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204화 (204/298)

# 204

204. 소문나지 않은 잔치.

204.

항우는 물론이거니와 서후 역시 로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리처드는 다르다. 로마로 인해 퍼진 라틴어를 언어로 사용했던 리처드가 로마 역사에 대해 문외한일 리가 없지 않은가? 언젠가도 언급했지만 단순무식했을 것이라는 그의 이미지와 달리 리처드는 시를 짓고 외울 정도의 문학적 소양도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리처드가 로마 역사를 달달 외우고 있는 수준은 아니었으나 카이사르의 일대기 정도는 꿰고 있었다. 따라서 테세우스 역시 카이사르에 대해 알고 있었다.

아닌 말로 몰랐다 손치더라도 크라수스나 폼페이우스는 물론 로마 유력가들조차 조사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테세우스가 로마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저 카이사르를 외면할 리 만무했다.

그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지 못하나 카이사르가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수모를 겪는다는 건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고 그 일이 고위 권력자들을 고소한 뒤 패소하여 도피성 유학을 떠났다가 겪게 되는 일이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패소하여 로마를 떠났다는 정보까지는 이미 확인한 내용이었다. 일이 알려진 역사대로 흘러간다면 이 일 이후, 카이사르는 해적들에게 납치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물론 카이사르는 몸값으로 은 20탈렌트를 요구하는 해적들에게 내 몸값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느냐며 도리어 은 50탈렌트를 요구하라는 등, 포로로 잡혔음에도 도적들에게 도리어 호통을 치는 등 범인으로서는 이해불가한 대범함을 보여준다. 풀려난 후에도 함대를 모집하여 저들 모두를 토벌하고 몸값으로 지불한 은 50탈렌트 역시 회수하지만 해적에게 납치당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랬기에 저들을 철저하게 궤멸시킨 것이 아닌가? 실제로 카이사르는 포로되었을 때 해적들에게 선포한대로 사로잡은 해적들까지 모두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다.

참고로 십자가형은 극도로 고통스러운 형벌이자 저주받아 마땅한 자에게 내리는 형벌이기도 했다.

하여 카이사르는 관용을 보이고자 먼저 목을 베고 해적들을 매달았다. 관용을 보였다는 점에서 포로 시절, 카이사르를 대한 해적들의 태도가 썩 나쁘진 않았던 모양이다. 깔끔하게 죽이는 것에 관용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지만 죽기 전 지독한 형벌을 피하게 했다는 점에서 보자면 관용이 맞았다.

‘수모를 당했으나 그것을 잊지 않고 모두 되갚았으며 고난 가운데 뱉은 말도 모두 지킴으로 자신의 이름을 존귀하게 만들었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술라가 죽이려고 했던 사내라지만 글쎄요. 율리아 가문의 사람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는 플라멘 디알레스(유피테르의 고위신관)였던 자가 아닙니까? 물론 술라가 신관 위를 박탈하기는 했지만 정당하지 않은 처사였으니 언제든 본인이 원한다면 신관 위를 되찾을 수도 있을 겁니다.”

“다시 플레멘 디알레스가 될 것이라 보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신관 위에 오를 수도 있겠지. 이를 테면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 최고위 제사장)말이야.”

“폰티펙스 막시무스 말입니까? 현재 폰티펙스 막시무스는 공석이 아닙니다만?”

테세우스는 고개를 주억이며 반문하는 사비누스에게 말했다.

“생각해보라. 그가 신관 위로 돌아가려고 했다면 고위 관료들을 고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게 신관 생활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제야 사비누스는 테세우스가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거론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야심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말씀이십니까? 하나 어쨌든 그는 패소한 변호사일 뿐입니다. 야심이 대단한 자는 무수히 많습니다. 하나 결국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아직은······. 아직은 그렇지. 게다가 능력? 능력이라······.”

서신을 앞에 두고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기던 테세우스가 사비누스에게 말했다.

“능력이 출중한 이들이 흔히 착각하기 쉬운 오해 중 하나가 뭔지 아는가?”

“그게 무엇입니까?”

“본인이 뛰어나고 출중해서 마치 훌륭한 능력을 갖춘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는 점이다.”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호라티우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으흠. 사실 그건 맞는 소리지 않습니까? 능력을 다른 사람이 배양시켜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실례로 제 아무리 뛰어난 훈련 교관이 가르치더라도 본인이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완전히 틀렸다고는 하지 않았다. 하나 그게 전부는 아니지.”

“고견을 경청하고자 합니다.”

“고견까지랄 것도 없고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타고나기를 허약한 자라면? 신체의 어딘가가 불편하다면? 이를 테면 팔이나 눈이 잘못 되었다면 훈련관의 뛰어남과 본인의 노력여하는 둘째치고 훈련소에 입소하지도 못할 것이다. 인생의 모든 부분이 그러하다. 모두가 같은 출발점, 같은 기회를 가지고 같은 혜택을 받지도 않는다. 하나 가진 자는 제 잘난 탓에 그 모든 것을 얻었다 착각하기 쉽지.”

테세우스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서신을 불살라버리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물론 야심을 가지고 성공하려는 자들 가운데 능력이 부족하여 얻지 못한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나 그 가운데 능력이 출중하지 않은 자가 과연 없었을까? 능력이 출중하고 자격이 갖춰진 자만 성공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왕의 자리에 앉은 자들은 성군이나 명군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라를 대차게 말아먹는 암군(暗君)은 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으흠.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바다 위에서 배를 움직이는 것은 결국 언제 어디로 불지 종잡을 수 없는 거센 바람이다. 배에 비유하자면 사람의 능력이라는 것은 노잡이의 노젓기나 조타수의 방향 조정 정도가 되겠지. 백날 저어봐야 거세게 부는 바람에 힘을 받아 밀려가는 배에 비할 바랴? 그리고 그렇게 밀려가는 배에는 노잡이가 없겠고 조타수가 없겠는가? 선원과 선장이 배를 몰았지만 배가 무사히 항구에 도착하는 것이 어찌 그들이 뛰어났기 때문만이라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폭풍우가 돛을 부쉈다면? 거대한 파도가 저들의 배를 덮쳐 침몰시킨다면? 항해하는 자의 모든 기술과 능력이 대관절 무슨 의미가 있겠나? 애초에 배가 제대로 건조되지 않았다면? 수리되지 않았다면? 그때에도 저들이 무사히 항구에 도착할 수 있겠나?”

“으흠.”

“능력 물론 중요하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 그보다도 으흠. 그래 간단히 운이라 명명하지. 운이 좋아야 한다. 그리고 그 운은 역사가 증명하듯 대개 대의를 가진 자를 따르기 마련이다.”

사비누스는 인정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카이사르가 그런 대의를 가진 사내라는 말씀이십니까?”

“글쎄. 그건 나도 모르지. 꼭 그런 것도 아니고 말이야. 하나 한 가지 확실한 건 그의 가문이 쌓은 기세나 운이라는 것이 있지 않나? 로마의 뿌리와 맞닿아있는 율리아 가문의 기세 말이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카이사르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그가 과연 패소할 것을 짐작하지 못하고 재판을 진행했을까? 물론 승소에 대한 기대가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라면 이미 예측했을 것이다.”

“으흠.”

침음을 흘리는 사비누스를 뒤로하고 호라티우스가 테세우스에게 질문했다.

“나디르를 보낸 것은 그래서?”

“나디르는 카이사르가 그리스에서 로도스로 향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하는군. 그러니 이제 곧 카이사르의 바람이 로마에도 전해질 것이다.”

카이사르의 바람? 호라티우스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율리아 가문의 사람이... 아니 테세우스 님의 말대로 카이사르를 돕는 것이 율리아 가문의 호의를 얻는 일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라면 당연히 그에게 유학에 필요한 경비 정도야 충분할 겁니다. 재물로 그를 돕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테세우스가 대답하지 않자 사비누스 역시 의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이야 어찌되든 율리아 가문의 호의로 메텔루스 가문의 적의를 상쇄한다라······. 꽤나 이상적인 행보입니다만 어찌 그리도 확신하시는 겁니까?”

그야 역사를 알기 때문이지만 경솔하게 말을 뱉을 테세우스가 아니었다.

“그 일은 내게 맡기도록. 차차 설명해줄 터이니 일단은 넘어가도록.”

“음.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저들이 확보한 증인들의 명단은 확인된 바가 있나?”

“예. 전부는 아니고 확인된 몇몇이 있지만 접촉은 하지 말라는 명에 내버려 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테세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아직은 주시만 하도록. 교섭도 상대방이 교섭할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

다가오는 해적선을 서늘한 눈빛으로 지켜보던 카이사르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빠르게 짓쳐드는 트라이림 한 척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킬리키아 해적들과는 다른 방향에서 나타난 배로 해적들이 소유한 배로 보이지 않았다.

“흐흐흐흑! 우린 다 노예로 팔려가고 말거야.”

“죽이지 않고 노예로 팔기라도 하면 다행이게? 우린 다 죽을 거야.”

“항복! 항복해야 해! 저들에게 저항하기라도 하면 우리 모두를 몰살시키고도 남을 놈들이다.”

“항복은 무슨!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해적놈들과 싸워보지도 않고 포기하다니! 이런 겁쟁이들을 같으니라고! 싸워야 합니다!”

전투를 주장하는 자들은 잃을 재물이 많은 상인들의 목소리가 대부분이었다.

“너나 싸워! 이 새끼야! 검 한 번 들어보지 못한 것처럼 생겨가지고! 네가 제일 먼저 뒤지면 그땐 싸우자는 소리가 쑥 들어가겠지. 다만 네가 칼을 들고 설치면 해적들이 애꿎은 우리까지 죽이려고 들 테니 그게 문제라는 소리다.”

“옳은 소리! 배에 전투할 수 있는 사내들도 적은 상황에 무슨 수로 저들과 싸워 승리한단 말이오? 대부분 개죽음이나 당하고 말 것이오!”

카이사르 역시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재물도 귀하겠지만 제 목숨보다 귀하랴? 잃어버린 재물은 찾으면 그뿐이나 한 번 잃어버린 목숨은 그것으로 끝이다.

그때 선장이 쭈뼛거리며 카이사르에게 다가왔다.

“로.. 로마의 지체 높은 가문의 사람으로 보이시는데 이 일을 혹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귀티가 흐르는 얼굴에 꽤 많은 노예를 데리고 승선했고 로마인임을 증명하는 복장을 갖추고 있었으니 그가 그리 짐작하는 것도 기이한 일이 아니었다.

카이사르는 항복하라고 선장에게 말하려다가 손을 들며 대답을 잠시 유보했다. 뒤늦게 나타난 갤리선이 한 척에 불과하지만 매우 빠르고 날렵한 것이 지금껏 경험한 그 어떤 군선보다도 신속했기 때문이었다.

카이사르는 미간을 좁히고 잠시 고심하는 것 같더니 이내 곧 추상같은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짐을 바다에 버리고 배를 가볍게 하라! 그런 뒤 전투 준비를 갖춰라!”

“예?”

“내 이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항명하는 자에게는 내 이름을 거론해도 좋다.”

“율리우스? 설마? 로.. 로마의 그 유.. 율리아 가문?”

“무슨 말인지 못 들었나?”

“아? 예! 예! 알겠습니다. 그리 시행하겠습니다.”

“아울러 여자와 아이는 배 밑으로 보내고 최소한의 노잡이만 두고 전부 무기를 쥐고 선상으로 올라오라 명해라. 선내의 남자들은 빠짐없이 무기를 나눠줘라!”

“다.. 다만 배안에 저들 모두를 무장시킬 병장기는 없습니다.”

“먼 거리를 항해하면서 단검 하나 소지않은 자는 없을 테니 막대기에 묶어서 창이라도 만들게끔 해라! 없으면 없는대로, 죽기 싫으면 알아서 준비하라고 해라! 서둘러라! 다시 말하지만 짐은 모조리 버려라. 끝까지 반항하는 자는 본보기로 죽여라!”

“주.. 죽입니까?”

해적과 정체불명의 배를 주시하던 카이사르는 슬쩍 고개를 돌려 선장을 바라봤다. 카이사르의 눈빛을 마주한 선장은 급히 고개를 숙이며 그에게 대답했다.

“아.. 알겠습니다. 그리 시행하겠습니다.”

그런 뒤 카이사르는 손짓으로 자신의 노예를 불렀다.

“갑옷을 가져와라!”

그가 명을 내리기 전에 이미 짐 가운데 갑옷을 가져온 노예는 급히 다가와 카이사르가 로리카 하마타(로마식 체인메일)를 입는 것을 거들었다.

그렇게 로리카 하마타를 걸치던 카이사르는 정체불명의 배가 자신의 예상대로 해적선을 공격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 모습에 카이사르는 눈을 빛내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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