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187화 (187/298)

# 187

187. 피의 전차.

187.

테세우스의 명령이 떨어지자 호라티우스가 이끄는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연히 글라디우스는 물론 군단병 시절, 맹수의 가죽처럼 걸치고 있던 로리카 스쿼마타(로마식 비늘갑옷류) 역시 없었다. 하나 적을 제압할 수 있는 단검과 급소를 가리는 조잡한 갑옷 정도는 저마다 갖추고 있었다.

그랬다. 테세우스는 우연히 수부라 지구의 밤거리를 산책 나온 것이 아니었다. 저들을 토벌하기 위한 일종의 계획된 산책이었다.

자신을 향해 적의를 테세우스가 어찌 모르겠는가? 기다렸다. 저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기다렸다. 내버려 뒀다면 머잖아 자신을 덮치려고 들었을 터, 물론 저들이 언제 덮치든 저들 모두를 죽일 자신이 있는 테세우스다. 하나 이들 가운데는 시민권을 가진 로마인도 있었다.

저들이 먼저 습격을 했든 아니든 엄밀히 말해 테세우스는 현재 로마시민이 아니다. 백주 대낮에 로마시민이 아닌 자가 로마시민을 죽이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만약 이런 일이 발생하길 누군가 노리고 있었다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저들을 토벌하는 건 나중에라도 할 수 있지만 시민권과 신분 문제는 민감한 부분이라 이번 기회를 놓치면 그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수부라 지구의 주먹패들이 어찌 행동하든 또 그게 누구든 분란을 최소화하는 것이 현명한 태도였다.

게다가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경기를 치르기 전에 크라수스가 자신에게 시민권을 보장하기로 작정했으니 그 시일이 정말 얼마 남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물론 이 일 역시 엄밀히 말해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였지 테세우스를 위함이 아니었다.

그러나 저들의 패악질을 확인하면 할수록 테세우스는 한시라도 저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말했듯이 몰랐다면 넘어간다. 자신이 무슨 영웅도 아니고 일부러 뒤틀린 것을 찾아다니면서 바로 잡을 생각은 없으니까. 하나 눈앞에 훤히 드러났는데도 그것을 간과하고 넘어간다면,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 패악질을 일정 부분 동의한 것이나 다름없다. 간과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이건 변명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움직였다. 하나 저들의 악한 계산대로 움직여서야 결국 저들 좋은 일만 해주는 것밖에 더 되겠는가? 자신의 좋은 의도야 어쨌든 결국 이 일로 자신은 손해를, 저들은 이득을 본다. 그렇게 둘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저들이 움직이기 전에 먼저 움직였다. 정확하게는 명령을 내렸다.

해산을 명했던 옛 군단병들이자 로마의 시민들에게. 수부라 지구의 더러운 것을 치우라고.

누군가 이 일을 기소한다면 살인죄로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일이다. 하나 이들은 기꺼이 테세우스의 일에 가담했다.

‘불특정 다수의 다툼으로 일이 마무리 지어지면 기소할 이유가 사라진다. 다수가 죽어 나간 일이니 기소할 수도 있지만 그런 짓을 애써 할 위인들이 아니지.’

법을 집행하는 자들이 공정하고 엄정하게 법을 집행했다면 이들이 아무리 밤이라지만 아무렇지 않게 단검을 들고 설칠 수 있을까? 로마법은 결국 있는 자를 위한 것이지 없는 자에게는 한없이 헐겁고 불리하게 작용한다. 법 자체도 공정하다고 보기 어렵지만 법이 아무리 공정하면 무엇 하는가? 그것을 집행하는 자가 썩었는데.

‘괜한 살인죄를 기소해서 크라수스가 후원한 축제 분위기를 흩을 간 큰 놈도 없겠지. 크라수스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원성도 일정부분 사게 될 테니 말이야. 메텔루스 가문이라면 말이 다르겠지만 내가 관여되어 있다면 모를까? 증거나 증인이라도 남아 있다면 모를까? 내가 그런 걸 남길 이유가 없으니 저들 역시 나서지 못한다.’

한눈에 보기에도 전장에서 단련된 군인들이 저마다 무기를 들고 모습을 드러내자 주먹패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뭐.. 뭐야?”

“이.. 이 새끼들이! 뭐?”

“잠깐! 잠깐! 이러지 말고 말로 하자고. 우리도 사실 말로 할 생각이었어!”

저들 가운데 간교하게 생긴 사내가 급히 입을 열었지만 테세우스는 애초에 저들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없었다. 아니 이야기는커녕 저들의 숨소리조차 들을 생각이 없었다. 테세우스가 말없이 손짓하자 옛 군단병들은 살벌한 기세로 저들을 향해 짓쳐 들었다.

“우리가 만만해 보여?”

“죽여! 모조리 죽여버려!”

“그래 어디 죽어보자! 이 새끼들아!!”

테세우스를 노리고 몰려들었던 주먹패들은 악을 쓰며 고함을 질렀지만 테세우스와 그를 따르는 사내들은 어떤 말도 뱉지 않았다. 죽을 자들에게 줄 것은 차디찬 검뿐이다.

푸우욱

촤아아악

여기저기서 배에 칼이 틀어박히고 목줄기가 잘려나가는 섬뜩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아울러 처절한 비명도 뒤따랐지만 자비를 구하는 저들의 외침에도 이들은 냉정하게 모든 이들의 목숨을 끊어 버렸다. 그러는 가운데 테세우스는 무심한 눈빛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을 뿐,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얼굴에 피를 가득 묻힌 호라티우스가 테세우스에게 다가왔다. 얼굴에 피가 그렇게 튀었으니 다른 곳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사비누스 님께서는 저들의 본거지를 궤멸 중이실 겁니다.”

“그래. 모조리 쓸어버리고 저들의 장부와 비밀스러운 거래내역을 챙겨오도록. 이들이 축재한 재물 역시 일단 모두 가져오도록.”

“이들의 시체는 어떻게 할까요?”

“한 곳에 모아두고 오늘 일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 그때 도시 밖으로 가져가서 매장이든 화장이든 하면 될 거다.”

“괜한 염려인 것 같지만 병사들이 막지 않겠습니까? 살인한 자들을 찾을 텐데요?”

“그러지는 않을 거다. 치부나 약점이 공개되는 것이 아무렇지않은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으니까.”

“알겠습니다. 그간 참느라고 혼났습니다. 한 놈도 빠짐없이 쳐 죽여야겠습니다.”

살벌한 발언이었지만 테세우스가 한술 더 떴다.

“그래. 한 놈도 남기지 말도록.”

말했지만 진실이든 거짓이든 증언할 증인은 만들 생각이 없었다. 자신을 거스르면 죽음뿐이라는 것을 보여주리라. 자비를 행하는 자에게는 자비를, 칼을 휘두르는 자에게는 칼을 줄 뿐이다.

죽일 자는 죽인다.

더 많은 적, 더 많은 적의를 사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보호할 자는 보호할 뿐이고 죽일 자는 죽일 뿐이다. 이 사람이 세르토리우스의 아들이고 자신이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라는 것을 로마인들이 알게 하겠다.

“알겠습니다.”

수부라 지구의 어느날 밤, 이제껏 타인의 고혈을 빨아먹고 살던 이들의 피가 수부라 지구의 거리마다 흘러넘쳤다. 테세우스는 태연히 자리에 앉아 사비누스 등이 가져온 장부와 서류 등을 살펴보다가 내려놓으며 서늘한 어조로 말했다.

탁!

“이건 시작일 뿐이다.”

*

콘수아리아 축제를 이틀 정도 앞두고 로마에 입성한 데메트리우스는 가장 먼저 테세우스에 대해 수소문했다.

“수부라 지구를 장악했다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게.. 그 지역의 패들을 모조리 말살시켰습니다. 더욱이 그 휘하에 사람들이 한 일이라······.”

“휘하?”

700명의 레기온과 같이 로마에 돌아왔다고 했던가? 그 사실을 떠올리던 데메트리우스는 남자의 눈빛에 서린 두려움을 읽고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장부고 뭐고 다 넘어갔겠군.”

수부라 지구의 주먹패들과 연관된 로마인들에 대한 약점이 테세우스의 손에 들어간 이상, 수부라 지구에서 일어난 일을 문제삼기는 아무래도 어려워졌다. 그 로마인들이 누군지는 자신도 모르나 테세우스와 암묵적인 협의를 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물론 수부라 지구의 주먹패들과 연관된 이들이 무슨 크라수스 급은 아니겠지만 이 일을 공론화한다면 관련된 이들의 심기를 상하게 할 테니 현명한 태도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시기를 놓쳤다.

“그.. 그. 그럴 겁니다.”

“쯔.”

혀를 차던 데메트리우스는 이내 곧 털어버렸다. 어차피 저들을 이용해 테세우스를 곤란케 하려던 건 폐기된 계획이다. 이윤과 연관된 일에 있어서 크라수스는 정말로 무서운 사내였으니까.

“그럼에도 움직였다는 건, 역시 메텔루스 가문 쪽인가?”

메텔루스 가문과 자신은 아무래도 급이 다르다. 사람들이 기대하던 메인 이벤트가 사라지면 흥이 떨어지기야 하겠지만 그 부분은 검투사 제공을 통해 메웠고 메텔루스 가문의 사정이야 크라수스도 모르는 것이 아니었으니 테세우스가 축제 전에 잘못되었어도 유야무야넘어갈 가능성이 높았다.

중요한 것은 어떤 식으로 일이 진행되었느냐가 아니라 어떤 결과가 도출되었는가다.

“실패했다. 실패했단 말이지······.”

다소 심각한 표정을 짓던 데메트리우스는 사내에게 사라지라는 손짓을 한 뒤 자신의 노예를 불렀다.

“바티아투스에게 좀 보자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

“와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

키르쿠스 막시무스가 관중들의 고함에 무너질 것처럼 요동쳤다. 길이 621m, 폭 118m, 관람객 1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경기장임에도 발 디딜 틈이 없이 사람들이 들어찼다. 관람비는 무료다. 로마시민이라면 누구나 와서 오늘의 경기를 볼 수 있었기에 경기장은 미어터질 정도로 가득 찼다. 15만 명이 아니라 20만 명도 넘는 이들이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열리는 경기를 보려고 자리한 것 같았다.

콘수아리아 축제를 후원한 크라수스는 예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상석에 자리한 두 명의 집정관, 데시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마메르코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에게 인사했다.

“미흡한 준비로 영광스런 분들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콘술 포스테리오르인 레피두스가 멋쩍은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하하하. 미흡해요? 크라수스 당신의 준비가 미흡하다면 당금 로마에서 완전한 준비를 했다고 말할 사람이 드물 것이오. 자! 보시오. 물경 20만 명도 넘어 보이는 시민들이 오늘의 경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가 거론했다시피 20만 명도 넘는 시민들이 모인 자리다. 이런 기회를 놓칠 위정자들이 어디 있을까? 이 자리에는 콘술을 비롯한 거의 모든 정무관들과 원로원의 여섯 거두라고 할 수 있는 루푸스, 칼두스, 스카에볼라, 아퀴우스, 아티커스, 하드리아누스도 자리하고 있었다. 그뿐이랴? 메텔루스 가문은 물론 율리우스, 유니우스, 코르넬리우스 등을 비롯한 로마 유수의 가문들 모두가 오늘의 축제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각자 저마다의 계산을 두고 이 자리에 참석했겠지만 이번에 열리는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경기가 얼마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 충분히 방증하고 있는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크라수스가 입을 열자 저들의 시선은 자연히 크라수스를 향했다.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열띤 열기를 보며 과연 크라수스라는 생각을 품었다. 폼페이우스에게 묻혀버릴 일을 이런 식으로 극복하다니 역시 수완이 대단한 인물이 아닌가 라는 생각에서 말이다.

게다가 이는 크라수스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도 이득이 되는 일이었다. 로마의 정무관직이란 영구직이 아니었기에 시민들의 호의를 살 수 있는 일은 언제든 환영이었다.

다만 친 폼페이우스파라 할 수 있는 아티커스나 완전한 중립이라 할 수 있는 칼두스와 하드리아누스는 경계 어린 눈빛으로 크라수스를 바라봤다. 시민들에 이어 정무관들의 환심까지 얻으니 그의 영향력이 더욱 커질 것을 염려한 것이다.

하나 그의 대항마로 폼페이우스가 있으니 크게 우려하지는 않았다. 이번의 일에서 드러나듯 크라수스는 뛰어난 인물이지만 전공이랄 것이 전혀 없는 상황이니 폼페이우스의 아성을 넘어설 수 없다.

따라서 완전한 중립이라 할 수 있는 칼두스와 하드리아누스는 오히려 크라수스가 이렇게 영향력을 넓히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폼페이우스의 독주를 막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때 레피두스가 크라수스에게 말했다.

“듣기로 사두 전차가 아니라 이두 전차라고 들었소이다.”

“그렇습니다.”

“음. 그리되면 아무래도 박진감이 덜하지 않겠소? 속도감도 그렇고.”

“단순히 전차경기만이라면 그렇겠지만 경기장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상당히 즐거운 경기가 될 겁니다.”

잠시 말을 멈춘 크라수스는 메텔루스 가문의 인사들을 슬쩍 바라본 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데메트리우스가 제안하더군요. 도전은 받아들일 테니 더 흥미로운 축제를 벌여보자고. 당연히 저로선 거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호오?”

레피두스의 감탄과 더불어 모든 이들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크라수스는 더욱 진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것을 결코 후회하진 않을 겁니다. 결과가 어찌되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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