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
198. 일득일실(一得一失).
198.
아침이 밝아오는 새벽이 돼서야 수부라 지구의 숙소로 돌아온 테세우스를 사비누스가 격앙된 표정으로 맞이하며 말했다.
“로마에 테세우스 님의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습니다. 이는 매우 고무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라수스의 연회는 화려하기로 그 명성이 높은데 어떻게 괜찮으셨습니까?”
단순히 연회의 화려함 따위를 묻는 질문이 아니었다. 크라수스 연회가 로마에서 제일이라는 것과 그 연회의 화려함을 모르는 로마시민도 있던가? 이는 연회장에서 로마 귀족들과 인사를 트고 쓸만한 인맥을 구축했냐는 소리였다.
테세우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쩌면 일이 어려워질지도 모르겠어.”
그러자 그 말을 듣고 있던 호라티우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테세우스에게 반문했다.
“사비누스 님의 말대로 로마의 모든 사람이 테세우스 님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이 어려워지다니요?”
명성이 높아졌는데 오히려 일이 어려워지다니 호라티우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발언이었다. 사비누스 역시 의구심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호라티우스의 말대로 테세우스 님의 입지는 경기전과 천양지차입니다. 한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설마 연회 중 귀족들과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있으셨던 겁니까?”
테세우스는 지닌바 무용에 어울리지 않게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걱정하지도 않았는데 설마하니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로마 상류층의 귀족들과 트러블이 있었다면 이는 확실히 우려할만한 문제였다.
“불미스러운 일이라······. 그런 일은 없었다. 하나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겠지.”
“하아. 답답합니다. 무슨 일인지 속 시원하게 말씀 좀 해주십시오.”
호라티우스가 복장이 터진다는 듯 가슴을 치며 말하자 사비누스 또한 테세우스의 대답을 재촉했다.
“저 역시 하신 말씀의 진의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크라수스가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크.. 크라수스가 말입니까?”
크라수스는 테세우스를 후원하던 장본인이 아닌가? 더욱이 테세우스는 키르쿠스 막시무스 경기를 통해 크라수스에게 상당한 이득을 가져다준 사람이다. 오히려 이 일 후로 테세우스를 더 가까이하면 가까이할 일이지 어째서 테세우스를 멀리한단 말인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테세우스는 고개를 주억이며 연회장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사비누스에게 말했듯이 연회장에서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다. 사실 불미스러운 일도 어떤 관계가 형성되어야 가능한 일 아닌가? 크라수스의 축객령 아닌 축객령이 떨어진 후 귀족들은 자신과 간단한 인사만 나눌 뿐, 일정거리 이상 다가서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드넓은 연회장을 홀로 기웃거리다가 온 셈이었다. 물론 여인들의 끈적거리는 뜨거운 시선과 젊은 사내들의 도전적이고 시기 어린 눈빛을 한 몸에 받기도 했지만 그 또한 그뿐에 불과했다.
자신을 향한 호의나 호기심이 없는 것은 아니나 권세 있는 자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모를 테세우스가 아니었다.
“연회에 참석한 것이 아니라 연회장을 구경하고 온 셈이라고 해야 하나?”
“으흠.”
테세우스의 말에 연회장에서 테세우스의 처지가 연상된 사비누스가 침음을 흘렸다.
“당연히 크라수스가 나를 환대했다면 그 광경은 달라졌겠지. 나를 가장 환대해야 할 사람이 나와 거리를 두었다면 그건 적의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자 호라티우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크라수스가 테세우스 님께 적의를 품었다는 말입니까? 어째서?”
“그걸 왜 내게 묻나? 또 그 이유를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테세우스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하자 사비누스가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적의까지는 아니더라도 경계심을 품은 건 확실해 보이는 군요.”
그러자 테세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내가 만나본 크라수스는 영리한 사내였다. 적의를 품었어도 대놓고 드러낼 사람이 아니지.”
사비누스는 그제야 테세우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데메트리우스나 메텔루스 가문에 힘을 실어주겠군요. 폼페이우스를 견제하기 위해 테세우스 님께 힘을 실어주었듯이.”
“그럴 공산이 크다.”
“일이 이리되면······.”
명성과 인지도를 얻은 이상 승소는 따 놓은 당상이라고 여겼는데 일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 패소할 확률이 매우 짙어진다. 데메트리우스와 테세우스 사이에 얽힌 사연을 들은 이들은 테세우스가 누명을 썼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할 것이다. 데메트리우스를 알고 있는 자들일수록 확신에 가까운 추측을 내렸을 것이다.
하나 재판은 어떤 사람들의 추측을 근거로 이뤄지는 문제가 아니다. 명확한 증거와 증인을 바탕으로 배심원들과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여야 했다. 이조차도 권력이 개입되면 조금 말이 달라진다.
뒤를 봐주는 권력자의 세가 비등한 상황에서 이뤄지는 재판이라면 비교적 공정한 재판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으나 이렇듯 권력의 추가 한쪽으로 쏠린 상황이라면 재판 결과는 이미 내려진 것이나 다름없다. 데메트리우스의 승소로 말이다.
데메트리우스 측은 배심원들과 재판관의 마음은 금력과 권력으로 얻을 것이 분명한데 테세우스는 저들에게 대항할 무기가 전혀 없다.
“명확한 증거나 증인도 없는 사건이니 이대로라면 패소할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러나 아무리 권력의 추가 한쪽으로 쏠려 있어도 법정에서의 주인은 정의다. 명백한 증거와 증인을 바탕으로 정의를 요구한다면 그것을 결단코 무시할 수 없다. 정상참작 등을 수단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기야 하겠지만 거짓을 진실로 만드는 일은 할 수 없다는 소리다.
혹 이것마저 무시된다면 그곳을 어찌 법정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누구도 법정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테니 재판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로마의 법정이 타락하기는 했으나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문제는 데메트리우스와의 사건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없다는 점이었다. 있다면 증인 정도가 되겠지만 증인들이 누구의 편을 들어줄지는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크라수스가 이번 재판때까지 만이라도 나를 지지했다면 비교적 공정한 재판을 벌일 수 있었겠지만 연회 중 그가 나에 대한 지지를 거둔 것을 세인들에게 명확하게 보여준 이상, 상당히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자 호라티우스가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항변하듯 말했다.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로마시민들은 테세우스 님에게 깊은 호감을 보이고 있습니다!”
“거품을 본 적이 있나? 제 몸집을 한껏 부풀린 그것은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명성과 사람들의 호의란 결국 그 정도에 불과하다. 몸집을 부풀리고 있을 땐 쓸모가 아예 없지는 않겠지. 하지만 바람이 불고 햇살이 내리쬐면 금세 사그라질 것들에 불과하다. 아닌 말로 저들이 나를 위해 메텔루스 가문과 싸우겠는가? 아니면 크라수스의 뜻을 거스르려 들겠는가? 이런 것들은 승리 후에 뒤따라오는 그림자에 불과할 뿐, 승리에 이르도록 만들어주지 않는다. 대경기장에서도 어디 저들이 내게 환호를 보냈기 때문에 승리를 거둔 것이겠는가? 저들은 내가 승리했기에 환호했을 뿐이고 패배할 것이 명확해진다면 그땐 바로 돌아서서 비난을 퍼붓겠지. 그러니 호라티우스. 명심해라! 눈앞의 달콤함과 화려함에 현혹되어서는 곤란하다. 대중의 인기는 상당히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나 그렇다고 그걸 기반으로 삼을 수 없는 노릇이야.”
“흠.”
침음을 흘리며 인상을 찌푸리던 호라티우스는 사나운 어조로 테세우스에게 다시 말했다.
“그럼 차라리 놈을 죽이지요. 그럼 재판도 없는 것 아닙니까? 이럴 게 아니라 당장 지시하겠습니다. 테세우스 님을 위해서라면 놈의 목숨을 거둘 병사들이!”
그러나 그 말에 대답한 것은 테세우스가 아니라 사비누스였다. 사비누스는 호라티우스의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놈을 죽인다면 패소할 일도 없겠지만 지금 상황에선 재판을 치르고 안 치르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순히 데메트리우스와의 문제가 끝이 아니라는 소리야. 데메트리우스를 죽인다면 당장 메테루스 가문 측에서 테세우스 님을 살인죄로 기소하게 될 것이다. 저들은 그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을 테니 오히려 우리 측에서 재판 전까지 데메트리우스가 죽지 않기를 보호해야 할지도 모른다.”
호라티우스는 황당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원수 놈을 보호한다니! 무슨 말이 그렇습니까?”
“실제로 그렇게 하겠다는 소리가 아니라 지금 테세우스 님이 처한 상황이 그렇다는 소리다. 그러니 테세우스 님을 위한답시고 함부로 움직일 생각은 마라!”
“그럼 어쩌겠다는 소리입니까? 이대로라면 재판에 패소할 것이 뻔한데? 100 아우레우스(금화) 사건이 누명이 아니라 정말로 훔친 일이 되어버리면 그 일로 인해 테세우스 님의 시민권과 신분 문제마저 취소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황당한 일이겠지만 저들이 악의를 품는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럴 바엔 살인죄를 뒤집어쓰는 게 낫습니다. 이럴 게 아니라 제 손으로 직접!”
“얼토당토않은 소리마라! 지금껏 테세우스 휘하에 있던 네가 데메트리우스를 죽이면 테세우스 님께서 직접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정녕 몰라서 하는 소리냐?”
“하오나!”
호라티우스가 다시 말을 하려고 했으나 어깨를 붙잡는 테세우스의 손길에 입을 다물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울분이 가득한 눈빛이었지만 당연히 그 울분은 테세우스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고맙다. 그러나 병사들이라니······. 내 말을 잊은 것이냐? 나는 레가투스가 아니고 저들 또한 더 이상 레기온이 아니다. 로마의 시민으로서의 삶을 영위해주게는 못할망정 살인죄를 뒤집어 쓰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당연히 호라티우스 너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자 호라티우스가 격정적인 얼굴로 말했다.
“테세우스 님!”
“진정해라. 이러다가는 로마를 전복시키자는 말이 또 나올 판이로군.”
그러자 사비누스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테세우스의 말을 받았다.
“필요하다면 해야지요. 테세우스 님도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거품이 사그라지기 전까지는 그래도 쓸만할 것이라고.”
그 말을 들은 호라티우스는 사비누스를 바라본 뒤 표정을 단호하게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비누스와 호라티우스의 모습을 한번씩 번갈아가며 바라보던 테세우스는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대체 무슨 영화가 있다고 나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려고 하는 것인가?”
“언제든 말씀만 하십시오.”
저들의 단호한 모습에 다시 작게 헛웃음을 터트린 테세우스가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사비누스, 자네 말대로 필요하다면 그렇게라도 해야겠지. 필요하다면 말이야.”
그 말에 사비누스가 굳은 표정을 살짝 풀며 테세우스에게 반문했다.
“그 말씀은?”
“그래. 불필요한 일이야. 게다가 일이 어렵거나 패소할 확률이 높다고 했지 패소한다고 말한 적은 없다. 방법을 찾아야지. 아닌 말로 데메트리우스 그 자를 그런 식으로 죽일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내가 나서면 될 일이다. 왜 내가 그를 못 죽일 것 같아서 내버려 두는 것 같은가?”
그럴 리가? 로마의 누구보다도 테세우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테세우스가 마음만 먹으면 데메트리우스가 아니라 로마의 콘술도 암살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호라티우스가 불퉁한 어조로 테세우스에게 대답했다.
“그런 것이 아니란 것쯤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잘 알고 있지. 그래서 하는 소리다. 언제는 상황이 어렵지 않았던가? 나는 재판에 승소할 것이다. 놈이 가장 원하고 가장 자랑스러워 하는 모든 걸 사라지게 만들 것이다. 패소한다면 글쎄. 거짓을 진실로 인정하는 법정을 부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호라티우스는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법정을 부순다는 이야기가 어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비누스!”
“예. 테세우스 님.”
“사람이 필요하다.”
힘을 쓰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말을 듣는 즉시 알았다.
“변호사가 필요하신 겁니까?”
“정의에 호소할 수 있는 유능한 변호사가 필요해. 연회장에서 얼핏 수소문해보니 적당한 인물이 하나 있더군. 술라 생전에 겁 없이 그에게 도전했고 심지어 승소했던 변호사가 말이야. 놀랍지 않나?”
연회장이나 구경하고 왔다고 했지만 테세우스가 그런 식으로 황금같은 기회를 마냥 보낼 사람이 아니었다. 거기서 테세우스는 한 로마인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음? 그런 자가 있었습니까? 그게 대체 누굽니까?”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키케로라고 하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