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
194. 고래 싸움에.
194.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은 근육과 2m가 넘는 테세우스가 왜소해 보일 정도의 체구나 신장 모두 그야말로 경악스러울 지경이었다. 거인족의 후예라고 여겨진다고 했던가? 거인족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그렇게 보일 정도였다.
디오클레스는 다시 한 차례 크게 울부짖으며 자신의 존재감을 모두에게 되새겼다.
“으아아아아아!”
그리곤 살육의 중심지에 서 있던 테세우스를 살벌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테세우스와 싸우던 검투사들이나 디오클레스 앞에 있던 검투사들은 슬금슬금 연신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테세우스와 다시 싸우게 되는 건 디오클레스와의 싸움이 끝난 후에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두 괴물들에게 의해 이리 찢기고 저리 찢겨서 지리멸렬하고 말 테니까. 적어도 한 괴물이 다른 괴물을 죽일 때까지는 숨죽이고 있는 것이 상책이었다.
디오클레스도 테세우스도 다른 검투사들의 동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테세우스는 제 몸집만큼이나 거대한 검을 질질 끌며 나오는 디오클레스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시했다.
체구가 체구이니만큼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괴력을 방불케 할 것이 분명했다. 아직 겨뤄보지 않았지만 어쩌면 테세우스 자신보다 힘이 강력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퉁 투퉁!
테세우스는 부러진 창대를 바닥에 버리고 글라디우스를 한 자루 더 집어 들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근육량이 엄청나 보였다. 창대가 나무로 이뤄진 창은 일회성 무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공격에 성공하더라도 오밀조밀하게 들어선 근육이 무기를 잡아챌 테니 놈을 상대하기엔 적합한 무기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놈이 가진 커다란 검과 마주하게 되면 테세우스의 힘이나 의사와 관계없이 여지없이 부러져나갈 테니 말이다.
글라디우스도 놈을 상대하기에 적합한 무기는 아니었지만 대경기장의 대지 위에 널브러진 무기들 가운데는 그나마 쓸만했다. 적어도 거대한 검을 마주한다고 해서 수수깡처럼 부러져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스쿠툼? 놈의 힘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나 스쿠툼 하나 부수지 못할 놈으로는 보이지 않았으니 불필요한 방어수단이었다.
테세우스는 양손에 쥔 글라디우스를 가볍게 붕붕 돌리며 천천히 놈에게 걸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본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로마시민들은 마른침을 삼키고 곧 이뤄질 혈투를 기대했다. 검투 경기에 관심 있는 로마시민치고 디오클레스라는 전설적인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시민은 없었다.
그리고 오늘 또 하나의 전설이 탄생했다. 200명의 검투사를 상대로 그 절반을 홀로 썰어 버린 테세우스라는 전설 말이다.
과거의 전설과 오늘 탄생한 전설이 맞붙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 어찌 흥분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전과 달리 그 기대는 함성으로 터져 나오지 않았다. 함성을 터트리지도 못할 정도로 긴장하며 두 사람의 대결에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크르르르.”
디오클레스는 맹수처럼 그르렁거리며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아직 거리가 상당히 멀리 떨어져있음에도 그 흉포한 기세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테세우스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며 디오클레스에게 말했다.
“혈향이 매우 짙군. 내가 할 소리는 아니겠지만 너를 죽여야 이 광대놀음도 끝을 맺을 모양이다.”
디오클레스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안 하는 것인지 테세우스의 말에 다시 울부짖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디오클레스의 두 눈은 이미 광기와 살기로 가득했으니 놈의 사정이야 어떻든 대화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우워워워워워!”
그리곤 거대한 두 다리로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대지를 강하게 박차고 테세우스에게 달려왔다. 몸집이 거대하여 느릴 것이라 생각하기 쉬웠지만 결단코 그렇지 않았다. 디오클레스의 움직임은 가히 맹수의 움직임을 방불케 했다.
쿵 쿵 쿵 쿵!
육중한 체중이 피로 물들은 대지를 울릴 때마다 관중들의 심장 역시 강하게 요동쳤다. 목숨을 걸고 임하는 전투가 쉬운 전투가 어디있겠느냐만은 단연 오늘의 전투 중 가장 큰 난관에 봉착한 셈이었다. 그럼에도 테세우스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폭풍같은 기세로 짓쳐 드는 디오클레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디오클레스는 예의 자신의 거대한 검을 달려오던 기세에 힘입어 강하게 테세우스를 향해 강하게 휘둘렀다.
횡으로 휘둘러오는 그의 검 끝에 운 나쁘게 걸린 검투사들은 그대로 양단되어 죽임을 당했다. 검 끝에 걸렸을 뿐인데 저들이 입고 있는 갑주와 육체가 갈려나가며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대지를 다시금 붉게 물들였다. 그럼에도 검이 날아오는 속도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때까지도 테세우스는 몸을 피하지 않았다.
관중들은 그 모습을 바라보고 많이 기대했던 것과 달리 싱거운 대결이라고 생각했다. 저 거대한 검을 글라디우스로 어찌 막는단 말인가? 설혹 막는다고 해도 체급 차이가 너무 월등했다. 테세우스의 체구도 작은 체구가 아니란 것을 알지만 디오클레스는 거인족의 후예가 현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모두의 예상이 빗나갔다.
까아앙!
테세우스는 글리디우스 두 자루를 X자로 엇갈리게 교차하여 놈의 대검을 막아냈다. 그러면서도 단 한발짝도 뒤로 밀려나지 않았다. 대검의 실린 엄청난 힘과 무게를 완벽하게 감당했다는 소리였다.
‘예상했던 정도의 힘이로군.’
테세우스 역시 자신의 힘이 거대한 체구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런 부분도 없잖아 있었다. 하나 육체의 한계를 벗어난 힘이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음을 최근에 깨달았다. 이 힘을 모두 끌어내어 사용하게 되면 강대한 자신의 육체조차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될 수 있음을 말이다.
그러니 어찌 이 힘이 단순히 거대한 체구에서 비롯된 힘이겠는가? 따라서 테세우스는 최근 자신이 깨달은 이 힘의 정체를 선천력이라고 명명했다.
태어나서 육체등을 단련하며 얻게되는 힘을 후천력이라고 한다면 위기의 순간 평범한 엄마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동차를 들거나 마찬가지 평범한 사람이 목숨의 위협 앞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기묘한 힘을 선천력이라 명명한다면 바로 그 선천력이 테세우스 자신에게는 남들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 것이 아닐까 라고 가정했다.
‘다만 선천력만 강력했다면 육체가 붕괴되어도 벌써 붕괴되었겠지. 엄밀히 말해 육체의 한계를 넘는 힘을 계속 사용했으니 말이야.’
토페트사건만 봐도 그렇다. 10살 남짓한 소년의 육체로 도적떼라고는 하나 기백에 달하는 성인남자를 상대해 승리한다? 일반적으로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지 않은가?
‘적을 죽이면 육체가 재생되는 기이한 능력이 이 선천력을 사용하고도 육체가 붕괴되지 않게 막아줬고 육체의 성장에 따라 더욱 많이 가용할 수 있게 변했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은밀하게.’
그래서 그 전까지는 몰랐다. 단순히 육체가 남들에 비해 탁월하구나 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물론 육체 자체도 탁월하다. 선천력이 육체의 성장은 물론 모든 부분에서 전천후로 영향을 미친 것이 틀림이 없다.
그러나 육체가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고 생각한 시점에서도 육체의 힘을 넘어서는 힘을 사용할 수 있음을 깨달았고 이 사실에 기이함을 느낀 테세우스는 이것이 단순히 육체의 강력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과거의 수많은 경험 또한 그 미묘함을 눈치챌 수 있게 만들었지만 이는 테세우스가 그동안 그만큼 고련하며 육체를 단련했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알았다. 자신이 가진 힘은 결코 정상적인 힘이 아니라는 것을, 단순히 육체의 강력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따라서 테세우스는 디오클레스를 보는 순간, 놈이 가진 육체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차렸다. 확실히 육체의 힘 자체는 자신과 비슷하거나 강력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자신의 힘보다 강하느냐? 그건 결코 아니었다.
바로 그랬기에 테세우스는 놈의 힘을 보다 확실하게 느껴보기 위해 피하지 않고 놈의 대검을 마주했다. 쓸데없이 위험을 무릅쓴 것이 아니라 모두 계산된 행동이었다는 소리다.
글라디우스 두 자루를 X자로 교차해서 막은 것? 그것 역시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무기가 파괴될 것을 우려하여 그리 행동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테세우스의 우려대로 대검과 직접 부딪친 글라디우스 한 자루의 검면에 미세하게나마 실금이 가 있었다.
테세우스는 실금이 간 글라디우스를 디오클레스의 얼굴을 향해 집어던졌다. 검의 중심추는 중앙에 있지 않기에 던지게 되면 똑바로 날아가기 보다 원을 그리며 날아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테세우스가 집어던진 검은 화살을 쏜 것처럼 디오클레스의 얼굴을 향해 일직선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테세우스의 힘을 짐작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증거였다.
쐐에에에엑!
디오클레스는 자신의 눈을 향해 날아오는 글라디우스를 발견하고 고개를 옆으로 젖혀서 그것을 피해냈다. 테세우스가 던진 검은 디오클레스를 지나서 저 멀리 피신한 한 검투사의 목젖에 파고들었다.
“커헉!”
그가 뱉은 짧은 단말마 소리에 디오클레스가 그를 힐끗 바라보곤 더욱 성난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노려봤다. 눈앞의 테세우스가 자신을 시험하고 있음을 디오클레스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디오클레스는 다시 검을 휘두르기 위해 다시 검을 뒤로 뺐다. 그러나 그 순간을 놓칠 테세우스가 아니었다. 테세우스는 디오클레스가 고개를 돌린 사이 바닥에 숱하게 떨어져 있는 또 다른 글라디우스를 집어들었고 그가 검을 뒤로 빼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디오클레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디오클레스도 전력을 다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검자루를 양손으로 잡고 있던 디오클레스는 한 손을 빼서 주먹을 쥐고 달려오는 테세우스를 향해 강하게 휘둘렀다. 오른팔은 여전히 검을 뒤로 빼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커다란 대검을 마치 나뭇가지 휘두르듯 휘두르고 있는 디오클레스였다.
‘힘 측정은 끝났다.’
불의의 공격이라 할 수 있었지만 테세우스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놈의 주먹을 향해 들고 있던 한 자루의 글라디우스를 내질렀다. 정확하게는 측면 사선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디오클레스의 체구와 힘이 대단하다지만 놈 역시 피륙으로 이뤄진 인간이었다. 놈의 얼굴이나 몸 여기저기에 새겨진 상처가 그것을 증명했다. 이대로라면 테세우스의 날카로운 글라디우스가 디오클레스의 주먹을 갈라버릴 것이 분명했다.
이에 디오클레스는 분노한 표정을 지으며 왼손 주먹을 풀고 손바닥으로 테세우스를 후려치려고 들었다.
테세우스는 손안에서 글라디우스를 휙 돌려 역수로 잡은 다음 디오클레스의 손바닥을 예리한 검날로 베어냈다.
“크으흐흥!”
디오클레스는 고통에 섞인 신음을 뱉었으나 그 고통에 물러서거나 행동이 조금도 경직되지 않았다. 디오클레스는 왼손을 급히 옆으로 빼면서 오른손으로 휘두르는 대검에 손을 보탰다.
후우우웅!
고통에 조금이라도 멈칫할 줄 알았던 테세우스는 눈매를 좁히며 급히 뒤로 몸을 빼면서 왼손의 글라디우스를 놈의 대검이 그리는 궤적 끝에 가져다 댔다.
카아앙!
이 모든 건 찰나의 순간이었기에 눈 깜짝할 사이에 대검과 글라디우스가 부딪쳤고 공중에 몸을 띄우고 있던 테세우스는 그 여파로 뒤로 밀려났다.
‘얕다?’
그러나 그 순간, 테세우스는 섬뜩함을 느꼈다. 공격이 예상했던 것보다 얕았기 때문이다. 공격이 얕다는 소리는 다시 말해 다른 일격을 가할 힘을 비축했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디오클레스는 테세우스의 글라디우스와 부딪친 반동을 이용해 검의 방향을 위로 뒤튼 다음 테세우스를 반으로 쪼개 버릴 것처럼 내려쳤다. 실로 무서운 전투감각이었다. 테세우스는 순간적으로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후우우우웅!
테세우스는 역동작에 걸린 상황이었기에 그라고 해도 매우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