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
201. 승리할 수 없는 전투.
201.
로마의 가문, 즉 겐스(Gens)는 로마, 이탈리아, 혹은 에트루스칸(투스코스트 지역의 고대 이탈리아의 부유하고 강력한 문명) 혈족으로, 같은 이름을 공유하고 동일한 조상의 혈통을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다. 이러한 집단은 초기 로마 역사에서 중요한 사회적, 법적 지위를 지녔다.
역사에 기록된 로마의 가문(Gens)의 숫자는 무려 468곳의 가문에 달한다. 물론 귀족 가문과 평민 가문은 물론 제국 시대까지 포함한 가문의 숫자이기에 공화정 시대인 지금은 그보다 숫자가 적겠지만 어쨌든 그 모든 가문을 일일이 나열하는 건 지난한 일이고 불필요한 일이다.
겐스는 당연히 로마 공화국의 입법 의회의 투표 단위를 구성하는 로마 부족, 즉 트리부스(tribus)와 연관이 없지 않았다.
공화국 말기에 이를수록 부족 이름은 로마인의 대표 이름이 되었고 가장 공식적인 문서에 사용되었다.
또한 트리부스는 민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다. 민회는 크게 쿠리아 30개로 구성된 쿠리아회, 최소의 군대 단위인 켄투리아(centuria, 백인대) 193개로 이루어진 켄투리아회, 35개의 트리부스로 이뤄진 트리부스 민회, 그리고 BC 471년에 신분 투쟁을 벌였던 평민들이 쟁취한 플레브스 민회로 구성된다.
쿠리아 회가 가장 오래된 민회이나 현시점에서 쿠리아 회는 전통적인 가문의 모임일 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민회가 아니었다. 그러니 공화정 시대에 중요한 민회는 켄투리아 민회와 트리부스 민회라고 할 수 있었다.
평민회인 플레브스 민회야 평민들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해 대두된 단체이니 본래부터 로마의 대소사에 영향을 미치기 어려웠고 술라의 법 개정, 즉 트리뷴(Tribune 호민관)의 입법 권한을 무효화시킴으로 인해 그나마 있던 권한마저 송두리째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로마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민회는 집정관, 법무관, 중요한 재판, 전쟁 등 시정의 중요 사항이 토의되는 켄투리아 민회다. 다만 켄투리아 민회 역시 이론적으로는 무장 가능한 모든 이들을 대표하는 민회이나 실질적으로는 상위 켄투리아를 차지한 보수적 토지 귀족에 의해 지배될 뿐이다. 바로 저들 말이다.’
카피톨리누스 언덕은 종교건물 및 공공건물로 제한된 구역이다. 하나 낮은 언덕으로는 로마에서 가장 화려한 주택들이 언덕을 점거하고 있었다. 당금 로마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권세가 높은 이들이 모여있는 언덕이니 켄투리아 민회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귀족들 역시 저곳에서 호의호식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하고 많은 곳 중 왜 굳이 카피톨리누스 언덕이냐고 반문한다면 아마도 카피톨리누스 언덕이 다른 곳과 달리 종교적인 장소, 다시 말해 신들의 언덕이라 여겨지는 곳이라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신들의 언덕에 살며 신처럼 대접받고 싶은 것이리라.
당금 로마에서 뭔가를 이루고자 한다면 수부라지구의 거들떠 보지도 않는 하층민이 아니라 바로 저들과 친해져야 한다.
하나 누차 말했듯이 테세우스는 로마의 그토록 수많은 가문들 중에서도 이름이 드높은 메텔루스 가문과 척을 진 상황이다. 또한 테세우스가 제법 명성을 얻었다지만 메텔루스 가문의 위세에 어찌 비할 수 있으랴? 그래 봐야 전차경기고 그래 봐야 검투시합일 뿐이다. 그래 봐야 부족도, 가문도, 후원자도 없는 일개인에 불과했다. 저들이 누구 편을 들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세르토리우스의 후계자로 공인되었으니 그의 가문과 그가 속한 부족은 있지 않겠냐고? 일단 세르토리우스는 평민이다. 그러니 애초에 로마에서 내세울 가문이랄 것도 없었고 그마저도 술라의 지독한 견제 아래 모조리 사라졌다. 유명무실하긴 부족 역시 마찬가지, 심지어 부족은 가문처럼 어떤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도 아니었다. 더 말해 무엇하랴?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메텔루스 가문에 비견되는 권력자의 그늘아래 들어선다. 둘째 위협 자체를 제거한다. 그렇다고 메텔루스 가문을 제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너무 지난한 일이니 협상을 통해 메텔루스 가문과 원한관계를 해소하는 방법, 이렇게 두 가지 외에는 저들의 도움을 얻어낼 수 있는 방법이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테세우스는 눈매를 좁히며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모두 쓸데없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협상도 거래할 것이 있어야 가능하며 보호를 요청하는 것도 저들에게 제공할 것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미 풍족한 저들에게 무엇을 제공할 것이고 무엇으로 거래할 것인가? 설혹 있다손치더라도 너무 비효율적인 행동이다. 고생은 고생대로, 손해는 손해대로 입고 원한은 원한대로 남을 것이다.
‘상황이 절대적으로 내게 불리하다면 지금의 정국을 흔들어서 틈을 만드는 수밖에······.’
카피톨리누스 언덕이 아니라 팔라티누스 언덕을 향하는 일이 바로 그 일의 일환이었다.
다만 키케로에게는 자신만만하게 승리할 방책이 있는 것처럼 말했지만 테세우스라고 한들 하늘에서 조력자나 방책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승리할 방법을 찾는 일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될 공산이 컸다.
‘어쨌든 첫걸음은 뗐다.’
키케로의 합류가 그 첫 번째였다. 키케로의 명성은 지금부터 하려는 일의 가교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술라의 죽음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키케로가 로마로 돌아왔듯이 술라를 피신해 도망쳤던 로마의 인사들이 속속들이 로마로 복귀하는 일 또한 같은 맥락이었다.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의 인사들도 일찌감치 로마로 복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헤노바르부스 가문 역시 꾸준히 집정관을 비롯한 정무관을 배출해내던 로마의 명문가였다. 하나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술라와 마리우스의 내전 중 마리우스의 편을 들었고 결국 누미디아에서 폼페이우스에게 살해당한다. 히아르바스와 함께 살해당한 그 도미티우스 말이다.
BC 81년 술라가 로마 내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본보기로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을 압제하자 아헤노바르부스의 가문의 인사들은 술라의 마수를 피해 각지로 흩어졌다. 직접적으로 대항한 도미티우스는 폼페이우스를 통해 죽였지만 남은 이들은 내버려두었기에 이들은 지금껏 생존할 수 있었다.
하나 그들이 로마 내에서 가졌던 토지나 건물, 그 모든 것들이 술라 휘하의 사람들에게 넘어간지 오래였다. 지금껏 축재한 재물이 있었기에 빈털터리 신세는 면했지만 그들 마음에 울분이 왜 없겠는가? 또 이런 가문이 어디 한두 가문이겠는가? 술라의 손에 무너진 가문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테세우스가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을 떠올리는 것은 키케로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테세우스는 알지 못했지만 이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은 공화국 말기와 제국 초기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가문이었다. 간단히 훗날 세워질 로마 제국 황제의 가계와도 연관이 있는 가문이었다. 물론 이 사실은 키케로 역시 알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테세우스는 키케로가 가진 명성도 명성이지만 키케로라는 사람 그 자체가 필요했다.
테세우스가 말했듯 동기는 중요하지 않다. 동기가 무엇이었든 정의를 수호하는 선택을 했고 그에 따른 대가를 감내했다면 마찬가지로 그에 따른 과실 역시 뒤따르는 법이다. 키케로의 명성 그 자체는 힘이 없지만 그 일들을 통해 키케로가 얻은 인맥은 이 상황에서 테세우스가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더욱이 키케로는 민중파가 아니다. 말했듯이 귀족들이 주도하는 귀족정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당연히 그의 친구들 중에는 술라파에 속한 이들도 꽤 많았다.
어쨌든 아헤노바르부스 가문 외에도 술라에게 몰락한 저명한 가문들이 많지만 키케로가 굳이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을 언급한 이유는 저들이 로마에서 가진 땅과 권리를 가장 많이 갈취한 자들이 메텔루스 가문이자 크라수스였기 때문이다.
하나 몰락한 가문 하나가 현 로마를 주름잡고 있는 이들 앞에 무슨 힘을 쓸 수 있을까? 키케로 역시 회의적인 표정으로 그렇게 테세우스에게 반문했다.
실 하나는 쉽사리 끊어지는 법이나 타래로 엮인 실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저들을 하나로 모은다. 정확하게는 저들이 하나로 결집할 수 있는 구심점을 만든다. 그렇게 결집한 이들이 주장하는 내용이 정당한 명분을 토대로 이뤄지는 것이라면?
키케로가 로마에서 정의를 주장하는 일이 허망한 일이라고 했던가? 하나 그 어떤 나라도 대놓고 기본 가치를 무시할 수 없다. 나라가 나라로 성립할 수 없게 만들테니까. 로마라고 해서 뭐가 다를까?
다시 말해 저명했던 가문들이 모여 정당한 명분을 들고 나선다면 이것은 그 자체로 막강한 힘이 된다.
‘표면 아래에서 들끓고 있는 사실을 그저 표면 밖으로 드러나게만 만들면 된다. 그러면 그것을 이용할 자들이 알아서 내게 도움을 뻗을 것이다. 의리나 정의따위는 없다.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면 언제든 등을 돌리고 언제든 손을 잡을 자들이 바로 로마인이니까. 나는 그 점을 파고들어야 한다. 저들의 연합은 매우 공고한 것처럼 보이지만 파고들면 허술하기 짝이 없지. 무릇 이득으로 맺어진 관계란 그런 법이니까. 앞으로 데메트리우스의 재판따위에 신경쓸 여력이 있을지 모르겠군.’
테세우스는 눈을 빛내며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
‘재판에서 어떤 증거나 증인으로 정의가 이뤄지는 것은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누명을 썼다는 것을 짐작하지 못하는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저들은 나의 누명을 벗기는 일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나를 겁박하려고 들었다. 그러니 갈가리 찢어놓을 것이다. 분란과 반목을 저들 사이에 두고 저들 스스로 갈라지게 만들 것이다. 그 가운데 데메트리우스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반드시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생각에 잠긴 테세우스가 팔라티누스 언덕에 다다랐을 때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있었다.
“당신이 테세우스요? 아니 테세우스가 맞군.”
테세우스가 걸음을 멈추고 자신에게 말을 꺼낸 사람을 바라보자 그가 우아하게 손과 몸을 움직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부르불리우스라고 합니다. 친구들은 내가 연설할 때의 몸짓과 손짓을 보고 부르불리우스라는 별명을 붙였지요.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대단한 광경은 나도 보았습니다. 이렇듯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오.”
대경기장에서 자신을 본 이가 어디 한둘이겠는가? 때문에 테세우스는 가볍게 인사한 뒤 그를 스쳐지나가려고 했다. 지금은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의 사람을 만나는 것이 우선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뭔가 장황한 계획을 가지긴 했으나 아직은 추상적인 무언가에 불과했다. 실질적인 계획이라고는 키케로를 포섭한 일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그마저도 아직 확정적인 내용이 아니었다. 키케로 역시 일의 진척 상황을 보고 진퇴를 결정할 테니 말이다.
그러니 재판의 시일이 꽤 많이 남기는 했지만 와인 냄새를 풀풀 풍기는 사내와 시답잖은 대화나 나누고 있을 시점은 분명 아니었다.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있고 그 시간은 유한했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입니다. 인상 깊게 봤다니 감사하오나 지금은 바쁜 용무가 있으니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보도록 합시다.”
그러자 부르불리우스가 진한 와인냄새를 다시금 테세우스에게 뿜었다.
“바쁜 용무라면 혹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의 사람을 만나려고 하는 그 일 말이오?”
그 말에 테세우스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워워. 진정하시오. 나는 검투사가 아니고 검투사라고 해도 디오클레스 만큼 뛰어난 자도 아니니 당신과 싸울 생각은 추호도 없소.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인데 내가 어떻게 알았겠소?”
이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키케로 외에는 없었다. 키케로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주정뱅이에게 민감한 이야기를 꺼냈단 말인가? 메텔루스 가문 등이 알아차릴 확률은 미미하지만 어느 정도 구도가 잡히기도 전에 저들이 알게 되면 첫 단추를 끼우기도 전에 모두 무산되고 말 것이다.
‘내가 키케로 그 자를 잘못 봤단 말인가?’
테세우스는 마음속에서 자연히 일어나는 실망감과 짜증을 뒤로 하며 부르불리우스에게 말했다. 그러나 부르불리우스가 더 빨랐다.
“뭐 키케로의 친구입니다. 뜯어놓은 팔레르노 와인을 다 마시지도 못하고 당신을 만나러 온 참이니 나와 함께 포도주라도 한 잔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테세우스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질문을 던졌다.
“······. 그 말인즉 나를 기다렸다는 소리입니까?”
부르불리우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테세우스에게 대답했다.
“왜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하시겠소?”
불콰하게 취한 부르불리우스는 붉은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이 시점에서 알아 두면 좋은 설정(패스하셔도 됩니다.) -----
생각해보니 지금껏 센튜리온(백부장), 센튜리아(centuria, 백인대)라고 했는데 센튜리아와 켄투리아 둘 모두 사용하겠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백인대와 민회의 구분으로 그냥 두고 둘 모두 사용하겠습니다.
468곳의 가문... 후우. 이건 정말 예상 외의 숫자였습니다.. 게다가 하나 하나 나름 역사가 있으니.. 것도 참.
93편이나 공지에서 설명한 적이 있지만 민회에 대해 다시 짚고 가겠습니다.(같은 내용임)
2. 공화정 민회.
총 4개의 민회로 이뤄져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민회에 참석하려면 일단 시민권을 가진 시민이어야 합니다. 조금 복잡합니다. 민회의 구분은 4개지만 혼재된 형태입니다. 문화 자체가 이런 건지.. 어째 죄다 혼합형태인 것 같기도..;)
로마의 정치는 공화정 제도였으므로, 시민들은 대표자를 뽑지 않고 각 민회에 직접 투표를 했다. 그러나 시민 투표자들은 투표 외에 다른 권력은 없었다. 각 민회는 정무관이 주재했으며, 정무관이 절차과 적법성에 대한 모든 결정을 내렸다. 정무관의 권력은 민회에서 거의 절대적이었고 이 권력에 대한 견제는 다른 정무관의 거부권밖에 없었다. (평민들의 신분 투쟁 시 호민관의 존재가 나타난 이유!)
*쿠리아 민회. (씨족회의. 사실상 귀족회의)
- 왕정 시대부터 있던 가장 오래된 민회. 쿠리아는 로마의 사회단위–가족(Familia), 씨족(Gens), 쿠리아(Curia), 부족(Tribus)–중 특정 지역에 거주하는 씨족들의 모임으로 로마사 초기에 모두 합해서 30개의 쿠리아가 있었다. 그리고 로물루스 시대에 10개의 쿠리아가 각기 하나의 부족을 형성해서 로마는 3부족[티티에스(Tities), 람네스(Ramnes), 루케레스(Luceres)] 체제로 출범했다. 그 중에서 쿠리아는 로마 공동체의 공적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단위였다.
쿠리아 회는 쿠리아에 속해 있고, 무장 가능한 모든 성년남자들의 총회였으며 혈통귀족(Patricii)에 의해 지배. 하지만 공화정 시대에는 영향력이 미미하므로 패스.
*켄투리아 민회. (시민회의)
- 참가자격 시민. 주요기능은 각 켄투리아 단위로 투표를 해 집정관, 법무관, 중요한 재판, 전쟁 등 시정의 중요 사항이 토의되었다.
왕정시대 때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왕이 로마군을 구성하는 모든 시민을 재산에 따라 6개의 계급으로 나누고 또한 그 계급별로 세세하게 구분하여 총 193개의 ‘켄투리아’로 나눈 것에서 기원. 기원전 5세기 경 설립. 가장 중요한 민회
투표를 통해 고위 정무관을 선출했고 투표권은 각 켄투리아마다 한 표가 주어졌다. 단 193개(기병 equites 18C, 보병 Pedites 170C. 비무장병 5C로 조직) 중 98개가 귀족 등 부유층에 의해 또한 먼저 투표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난한 계급의 의견이 국민위원회에서 반영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다시 말해 이론적으로 켄투리아회는 무장 가능한 모든 계층의 시민을 대표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상위 켄투리아를 차지한 보수적 토지 귀족에 의해 지배되었다.
*트리부스 민회.(부족회의 내지 트리부스 인민회라고 부름)
- 로마 행정과 관련된 민회. 참가자격은 귀족 파트리키 계급과 평민 플레브스 계급 모두 참가가능. 주요기능은 트리부스 민회는 포룸 로마눔에서 열린 수석 조영관, 재무관, 트리뷴 밀리툼이라는 군단 사령관의 선거를 결정.
로마 공화정 시기에 시민은 4개의 로마 시내 부족과 31개의 시 외곽 부족으로 총 35 부족을 기반으로 이뤄짐. 본래 이 구분은 혈연과 지역에 따라 존재했으나 아버지의 부족에 아들이 속했기에 결국 수백 년 동안 뒤섞이게 되고 결국 이러한 구분은 무의미해짐.
각 부족은 별도로 분리된 투표를 실시, 각 부족마다 다수결에 의해 결정이 내려졌으며, 각 부족이 보유한 선거인 수와 관계없이 최종결정은 1표로 계산되었다.
마찬가지로 트리부스회 역시 켄투리아회와 마찬가지로 보통 시민은 억압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놓여있었다.
*플레브스 민회.(평민회의 내지 트리부스 평민회라고 부름. 구분을 보다 명확하게 하기 위해 본작에서는 플레브스 민회로 표기할 것임.)
- 기원전 471년에 신분 투쟁을 벌였던 평민들이 쟁취한 민회로 귀족들의 관직 독점과 자의적 재판에 반대하여 세운 민회로 평민위원회다. 참가 자격은 평민만 참가할 수 있고 켄투리아 민회보다 훨씬 민주적이었다. 호민관 2명 평민 조영관 2명을 선출하며 후에 호르텐시우스 법에 의해 법안 의결권도 부여되었다.
이러던 것이 귀족층에 참가한 평민들이 노빌레스(새로운 지배계급)을 형성하고 그들도 플레브스 민회에 참가함으로 회의의 성격이 변질된다.(호르텐시우스 법이 대두되게 된 이유 중 하나.)
트리부스 민회(인민회)와 혼동되어 쓰이는 경우가 있기는 하나 엄연히 다르며 플레브스 민회는 오직 트리뷴, 호민관만 소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