 생긴다. 아무래도 테세우스보다야 메텔루스 가문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이 커도 더 크지 않겠는가?

사실 도움만 요구해도 상관은 없다. 메텔루스 가문의 행보를 상당량 저지할 수 있고 그것으로 재판에서 승소할 수 있다면야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하나 기꺼이 손해를 감수할 만한 이득을 저들의 손에 쥐어 준다면 은혜는 은혜대로 남고 조력은 조력대로 얻을 수 있다. 이는 율리아 가문뿐만 아니라 키케로의 친구,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부르불리우스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그래서 둘을 이었다. 부르불리우스에게는 율리아 가문의 배경을, 율리아 가문에게는 콘술에 당선된 부르불리우스가 얻게 될 공권력을 사이좋게 이어줬다.

그뿐이랴? 아헤노바르부스를 필두로 메텔루스 가문과 크라수스에게 원한을 가진 가문의 힘을 하나로 모았다. 아울러 메텔루스 피우스와 테세우스 본인과의 전투를 여러 웅변가를 돈으로 사서 상세하게 시민들에게 설명했다.

직접 그 일을 겪은 테세우스가 정리한 일이다. 누가 그보다 더 상세한 내용을 알고 있으랴? 딱히 본인에게 이롭게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메텔루스 군 5만을 대패시키고 2만을 포로로 사로잡은 일과 메텔루스 피우스가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의 독살을 사주한 장본인이라는 사실 그대로만 이야기했을 뿐이다.

물론 지금은 그 부분에 대해 웅변하지 않는다. 메텔루스 가문이 이번 재판에 손을 뗀다고 의사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굳이 저들과 적대관계에 돌입할 생각이 없었던 테세우스는 그 즉시 선전 행위를 그만두었다. 저들이 적대하지 않는다면 자신도 굳이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일단 아버지의 원수는 메텔루스 피우스였지 메텔루스 가문 전체가 대상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메텔루스 가문뿐만 아니라 크라수스도 데메트리우스 재판에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데메트리우스 재판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후에 있을 아헤노바르부스 가문 등지의 여러 가문의 소송을 막거나 대처하는 데 집중해야 했으니 말이다.

이로써 데메트리우스를 막강하게 바쳐주던 뒷배경을 모조리 잘라냈다. 더 놀라운 것은 메텔루스 가문과 크라수스 등과 별다른 충돌 없이 그 일을 해냈다는 점이었다. 테세우스는 이해관계를 아주 교묘하게 연결하고 뒤틀었을 뿐이다. 그것을 다시금 떠올린 키케로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실 키케로는 테세우스의 행동들이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번 재판에서 이기고자 한다면 증인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증거랄 것이 전무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키케로는 증인들의 면면만 확인할 뿐 어떤 접촉도 하지 않는 테세우스의 태도가 답답할 지경이었다.

이번 재판은 자신에게도 중요했다. 이 일에 발을 디딜 때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걸려있었다. 율리아 가문과 콘술이 될 부르불리우스와의 관계, 그리고 이번 재판에서 승소하며 얻게 될 명성까지, 승소한다면 탄탄대로가 펼쳐지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러니 키케로서도 조급한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증인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증인들은 당연히 데메트리우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증언할 것이고 그리되면 자신이 어떤 화려한 변론을 펼치더라도 패소할 확률이 높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키케로도 알았다. 테세우스가 지금껏 얻은 승리가 단순히 니케(승리의 여신)가 그의 손을 들었기에 얻은 것이 아니란 것을 말이다.

부르불리우스와 율리아 가문이 손을 잡았고 그들이 테세우스를 지지한다는 소문이 돌자 지금껏 안배한 모든 것이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테세우스를 지지하는 것이 대세라는 것을 사람들이 인지한 것이다.

테세우스는 자신의 명성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내였다. 그는 여전히 수부라 지구에 거주하며 그를 찾아오는 수많은 로마인들과 교류했으며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는 적절한 도움을 베풀었다.

테세우스는 그런 후에야 증인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아니 증인들 가운데 몇몇은 제 발로 알아서 그를 찾아오기까지 했다. 그에게 호의를 가진 시민들이 많은 상황에서 거짓 증언을 한다면 으슥한 골목에서 칼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런 생각을 품을 수밖에 없는 것은 테세우스에게 가장 큰 호의를 보이는 자들이 바로 로마의 최하층민들이 모여있는 수부라 지구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수부라 지구의 사람들은 거칠고 사나우며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이 심약한 자들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제 발로 찾아와 사실 그대로 증언하겠다고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당연히 테세우스는 그들을 환대하며 상당량을 재물을 선뜻 베풀었다. 약속한 대로 올바로 증언한다면 더 많은 재물을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말이다.

수부라 지구의 사람들만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율리아 가문과 콘술 선거에 나설 부르불리우스가 이번 재판을 주시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테세우스의 승소를 누구보다 기대하고 있었다.

반면 데메트리우스의 배경이라 할 수 있는 메텔루스 가문과 크라수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손을 털은지 오래였다. 아니 애당초 저들은 공식적으로 데메트리우스를 지지한다고 표한 적도 없었다.

게다가 데메트리우스는 거짓 증언할 것을 요구했고 테세우스는 진실을 말할 것을 요구할 뿐이었다. 테세우스의 편을 들면 재물이 따르고 데메트리우스의 편을 들면 화가 미친다. 증인들이 누구의 편을 들지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마치 데메트리우스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키운 곡식의 열매를 마지막 순간에 테세우스가 낚아챈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데메트리우스가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테세우스에게 말을 던진 뒤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던 키케로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혹 연극을 본 적이 있소?”

연극을 본 적이 없겠는가? 연극보다 화려한 영화도 수없이 본 기억이 있는데 말이다. 하나 로마에서 행해지는 연극은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지나가며 본 적은 있지만 아쉽게도 제대로 감상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테세우스의 말에 키케로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극단에게 메텔루스 피우스와 당신의 전투를 재연할 것까지 지시했던 장본인이 말이오?”

“지시했다고 굳이 제가 그것을 감상할 필요는 없겠지요.”

“이미 결과가 정해져 있으니 말이오?”

“뭐. 비슷하다고 봐야겠지요.”

“······. 극단의 배우가 된 기분이오. 당신이 마련한 무대 위에서 당신이 쓴 각본대로 대사를 읊는 극단의 배우 말이오.”

“연극은 연극일 뿐이지요. 마찬가지로 각본과 대본 역시 그 연극에 한해 유효할 뿐입니다. 드넓은 세상을 담기엔 너무 제한적이고 국소적이지 않습니까?”

“하.. 글쎄요.”

키케로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마저 입을 열려고 할 때 호라티우스가 굳은 표정으로 들어왔다.

“테세우스 님을 찾아온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호의적인 사람이라면 이렇듯 호라티우스가 굳은 표정으로 보고할 리도 없었기에 테세우스는 적대 진영의 누군가 찾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들라이르게.”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보고 키케로도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혀 예상 밖의 인물이 테세우스를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메텔루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라고 하오. 당신이 살해한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의 아들이오.”

테세우스 역시 예상 못하긴 마찬가지였지만 메텔루스 피우스의 아들이 누구인지 정도는 진작에 파악해두고 있었다. 자신을 찾아온 스키피오 나시카는 메텔루스 피우스의 양자였다.

따라서 테세우스는 정중하게 인사하며 그를 맞이했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라고 합니다. 어찌 이런 누추한 곳까지 손수 방문하셨는지요.”

지금은 해가 저물어 동행이 금지된 밤이었다. 더욱이 이곳은 수부라 지구였다. 물론 테세우스가 이 지역의 무뢰배들을 모조리 쓸어버렸기에 그 위험이 예전에 비할 바는 아니나 위험하다는 것에는 이견을 가질 수 없었다.

야밤에 그것도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테세우스를 찾아온 연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테세우스도 선뜻 그 의도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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