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
185. 친구.
185.
폼페이우스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라 그런지 크라수스는 매우 공격적으로 소문을 퍼트렸다. 따라서 콘수아리아 축제가 십여 일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황임에도 로마시 전체에 소문이 퍼졌을 뿐만 아니라 로마를 넘어 카푸아까지 그 소식이 전해졌다.
비단 이 소식은 카푸아를 비롯한 로마와 근접한 도시들 뿐만 아니라 네아폴리스까지 퍼졌지만 굳이 카푸아를 거론하는 이유는 현재 데메트리우스가 카푸아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메트리우스는 카푸아에 위치한 포도밭을 시찰 중에 있었다. 이곳에서는 상등품의 포도가 생산되었고 명성 높은 팔레르눔 포도주의 산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모든 작물이 그렇지만 포도라는 것은 특히나 어느 밭에서 자라느냐에 따라 그 품질이 월등하게 달라진다. 그런 면에서 데메트리우스가 가진 포도밭은 누구나 탐을 낼 정도로 풍요로운 땅이었다.
기분좋은 표정으로 자신의 풍요로운 포도밭을 시찰하던 데메트리우스는 헐레벌떡 뛰어온 노예가 가져온 소식에 똥 씹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왕년에 술라께서 살아계실 때 말씀하신 적이 있지. 그게 뭔지 아나?”
“그.. 그걸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추수할 때에 곡식을 거두지 못하면 썩어버리거나 새들이 와서 쪼아먹듯이 모든 일이 그래. 제 때 처리하지 못하면 꼭 문제가 발생하는 법이라고 하셨지. 정말 그렇지 않나? 뭐 당시에도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이제야 그 진의를 알겠어.”
“진의.. 말입니까?”
“그래. 진의. 저 먼 곳으로 도망친 히스파니아 등지의 반란군을 그토록 토벌하려고 애를 쓰셨던 이유와 마리우스 일파를 아주 철저하게 괴멸시킨 이유를 말이야. 히스파니아의 테세우스가 그 테세우스일지 누가 짐작이라도 했겠나? 참 우스운 일이야. 술라께서 남기신 우환과 내가 남긴 우환이 겹쳐 오는 걸 보면 말이야. 아니. 아니지. 히스파니아와 세르토리우스는 술라의 뜻대로 정리된 셈이니 결국 내 우환이 나를 찾아온 셈인가?”
심기가 상한 주인 앞에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 화가 자신에게 미치지 않기를 바라며 그저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그래 다시 말해봐라. 크라수스가 콘수아리아 축제를 성대하게 지원하기로 결정했다고?”
“그.. 그것이 소식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소식을 가져온 노예는 불호령이 언제 떨어질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대답했다. 물론 데메트리우스는 지금의 분노를 풀 곳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노예들과 투닥거릴 때가 아니었다. 콘수아리아 축제가 당장 열흘도 남지 않은 상황이니 서둘러도 늦을 가능성이 높았다.
“테세우스. 그놈이 크라수스를 대체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일을 간과한다면 내게 큰 화가 닥칠 것이다.”
당장 폼페이우스의 진노를 걱정 해야 한다. 적절하게 이 사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 책임을 반드시 자신에게 물을 것이다. 그간의 공로로 책임을 묻지 않더라도 폼페이우스의 총애를 잃어버리게 될 터, 폼페이우스가 날개치며 올라갈 일이 눈앞에 선연한데 그의 총애를 잃어버린다?
“안될 일이지. 안되고말고.”
고개를 흔들던 데메트리우스가 다시 말했다.
“전차경기에 승리하면 이 일을 넘어갈 것이다라······. 전에도 느꼈지만 영리한 놈이다. 어차피 제 놈이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영광을 얻지 못하면 재판으로 나를 걸고 넘어가는 것 자체가 어려워질 테니 하는 소리겠지. 게다가 이놈은······.”
이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선 상당히 많은 재물을 소용해야 할 것이다. 하나 크라수스가 퍼트린 소문을 잠재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이 재물이 많다고는 하나 크라수스에 비할 바가 아니고 무엇보다 소문이라는 것은 퍼트리긴 쉬워도 잠재우긴 어려운 법이다.
그러니까 이 경우엔 소문을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맞소문으로 대응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그러나 재물을 길바닥에 쏟아부어도 시간이 부족하다.”
크라수스가 단기간 안에 소문을 퍼트릴 수 있는 이유는 금력도 금력이지만 그것을 기반으로 로마에 쌓아둔 인맥과 영향력 역시 막강하기 때문이다.
로마에서 자신은 술라의 해방노예에 불과하다. 그게 아니라면 꽤 부유한 상인 정도가 전부다. 물론 앞으로는 달라지겠지만 현재 자신의 주소는 그게 전부다. 다시 말해 맞소문이든 뭐든 이 소문을 잠재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피할 수는 없다. 이 일에 대한 책임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폼페이우스의 총애를 잃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테니까. 폼페이우스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해도 세인들의 눈총이 무서워 자신을 멀리하게 될 것이다.
대응하지 않는다면 테세우스 이놈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아주 수월하게 가져갈 것이다. 그 여파로 자신은 많은 것을 잃게 될 테고. 그렇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데메트리우스는 생각을 거듭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미봉책이나마 그러면 되겠군. 명성이 높은 자가 내뱉은 말은 거짓이어도 진실이 되나 명예없는 자가 뱉은 말은 진실이어도 거짓인 셈이니······. 이거 잘 하면 폼페이우스는 물론 크라수스에게도 내 쓸모를 증명할 수 있겠군.”
“서신을 써줄 테니 그것을 들고 당장 로마로 향해라.”
“아.. 알겠습니다.”
데메트리우스는 그런 다음 자신을 수행하는 노예장으로 보이는 사내에게 말했다.
“카푸아의 일은 여기까지다. 아니. 잠깐! 잠깐만. 사자!!”
데메트리우스는 테세우스가 수사자를 죽이던 모습이 갑자기 떠올랐다.
“사자? 사자라니······. 그게 무슨 뜻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노예장이 반문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말을 이어갔다.
“그 어린 나이에도 표범과 수사자를 죽인 놈이야. 히스파니아에서 전장을 경험했을 테니 저들로는 어림도 없을 터, 오히려 놈에게 빌미를 주는 일만 될 텐데······. 흐음. 그래. 검투사 나부랭이는 검투사에게 죽어야 급이 맞는 셈이지. 바티아투스에게 갈 테니 채비하라!”
폼페이에서 바티아투스와 안면을 튼 후 카푸아에 오면 종종 그와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카푸아의 라니스타(검투사 훈련소 주인, 검투사 관리자)들과 비정기적이나마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평시에는 사실 불필요한 관계고 별로 내켜 하지 않는 관계이기도 했지만 술라 아래에 있던 데메트리우스는 사람 일이라는 것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유사시를 대비해 저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송구하오나 오늘은 검투경기가 없는 날입니다.”
“누가 검투경기를 보러 간다고 하더냐? 아니지 널 검투사로 세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저.. 저는 그저!”
“알겠으니까 갈 채비나 해! 너 같은 걸 어디 라니스타들이 받아주기나 하겠냐? 팔이 잘린 검투사도 너보단 잘 싸울 테니 말이야.”
모욕적인 말이었으나 당연히 노예장은 모욕보다는 안도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아닌 말로 검투사와 검투경기를 치르면 자신이 무슨 수로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노예장은 데메트리우스의 마음이 행여나 바뀔까 서둘러 대답했다. 데메트리우스는 실제로 그러고도 남을 자였으니 말이다.
“가.. 감사합니다.”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바티아투스가 고개를 흔들며 데메트리우스에게 말했다.
“그건 좀 곤란합니다.”
그 말에 데메트리우스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이는 나를 무시하는 처사라 여겨도 되겠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람 하나 죽이는 일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하나 훈련소의 명운이 달린 일이니 이 일은 예외지요. 저 크라수스가 관여된 일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많은 돈을 들여 축제를 개최했는데 그 축제가 누군가로 인해 무산된다면 그 분노가 어디로 향하겠습니까? 가까이는 바티아투스가 되겠지만 데메트리우스 님도 화를 면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걸 원하시는 건 아닐 텐데요?”
바티아투스의 발언에 데메트리우스는 자신이 너무 성급했다는 것을 지울 수 없었다. 테세우스 이 자가 이것까지 감안하고 크라수스를 움직인 것이란 말인가? 자신의 목적도 목적이지만 그 목적을 이루고자 크라수스의 계산을 어그러뜨린다면 그 끝이 결코 좋지 못할 것이다. 크라수스가 왜 크라수스인지 알게 되리라.
“으흠.”
데메트리우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침음을 흘리다가 바티아투스를 다시 바라봤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바티아투스 이 자는 단순히 라니스타로 보기엔 정치적인 식견이 꽤 높았다. 바티아투스가 아니었다면 화를 피하려다가 화를 불러오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그 시선을 느꼈던 것일까? 바티아투스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나 데메트리우스 님께서 정녕 테세우스라는 자를 죽이고 싶으시다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요.”
“방법이 없지 않다?”
“판을 더 키우시면 될 일입니다.”
“판을 더 키우다니?”
반문하던 데메트리우스는 욕심 가득한 바티아투스의 눈빛을 보고 무슨 뜻인지 눈치챘다.
“음. 검투경기를 말하는 거요? 하나 당신 가문만으로는 키르쿠스 막시무스에 설 수 있는 급이 되지 않소. 카푸아에 존재하는 훈련소 전체는 되어야 제안이라도 할 수 있지. 그 정도는 알 텐데?”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다른 라니스타들도 데메트리우스 님이라면 적극협조할 겁니다.”
콘수아리아 축제 때 키르쿠스 막시무스(대경기장)에서 경기가 열리긴 하나 이날 열리는 경기는 전차경기가 전부다. 검투경기에 비해 훨씬 더 화려하고 성대하기에 검투경기를 따로 치를 이유가 없고 무엇보다 대경기장을 채울 정도로 많은 검투사는 그만큼 많은 비용을 소모한다. 속으로 그 비용을 계산하던 데메트리우스는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크라수스가 그 비용을 추가로 지불하면서 검투경기를 시행할 리는 없으니 결국 내가 그 비용을 모두 대야 하는데 이는 남 좋은 일만 시키는 일이요. 이게 무슨 뜻인지는 당신도 알지 않소?”
크라수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처지지만 크라수스를 밀어주는 행위를 해서도 곤란하다. 자신은 폼페이우스 쪽 인사가 아닌가? 게다가 그만한 비용이라면 차라리 다른 수를 생각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 그 비용이면 배심원 전체와 더불어 법무관까지 매수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 비용을 왜 데메트리우스 님께서 전부 지불하신다는 말입니까? 제가 알기로 테세우스라는 자가 죽으면 즐거워할 가문이 하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의 죽음을 누구보다 원하는 로마 유수의 가문에게 이 정도 비용은 아무것도 아니겠지요.”
“메텔루스!”
데메트리우스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티아투스를 바라봤다. 주제도 모르고 욕심만 가득한 자라고 여겼는데 제법이지 않은가? 메텔루스 가문이 이 일을 지지하면 크라수스도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일 것이다.
축제는 축제대로 커지고 크라수스는 크라수스대로, 메텔루스 가문은 메텔루스 가문대로, 자신은 자신대로 이 일에서 이득을 얻을 수 있다. 설혹 이 일로 인해 폼페이우스와 멀어지더라도 또 다른 권력층과 줄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될 테니 이보다 나은 묘안을 생각하기 어려웠다.
“고귀한 가문은 검투경기로 가문의 원수를 죽이는 것을 꺼리겠지만 데메트리우스 님은 저들과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가려운 곳을 긁어주면 그만한 보상 역시 뒤따르겠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데메트리우스는 그에게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오늘 당신을 만난 건 포튜나(우연과 행운의 신)의 인도하심이 분명하오.”
물론 바티아투스에게 또 다른 계획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각자의 이득을 위해 달리다가 이해관계가 일치하면 서슴없이 손을 잡는 일은 언제나 있어 왔던 일 아닌가? 그건 고려할 점도 되지 못했다.
바티아투스 역시 손을 잡으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한 사람의 죽음이 많은 사람의 기회가 된다면, 아니 모두 피해를 보더라도 내가 이득을 본다면 백번이고 죽여야지. 뭘 망설이겠는가? 바티아투스와 데메트리우스는 비슷한 표정을 짓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의 머릿속에는 테세우스가 살아남을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