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193화 (193/298)

# 193

193. 고래 싸움에.

193. 고래 싸움에.

팔 보호대와 각반을 차고 물고기를 본뜬 투구를 쓴 무르밀로의 두꺼운 팔이 테세우스의 눈에 들어왔다. 그가 들고 있는 글라디우스는 당장에라도 허벅지를 뚫고 지나갈 것처럼 예리하게 쇄도했다.

타악!

그러나 테세우스는 검을 피하거나 몸을 움츠리지 않고 슬라이딩하여 미끄러지던 방향 그대로 계속해서 미끄러졌다. 글라디우스의 검첨이 한 치 앞에 다다랐을 때 테세우스는 손을 뻗어 글라디우스의 검면을 강하게 후려쳤다.

테세우스의 허벅지를 향해 검을 내리찍던 무르밀로는 당연히 검자루를 부러뜨릴 것처럼 강하게 쥐고 있었는데 테세우스가 순간적으로 검면에 가한 힘에 의해 손목이 바깥쪽으로 완전히 뒤틀려버렸다.

검투사가 강한 힘으로 내리찍고 있었기에 방향을 뒤틀기도 어려웠을 텐데 테세우스의 놀라운 힘은 언제나 그렇듯 예외를 만들어냈다. 이에 아래를 향하고 있던 검첨은 무르밀로의 목젖을 향했고 계속해서 미끄러지던 테세우스는 다시 손바닥으로 검자루 밑을 쳐올리며 오른발로는 무르밀로의 무릎 위를 후려쳤다.

콰직! 푸욱!

“커걱!”

무릎이 역으로 꺾인 무르밀로는 균형을 잃고 풀썩 옆으로 쓰러졌다. 기이하게 손목이 돌아간 채로 쥐고 있던 자신의 글라디우스가 깊게 박혀있었다.

차라리 땅에 스쿠툼을 박아넣고 온 체중을 실어서 테세우스의 슬라이딩을 막았어야 했다. 물론 그랬다면 테세우스가 두 발로 스쿠툼을 걷어찼겠지만 적어도 죽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하나 테세우스에게 검을 내리찍던 무르밀로는 이미 죽었다. 지나간 일을 거론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왼쪽 옆으로 쓰러진 무르밀로의 시체는 옆에서 테세우스를 경계하던 검투사의 운신을 부자연스럽게 만들었다. 바로 옆에서 싸우던 사람이 죽임을 당했는데 긴장하지 않을 자가 어디 있을까? 노련한 검투사라고 해도 그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전투를 치르지 못할 정도로 겁을 집어먹거나 몸이 굳어 전투에 지장을 줄 정도의 영향을 받는 건 아니었지만 주의력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시체가 시야를 가림과 동시에 잠시지만 운신하기 어렵게 만들었으니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왼쪽에 있던 검투사는 스쿠툼을 옆으로 크게 휘두르며 시체를 떨쳐내려고 했다.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으면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기에 당연한 태도였다. 하나 이 역시 테세우스의 계산 안에 있었다.

슬라이딩하던 테세우스는 검을 내리찍던 검투사를 처리하자마자 미끄러진 모습 그대로 자연스럽게 일어섰다.

착!

그러자 오른쪽에 있던 닭벼슬 모양 장식이 달린 투구를 쓰고 있던 삼니테가 기다렸다는 듯 테세우스를 향해 글라디우스를 찔러왔다. 스쿠툼을 앞에 세우고 테세우스의 빈틈을 정확하게 노려서 검을 찔렀기에 미처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나 테세우스는 너무나 간단하게 몸을 뒤틀면서 내찌르던 삼니테의 검을 피해냈다. 그리곤 공격이 실패해 멈칫하는 삼니테의 팔을 잡아다가 몸을 뒤틀며 자신의 뒤편으로 밀어버렸다. 그렇게 밀어버린 검은 방패를 크게 휘두르느라 완전히 비어버린 또 다른 무르밀로의 목젖에 틀어박혔다.

부지불식간에 공격당한 무르밀로는 원망의 눈초리로 삼니테를 바라봤고 삼니테는 매우 당황한 표정으로 그와 시선을 나눴다. 하나 그런다고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이익!”

이내 곧 시신에서 검을 뽑아낸 삼니테는 분노한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공격하려고 들었으나 이번 역시 테세우스가 더 빨랐다. 삼니테가 무르밀로를 죽이자마자 테세우스는 그 손에 들린 스쿠툼와 글라디우스를 챙겼고 그렇게 챙긴 글라디우스로 삼니테의 목을 그어버렸다.

촤아아아악!

붉은 핏물이 검이 지나간 궤적을 뚫고 터져나왔다. 테세우스는 고개를 슬쩍 돌렸다. 피가 눈에 들어오면 번거로운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삼니테는 양팔을 허공을 허우적거리다가 역시나 차디찬 바닥에 쓰려져 죽음을 맞이했다. 거의 동시에 3명의 검투사의 목숨을 빼앗았지만 전투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었다.

후우웅

“죽어라!!”

아니나 다를까 뒤편에 자리하고 있던 레티아리들이 들고 있던 삼지창과 창으로 테세우스를 공격했다. 세크토르 역시 뭐 좋은 것이 있다고 질세라 테세우스에게 달려들었다.

테세우스가 검투사를 죽이는 사이 그의 뒤를 점거했기에 전후좌우에서 무기가 날아드는 상황이었다. 스쿠툼이 있기는 하나 어느 한쪽을 방어한다면 다른 삼면에서 무기가 날아들어 여지없이 테세우스의 육체를 유린할 것이다.

이에 테세우스는 스쿠툼을 들고 놈들의 안쪽을 향해 거침없이 달렸다.

“으랏챠!”

콰직! 콰직!

삼지창과 창이 스쿠툼에 틀어박혔으나 테세우스의 진격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창을 찔러넣은 레티아리들이 뒤를 크게 밀려나거나 창대가 휘어졌다가 부러질 뿐이었다.

콰직 콰지직!

그러는 사이에도 스쿠툼에는 창과 삼지창이 계속해서 박혔다. 테세우스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뒤에서 자신을 쫓아 달려오는 세크토르를 향해 스쿠툼을 집어던졌다.

훙훙훙훙훙!

부러진 무기들이 박혀있던 스쿠툼은 불규칙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더니 이윽고 한 세크토르의 상체에 틀어박혔다.

푸우우욱!

방패에 틀어박힌 부러진 무기들이 여지없이 그의 살점을 파고들어 세크토르의 목숨을 끊어버렸다. 테세우스는 그런 광경은 보지도 않고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며 글라디우스를 휘둘렀다.

“크아아악!”

“으아아아악 내 팔!”

그를 향해 무기를 내지르던 검투사들의 팔이 허공에 아무렇게나 튀어올랐다. 팔 보호구, 마니카를 착용했지만 그의 괴력 앞에는 무용지물이었다. 그가 휘두르는 대로 사방으로 핏물을 토해낼 뿐이었다.

테세우스는 그렇게 허공으로 튀어오른 삼지창 중 하나를 남은 손으로 잡아채고는 길게 휘둘렀다.

부우우웅

“크아아아악!”

“허어어억!”

삼지창의 날카로운 창 끝에 걸린 검투사들은 예의 피를 흩뿌리며 죽임을 당했고 창대에 얻어맞은 자들 또한 부상을 면치 못했다. 하나 개중에는 스쿠툼으로 테세우스가 휘두른 삼지창을 막는 자들도 있었다.

투우우웅!

‘보아디케아가 아닌 것이 아쉽군.’

보아디케아였다면 스쿠툼이고 뭐고 간에 모조리 갈라버렸을 것이다. 하나 지금의 무기론 불가능하다. 하려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그 전에 삼지창이 부러질 공산이 더 컸다. 쇠로 이루어진 글라디우스라면 가능하겠지만 검신도 짧아 보아디케아처럼 사용할 수 없는 무기였고 내구성이나 무게 역시 비교할 계제가 아니었다.

‘하나 베면 베는 대로 튕겨나오면 튕겨나오는 대로 죽이면 될 뿐!’

테세우스는 사나운 눈빛으로 삼지창을 회수하며 글라디우스로 주변에 다가온 검투사들을 베어냈다.

촤아아아악!

다시 핏물이 튀고 비명이 울려 퍼졌다.

*

키르쿠스 막시무스에 있던 관중들은 소리를 지르는 것도 잃고 테세우스가 벌이는 살육을 멍하니 바라봤다. 검투사들이 어떤 존재던가? 제 아무리 잘나가는 검투사도 풋내기들이 아니라 비슷한 실력을 지닌 검투사라면 열명도 채 상대하지 못하는 법이다.

테세우스 앞에 선 검투사들은 자신들이 보기에도 노련한 검투사들이었고 그 수가 200명은 족히 넘어 보였다. 그런데 테세우스는 저들을 마치 파리 때려잡듯이 너무나 수월하게 쳐 죽이고 있었다. 그 엄청난 모습에 로마시민들은 어떻게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헤.. 헤르쿨레스!”

“마.. 마르스! 마르스다!”

이내 곧 테세우스를 헤르쿨레스의 재래라고 하는 자들도 있었고 마르스나 마르스의 아들로 여기는 자들이 여기저기서 생겨났다. 자신들의 상식을 전혀 벗어난 광경에 이들은 신화의 인물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화의 인물 정도는 되어야 지금의 믿기지 않는 광경과 어느 정도 아귀가 맞을 테니 말이다.

데메트리우스도 눈이 있고 귀가 있다. 경기장의 모든 이들이 테세우스의 신위에 경악했다. 관중들이 느낀 놀라움과 충격을 그라고 느끼지 못했을까? 데메트리우스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바티아투스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준비했다는 것이! 이게 전부인 것이오?”

“그.. 그게.”

“무슨 얼치기들을 경기장에 세웠길래 한 놈을 죽이지 못하고 몰살당하는 것이란 말이오!!”

데메트리우스도 경기장에 나선 자들이 풋내기나 얼치기 검투사들이 아니란 것쯤은 알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언급하는 것은 그것마저 인정하면 애써 억누르고 있는 두려움이 자신을 완전히 뒤덮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이건 이러한 내용을 인지하고 이리 행동했기보다는 거의 본능적인 태도에 가까웠다.

바티아투스는 할말을 잃었다. 훈련소를 운영하며 수많은 검투사와 검투경기를 봤지만 저토록 압도적인 위용을 발휘하는 자는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 거.. 걱정 마십시오. 카푸아의 챔피온이자 저희 훈련소에서 가장 뛰어난 검투사인 오이노마우스를 빈사상태까지 이르게 만들었던 괴물같은 놈을 섭외해왔으니. 심지어 오이노마우스는 30명에 달하는 최고의 검투사들과 함께 놈을 상대했습니다. 놈을 상대하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가 오이노마우스였는데 그조차 빈사상태를 면치 못했지요.”

“음?”

“놈은 적아를 구분하지 않고 살육을 즐기는 놈이라 아직 내보이지 않았는데 아마 데메트리우스 님도 들어보셨을 겁니다. 디오클레스라고.”

“디오클레스? 거인족의 후손이라 여겨지는 그 디오클레스 말인가?”

그러자 바티아투스가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역시 아시는 군요? 그렇습니다!”

그제야 데메트리우스가 다소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바티아투스에게 말했다.

“그런 준비를 해놓았으면 미리 말하지 그랬소?”

“저 자가 저런 위용을 보여줄 것을 알았다면 그랬을 겁니다.”

디오클레스 이 괴물같은 놈은 적아를 가리지 않는다. 한번 피를 보면 눈앞에 있는 자들을 모조리 죽이려고 드는 놈이니 쓸데없이 풀어놓았다가는 애꿎은 검투사들만 피해를 보게 될 것이 분명했다. 만약을 대비해 섭외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디오클레스까지 경기장에 세우게 될 줄은 바티아투스 역시 예상하지 못했다.

하나 경기장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봐선 200명이든 500명이든 별 차이가 없을 것으로 보였다. 저 모습만 보면 바티아투스 자신조차 테세우스에게 경외심이 들 정도였다. 로마시민들이 마르스나 헤르쿨레스의 이름을 외치는 것이 절대 과장해서 그리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수많은 적들에게 둘러싸였음에도 테세우스는 조금도 지치지 않고 검투사들을 베고 쳐 죽이고 찔러 죽이고 터트려 죽였다. 이 전투에서 살아남는다면 전투의 신이라고 추앙받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긴말할 것 없이 당장 내보내시오! 놈이 이대로 살아남는다면 말했듯이 후환을 두려워해야 하는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오!”

“알겠. 알겠습니다.”

바티아투스는 굳은 표정으로 노예에게 지시를 내리자 그는 부리나케 경기장 아래로 달려갔다. 노예가 달려가는 목적이야 더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

콰지직!

“크아아악!”

투구의 눈 사이로 날카롭게 부러진 창대가 꽂혔다. 핏물이 울컥 투구 밖으로 튀어나왔고 예의 끔찍한 비명이 뒤따랐다.

테세우스는 글라디우스는 손 위에서 빙글 돌리며 짓쳐 드는 트라케스를 베어냈다. 트라케스는 트리키아 풍의 무장을 하고 있는 검투사였다. 이들은 구부러진 모양의 도, 시카(Sica)나 팍스(Falx)를 무기로 했는데 방패는 스쿠툼이 아니라 작은 원형이나 사각형의 파르물라(parmula)라는 방패를 사용했다.

크레스트(닭 벼슬같은 장식)와 그리폰이 새겨진 트라케스의 투구가 핏물과 함께 허공에 빙글빙글 회전했다. 당연히 투구는 빈 투구가 아니었다.

그때 테세우스는 땅이 진동하는 소음같은 것을 들었다.

쿵 쿵 쿵!

“우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관중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일어날 광경에 대한 흥분이 가득 담긴 함성이었다.

“제.. 젠장!”

“괴물이 또 나타났나?”

땅을 울리며 모습을 드러낸 주인공을 확인한 검투사들은 욕설을 나지막이 뱉으며 급히 그의 길목을 열었다.

검투사들이 확인한 것을 테세우스가 확인하지 못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테세우스도 발걸음의 주인을 바라봤다.

‘신장이 3m는 족히 넘겠군.’

그 모습은 마치 작은 산이 걸어 다니는 것 같았다.

“디.. 디오클레스.”

“미.. 미친!”

이곳에 모인 검투사들 모두가 그 사내의 이름을 알았다. 누구도 일대일로는 상대하지 못해서 수십 명씩 짝을 지어 상대하게 했던 괴물 같은 놈이 아니던가? 그런 괴물 같은 놈이 나타났다. 게다가 눈앞에 테세우스, 이놈 역시 괴물이었다.

“제길. 이래서야 괴수 대전의 들러리밖에 더 되지 않나?”

검투사는 두려움과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홀로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괴수들 사이에 끼어서 개죽음 당하고 싶은 것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디오클레스는 아군이었지만 이 미친놈은 적아를 구분할 줄 모른다. 그러니 일단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야말로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광경이었다. 붉게 충혈된 눈을 가진 디오클레스는 경기장의 함성을 무시할 정도로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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